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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모든 것이 느리고 우아하게

2022년 8월호(154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2. 11. 4.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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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모든 것이 느리고 우아하게

 

아내에게 칠레사람들의 재미난 성격을 경험한 대로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즉각 없다고 했다. 없다고 했으면 되었지 다 아는 척하면서 글 쓰지 말라고 눈까지 치켜뜨는 건 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왜 이 세상에 전문가가 있어야 하는지를. 사회학자나 문화연구가들이 인간의 행동문화를 연구해 놓은 자료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물론, 살면서 부딪히며 타국의 생활문화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체득하게 된다. 시간이 얼마나 흘러야 타국의 생활문화를 다 알게 될까? 살아보니 평생을 살아도 알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사회학자의 눈으로 살게 되지 않고 교민의 눈으로 살 수 밖에 없어서 그렇다는 얘기다. 아무래도 교민으로서 가게 생활 위주로 접한 칠레인들의 성격 정도로 국한시켜 소개할까 한다.


칠레인들의 발음
23년 전, 칠레에 도착하고서 말하는데 도움이 되자고 TV를 많이 보았다. 격음이 하나도 없고 동글동글하니 아동틱하게 느껴졌다. 오랜 관습 탓인지 칠레사람들은 격음을 발음하지 못한다. 대신 된 발음을 한다. 그러니까 ㅅ,ㅋ,ㅌ,ㅍ,ㅎ의 발음이 안되어 ㅆ,ㄲ,ㄸ,ㅃ 으로 발음하며 ㅎ의 발음은 아예 없다. 경기장을 뜻하는 영어 Stadium의 경우 ‘s’자가 처음부터 나오면 발음을 못한다. 그래서 모음 ‘e’자를 첫머리에 붙여 Estadio라고 쓰고 읽기를 ‘에쓰따디오’라고 읽는다. 즉 스타디움의‘s’가 첫머리에 오면 발음을 할 수가 없어서 모임인 ‘e’자를 붙였다는 거다. 마찬가지로 School의 경우도‘스쿨’이라고 발음을 할 수가 없어서 Escuela, 즉 에쓰꾸엘라로‘e’자를 붙여서 쓴다. 그래서 그럴까? 성격도 격하지 않고 대체로 동글동글하다.(물론 칠레에도 격한 인간들이 만국 공통으로 있다)


칠레인들의 느긋함
점심을 우리 문방구 가까이에 있는 단골 식당 Laly에 가서 테이크 아웃한다. 메뉴 하나 당 4000페소(한국 돈 6000원)하는데 보통 아들 것과 내 것, 둘을 시켜 8000페소를 지불한다. 만페소짜리 지폐를 내면 거스름돈을 얼마나 늦게 주는지 통상 5분이 걸린다. (진짜다!) 
관공서에 가면 일단 줄서기부터 장관이다. 일처리 속도가 느려서 줄이 한도 끝도 없다. 더 대단한 것은 칠레사람들의 태도다. 거의 단 한사람도 불평이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알아낸 바로는, 줄을 서다가 줄이 길다 해서 돌아가는 법이 없고 기어코 자기 차례까지 기다려 당일 날 해결하는 것이 칠레인들이다. 물론 당일 날 해결이 안되면 다음날 와서 또 줄을 선다.

 

느긋함이 지나쳐서
서양은 개인주의가 발달했다고 하는데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감하기 좋은 나라가 또한 칠레다.(남미가 다 그럴 것이다) 자기 몸, 자기 가족은 자기 밖에 지킬 수 없다는 듯 칠레인들의 결근 사유는 다양하다. 감기 때문에, 친구가 죽어서, 딸 주사 맞히느라, 엄마가 옆집 아줌마랑 싸워서 말리느라, 두통에, 칫통에, 배가 아파서, 설사로, 축구로 몸살, 게임하다가 못 일어나, 공과금 내러… 물론 칠레의 노동법은 엄격하여 아플 경우 의사의 진단서를 가져와야 정당하게 결근할 수 있지만 그게 어디 그런가. 법을 안 지켰다고 해고하면 한도 끝도 없으니 가게주인만 지친다.

 

급한 성격 수양하기 좋은 나라 칠레
칠레인들은 약속을 참으로 잘한다. 그 대신 지키지는 않는다. 딱 한 가지만 말하자. 내가 평생 신을 요량으로 구두를 색색깔로 여섯 켤레를 맞췄다.(네 켤레가 있지만 평생 신기엔 부족하여) 많이 샀으니 할인 없냐 했더니 “깍아줄까, 아님 한 켤레를 선물할까?”라고 구둣방 주인이 내게 물었다. 한 켤레를 받는 것이 훨씬 유리하겠기에 검은색으로 한 켤레를 더 받겠다고 했다. 주문했던 여섯 켤레도 수차례 지연된 후 받았다. 그리고 선물하겠다던 검은 구두를 얼마 만에 받았는지 아는가? 무려 11번의 약속을 번복한 후에서야 받았다. 그러니까 구둣방에 12번이나 방문한 끝에서야 받았다는 거 아닌가. 희한한 것은 나의 태도였다. 중간에 두 번이나 구둣방 주인의 비위를 맞춰주었다는 것이다. 한번은 Goat커피숍 커피와 쿠키를 선물했고 또 한 번은 다이어리를 선물했다. 구둣방 주인 Ricardo의 부인 Maria 것까지니 두 잔의 커피와 두개의 쿠키(커피값만큼이나 비싼) 그리고 두 권의 다이어리를. 사라져가는 구둣방 장인의 솜씨가 안타까워 내가 화를 전혀 안낸 것이니 예외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급한 성격 바꾸고 싶은 분들이 칠레 오시면 반드시 고쳐질 것이다. 

느긋함의 극치
뭐니 뭐니 해도 걸음걸이다. 최소한 모데라토 정도로 걸어줘야 우리 한국인들은 참을만 한데(우린 알레그로 아닌가) 칠레인들은 몸이 불편한 환자 수준으로 느그적하게 걷는 안단테 내지는 아다지오로 걷는다. 24년째 살고 있는 나지만 급할 때는 앞지르지 못해 참기 괴롭다. 코로나 이후로 가도에서 장사를 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허락한 바람에 가도는 더욱 비좁아져서 앞지를 수가 없다. 게다가 칠레인들은‘후렌드 쉽’이 대단해서 둘이 걸어갈 경우 일렬로 걷는 법이 없고 반드시 나란히 걷기 때문에 앞지르기가 곤란하다.(괴로운 신음을 내면 비켜줄 때도 있지만 칠레인들은 앞사람 혹은 앞사람들이 알아서 비켜줄 때까지 묵묵히 따라간다) 
다시 말을 바꾸자면 성질 급한 한국 분들은 칠레에 살러 오지 마시라. 승질 버리신다~ ㅋ

공공연하게 전해지는 이야기 한 토막
‘백작의 후손’의 나라가 칠레라고 한다. 선조가 유럽인이라는 자부심이 상당하다. 도리어 유럽인들보다 더 격조와 예의를 중요시한다. 이것이 지나치다 보니 일처리 속도가 느려진 것이 관습이 되었다. 가게를 아침에 열면 점원들이 청소를 하게 되는데 한 시간이 기본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매일 청소하는데 한 시간이라니. 왜냐하면 백작의 후손이라 느리고 우아하게~ 걷는 것도 마찬가지다. 느리고 우아하게~ 약속 또한 마찬가지. 백작의 후손이 어찌 약속을 안 하겠는가. 체면이 있지. 그러나 약속 지키기는 느리고 우아하게~

 

칠레에서 노익호
melquisedecpuentealto@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4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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