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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아일체(物我一體)

2022년 12월호(158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3. 5. 5.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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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아일체(物我一體)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은 나의 손꼽히는 필독서다. 주례사 비평으로 상찬이 난무하는 출판계의 관행에 실명 비판으로 용감하게 맞선 책이다. 그 책을 읽다 보면 책을 무작정 읽기보다 나의 주견을 갖고 읽어야만 한다는 사명감이 부지불식간 스며든다. 빌려서 책을 읽더라도 소장할 만한 책이면 주문하여 서가에 고이 꽂아 놓고, 이런저런 모임에서 뜻하지 않게 손에 들어왔지만 별 볼 일 없는 책은 붉은 노끈으로 묶어 재활용장에 내놓게 된 것이 바로 《장정일의 독서일기》덕분이다. 
《기후 위기에 관한 거의 모든 것》과 《파타고니아》는 2022년에 만난 인생 책이다. 걸어서 출퇴근하고, 고기 없는 식단(도시락)을 하루 한 끼 실천하고, 1년 동안 옷을 사지 말자는 서원을 낸 까닭도 이 두 책에서 기인한다. 자동차, 고기 소비, 비행기가 탄소배출의 가장 큰 원인이란 말과 함께 그렇다고 무작정 녹색만 들어간다고 열광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녹색 자본이란 말처럼, 환경을 보호하는 척하면서 장사하기 바쁜 정치가, 기업가도 비판한다. 
지구 환경을 위해 시작한 일인데 나 자신부터 행복한 변화가 찾아왔다. 분초를 다투는 출근 시간에 차를 두고 걷는 일이 어려운 일만 같았지만, 막상 시작해 보니 별 거 아니었다. 오히려 빨리 걷고 싶어서 더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한다. 퇴근길도 뺨에 와닿는 공기를 맛보고 싶어서 설렌다. 아침을 기다리고, 저녁에 설레는 삶은 멀리 있지 않았다. 
부용천의 왜가리는 느릿느릿 긴 다리로 거닐며 물고기를 낚아채어 꿀꺽 삼키기도 하고 갑자기 화라락 날개를 펴고 창공을 유유히 날기도 한다. 사람이 두 발을 갖고 자유롭게 움직여도 저녁에는 집으로 찾아들 듯 날개가 있는 날짐승이라도 부용천에 터를 잡고 떠나지 않는다. 들오리들이 새끼오리들을 끌고 다니고 청둥오리도 초록빛 목도리를 두르고 깃털을 턴다. 보랏빛 여뀌, 부들, 억새, 강아지풀, 달맞이꽃, 명아주는 부용천에서 무리져 살고 있는 풀들이다. 출퇴근길에 눈여겨 살펴주고 살뜰하게 이름 불러주며 걷는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자연과 내가 직접 맞닿으니, 자연은 나를 소외시키는 법이 없다. 
《파타고니아》의 대표 이본 쉬나드는 기업의 존재 목적이 결코 이윤이 아니라고 공표하고, 자신들의 최대 주주는 지구임을 주저 없이 말한다. 재생 제품을 활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천연직물을 쓸 때도 양들의 복지와 무농약 목화를 고집한다. 협력업체의 근무환경이 열악하면 제휴하지 않는다. 매장도 되도록 리모델링하여 지역 특성에 맞춰 오픈한다. 소비자에게 물건을 자꾸 사지 말고 수선해서 입으라 하고, 손쉽게 수선할 수 있는 동영상을 홈페이지에 탑재까지 한다.    
반짝이는 옷을 입고, 이런 옷은 어디서 사냐고 물으면 웃음으로 화답하는 일을 즐기던 때가 있었다. 티셔츠 만드는데 2700리터, 청바지 하나에 무려 7000리터의 물이 필요하다는 말에 놀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광택은 잃었지만 아직 입을 만한 옷이 장롱에 가득하다. 미어지고 뚫어지고 찢어져서 못 입는 옷은 없었다. 유행에 뒤처져 촌스럽고, 체형이 변해서 쟁여놓고 있을 뿐이었다. 도리어 옛날 옷이 더 바느질도 꼼꼼하고 옷감도, 염색도 짱짱하다. 기억이란 때로 놀라워서 언제 어느 때 어떤 이야기 속에서 이 옷을 샀는지 환하게 떠오른다. 길가다가 충동구매로 샀던 옷도 있고, 선물 받은 옷도 있다. 보니파시오의 마켓에서 우리나라 돈 만 원 정도에 산 장미 무늬 원피스, 둘째 낳고 우울해서 이것저것 사댔던 옷들도 있다. 틈만 나면 걸었던 탓에 옛날 옷들이 흉하지 않게 맞는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말처럼 자동차를 놓고 걸었을 뿐인데 그 작은 행보가 여러 가지를 바꿨다. 잡념도 덜어내고 체중도 줄었다. 타인의 시선보다 나의 결정을 존중하니 옛날 옷이어도 자존감이 떨어지지 않았다. 몸에 맞기만 하면 되었다.  
2022년 걸음 수는 총 4,270,307보이다. 2023년이 더 기대된다. 자연과 나 사이에 어떤 이물감도 없이 찰싹 붙어 물아일체의 경지에서 하루하루 소풍처럼 삶을 대하련다. 

의정부 효자고
국어교사 박희정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8>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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