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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 보따리

2022년 12월호(158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3. 5. 5.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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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 보따리

 

어릴 적부터 내 기억 속 할머니의 집은 지저분한 창고였다. 물건을 못 버리고, 내다 버려진 것들을 거친 손으로 보따리에 양손 한가득 주어 오시는 할머니 때문에 집은 항상 쓸모없는 짐이 가득했고, 제각각의 물건들이 집안을 채워 누가 집의 주인인지 모를 정도로 불필요하게 많은 공간을 차지했다. 

그 낡고 오래된 짐들과 쓰지도 못하고 아까워 버리지도 못하는 성격에 집안은 항상 난리가 났고 바퀴벌레, 알, 날파리 등 각종 벌레들이 좋아할 아주 안락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집안을 들어설 때부터 풍기는 꼬릿한 냄새부터 앉기도 버겁게 좁은 공간, 유통기한이 지난 상한 음식, 어디서 주워왔는지 모를 식기들, 겁도 없이 바닥을 기어 댕기는 바퀴벌레들에 잔뜩 긴장하며 집안에 들어서 소파에만 앉아있거나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어 한 적이 있다. 또한 손녀에게 뭐라도 먹이고 싶은 마음에 음식을 주시는 것을 더럽다고 마다하며 못된 생각을 한 적도 많은 것 같다. 얼마 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생전 좋아하시던 소주병을 치우며 짐을 하나씩 정리해나갔다. 정리하다 보니 오래되어 다 뜯어진 벽지와 곰팡이가 잔뜩 퍼져있는 욕조, 잡동사니로 가득한 화장실 등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는 것 같지 않은 집을 리모델링 하게 됐다.
오늘, 바로 그 마지막 날로 짐을 다시 들여놓는 것을 도우러 갔다. 리모델링하며 짐을 간추렸음에도 할머니께서 굳이 버리지 않으셔서 또 한가득 남아 있었다. 할머니의 옷을 치우고 또 치웠는데도 계속 나왔다. 한 짝만 있는 양말, 보자기, 스카프, 수건, 운동화 끈, 보풀과 다 뜯어진 낡은 옷, 야구공, 두꺼운 오래된 이불, 맞지도 않는 옷, 신발 등 종류도 가지각색 다양했다. 심지어 비슷한 옷이 있어 분명 버렸는데 또 있는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악몽 같던 쓰레기더미들을 치우고 나니 드디어 멀쩡하던 집의 자태가 살아났다. 할머니께서는 이런 우리가 탐탁지 않으신지 옆에서 “이런 건 뭐 하러~버리냐! 멀쩡 혀~”, “야야 내가 알아서 정리항께 신경 쓰지 마라”, “야야 버리지 마라…” 불평불만을 하시며 낡은 수건을 은근슬쩍 빼시곤 말리셨다. 그. 러. 다. 결국엔… 주저앉아 울먹거리셨다. 좀 더 좋고 깨끗한 집에 사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정리했던 것이 할머니께는 아까운 물건을 버린 못난 것들이 된 것이다. 삼촌이 선물한 재킷, 이모가 선물한 지갑, 가방, 옷 등 각자 나름대로 사연이 있고 추억이 있는 물건들을 못 버리는 심정도 이해가 갔지만, 버려야 할 물건을 못 버리고 잊어버려 썩은 것까지 집에 들여놓는 지나친‘저장 강박증’에 답답한 가족들의 마음 또한 느껴지는 게 난처한 상황이었다. 할머니께 소중한 물건을 막 내다 버린 것에 죄송스럽고 안타까운 마음과 동시에 그래도 할머니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치워야 된다는 생각이 오고갔다. 

저장 강박증은 의사결정 능력이나 행동에 대한 계획 등과 관련된 뇌의 전두엽 부위가 제 기능을 못할 때 나타난다고 한다. 어렵게 살았던 옛날 물건을 아끼며 살았던 버릇이 강박증으로 이어진 지금 무리하게 바꾸려고 하는 건 할머니께 힘겨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할머니와 타협하여 짐을 조금씩 버렸다. 빈 헌 옷 수거함 3개가 꽉 찬 양을 버리고 나서야 모든 정리가 끝났고 어느새 하늘은 어둑해졌다. 할머니께서는 방안 가지런한 옷장을 한참이나 보고 계셨다. 이제는 할머니께서 물건들을 잃었다는 허무함 대신 오늘 보따리에 싸서 버린 가득한 옷과 쓰레기처럼 미련 보따리들을 버려내시고 앞으로 새 옷 쓰는 즐거움도 알아가셨으면 좋겠다. (다음에 할머니를 뵐 때 새 옷을 사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의정부 효자고 2학년 배서현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8>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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