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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풍을 지나 한겨울의 요트 비박

2022년 8월호(154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2. 11. 4.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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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요트 여행기 (4) 

돌풍을 지나 한겨울의 요트 비박

 

낚시객들의 성지들 중 하나인 아름다운 외연도를 벗어나 북쪽을 향한다. 오른쪽 멀리 길죽하게 누운 안면도가 보인다. 오늘은 8물, 하루에 10미터씩 물이 오르락내리락하는 12월 대사리의 바다는 결코 녹록치 않다. 하지만 그래서 더 바다로 나와 봤다. 이 추위와 물때를 경험하고 견뎌낼 수 있다면 한국에서 겪는 다른 항해의 두려움들이 사라질 거라는 생각에서다. 또 잔잔한 한강에 익숙해져 있는 함께 한 크루들에게도 바다의 맛을 제대로 경험시켜 볼 요량이었다. 5미터 파도를 견뎌본 사람은 3~4미터 파도에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 서해는 멋진 바다이지만 세일러들에게는 어려운 바다다. 높은 조수간만의 차 외에도 근해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갯벌과 섬들 사이 곳곳에 그물들이 복병처럼 깔려 있다. 갯벌이 멀리 깔려 있다는 건 수심 예측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남쪽으로 긴 항해를 갈 땐 그물과 저수심, 뻘밭을 피해 부러 먼 바다로 돌아 나간다. 서해 물때를 견뎌 본 사람은 아마도 전 세계의 어떤 조류들도 두려워하지 않을 게다. 


역조류와 함께 바람 방향이 맞지 않아 배가 3.5노트의 속도로 겨우 안면도를 벗어나 태안반도를 향하고 있을 무렵, 태안 해경으로부터 무전이 왔다. “들리십니까? 태안반도 쪽에 안개가 짙게 껴서 지나다니는 선박들 조심하라고 무전 드렸습니다.”시간은 정오를 향해 가는데 안개라는 말에 잠깐 놀라 멀리 앞쪽을 바라보니 작은 섬들 사이로 희끄무레한 하늘이 보이기는 하지만 시야를 가릴 정도는 아니었다. “아, 예 지금 여긴 괜찮습니다. 안개 나오면 조심히 전진하겠습니다.” 

 

그렇게 30분쯤 지났을까? 거리를 줄일 요량으로 가의도와 신진도 사이를 지나며 바짝 육지에 붙어 태안반도를 향하고 있는데 갑자기 돌풍과 파도가 배를 급습했다. 눈앞에는 강풍과 백파가 우르르르 몰려오고 메인 세일은 찢어질 듯 팽팽해져 바람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붐카가 붐에서 깨져 나가 줄에 매여 날아다녔다. 밀려드는 파도에 배 앞쪽은 1.5미터 이상을 떠오르며 수면에 연신 방아를 찧어댄다. 바람에 밀려 배가 제대로 조종이 되지 않는 상황. 눈앞에는 섬 주변의 등대와 비콘들이 여기저기 서 있어 자칫 잘못하면 방향을 잃고 배가 구조물들을 들이받을 수도 있다. 이런 돌풍을 처음 경험한 크루가 잔뜩 긴장을 한다. 나는 크루에게 휠을 맡기고 서둘러 메인 세일을 축범해 바람의 영향을 줄였다. 그제서야 배가 엔진의 힘을 받아 원하는 방향대로 나아간다. 


봄에서 가을까지는 경험하기 힘든 이런 돌풍들까지, 차갑고 강한 북서풍이 불어대는 한겨울의 바다가 왜 위험한지 제대로 경험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돌풍의 소동을 지나니 벌써 해가 기울어진다. 겨울 해가 짧아 반도 안쪽에 요트를 계류할 수 있는 삼길포항이나 다른 항들까지 전진할 수 없는 상황. 이전에 계류 경험이 여러 번 있는 신진항을 택하면 내일 갈 길이 아득히 멀어져 해가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전진해야 한다. 고민을 하다 파도를 피할 수 있고 수심이 깊어 보이는 모항항에 입항하기로 결정한다. 

 

처음 들어가는 항에 어렵사리 입항하니 이미 하늘은 골든타임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지금은 한겨울, 이 아름다움 뒤에는 갑작스레 해가 지고 바다 위로 어둠이 밀어닥칠 것이다. 거친 파도와 조류에 식사는 하는 둥 마는 둥 비스켓으로 때워 몸에 기력은 별로 없다. 항 안에는 수백 톤급 어선들이 즐비해 있고 배들이 워낙 높고 커서 여차저차 요트를 그 사이에 끼워도 배 위로 올라갈 방법이 없다. 어렵사리 폰툰으로 보이는 곳을 찾아 배를 묶으니 그곳은 해경 배를 대는 곳이라 하며 배를 빼달라 한다. 해가 저무는 한겨울의 항은 스산했다. 어떻게든 서둘러 배를 육지 쪽에 붙여야 숙소를 잡아 주린 배를 채우고 내일의 항해를 준비할 수 있는데 배를 붙일 곳이 없다. 하릴없이 해는 저물어 어둠이 스며들고 있어 신진항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난감한 상황. 어쩔 수 없이 육지와 따뜻한 샤워를 포기하고 한겨울 요트에서의 1박을 결정한다. 배를 낚싯배 옆에 붙이고 배 주인분께 전화를 드려 양해를 구했다. 


다행히 요트에는 먹지 못한 부식들이 많이 남아 있었고 침대칸도 충분하다. 씻을 물이 없고 한겨울 추위를 견뎌야 하는 부담이 있지만, 육지에서 꼭 쉬어야 한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나니 갑자기 낯선 항구에 아름답게 해지는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스턴에서 열심히 배를 조종할 땐 느끼지 못했었는데, 배 안에 들어오니 푹신한 소파와 침대들, 화장실과 음식 조리대 등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이 배는 물 위의 숙소, 여행자들을 위한 물 위의 집, 요트였구나. 스턴에 앉아 잠시 긴장을 풀고 지는 해를 바라보다가 크루들과 배 안에서 요리를 해 먹었다. 물티슈를 꺼내 손발을 닦으며 그 날 겪었던 돌풍이며 바다며 내일의 항해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로 수다를 떤다. 그렇게 좋은 사람들과 낯선 항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하루의 피로가 또 씻겨진다. 항구의 밤은 조용했다. 밤이 되고 몸 여기저기에 핫팩을 붙이고 누워, 음악에 기대어 한겨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세일링서울요트클럽, 모아나호 선장 임대균
keaton70@naver.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4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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