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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이루지는 못했지만, 행복을 만들어가는 이의 칠레에서 온 편지

세계문화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1. 8.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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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한국인, 한국인속의 세계인]

꿈은 이루지는 못했지만, 행복을 만들어가는 이의 칠레에서 온 편지


34세, 음악가로서 독일 유학길에 오르다!

  제가 살던 동네의 오른쪽에는 수용소가 있고 왼쪽에는 미군부대가 있었습니다. 당시는 누구나 다 열악한 가운데 생활했지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매일 학교에서 배급하는 옥수수빵 한 덩이를 받았을 뿐이니, 가족이나 주변에서 음악과 같은 문화적 분위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동네 쌀집을 우연히 지나다가 세 남매의 연주를 듣게 되었습니다. ‘키스로 봉한 편지’라는 곡이었는데, 리드기타는 초등학교 1학년, 베이스기타는 3학년, 드럼은 5학년이 연주를 했지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놀라운 광경에 쭈그려 앉아 멍하니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작은 손으로 치는 전자기타의 멜로디는 무한한 감동을 선사해 주었는데, 이것이 제가 처음으로 음악에 매료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우리집에 세 들어 살면서 기타학원을 운영하는 아저씨가 어느 날부터 저보다 네 살 어린 여동생에게 공짜로 기타를 가르쳐 주었는데, 저는 부러운 마음에 쳐다만 봤지 차마 가르쳐 달라고는 말을 꺼내지는 못했지요. 여동생은 기타 뿐 아니라 교회에 있는 풍금을 지독하게 쳤고 그 열성에 감동한 어머니가 피아노 학원을 보내주셨어요. 그러던 6학년 때 “생일선물로 무엇을 원하느냐?”는 형의 말에 기타를 사 달라 하니, 정말로 기타를 사다 주었죠. 그 이후 열심히 연습해 ‘달맞이꽃’ 노래의 기타 반주를 하다가, 여동생이 피아노로 치던 ‘엘리제를 위하여’를 기타로 연주하고 싶어서 몇날 며칠 밤을 새워 피아노책을 보고 운지를 표기해 가며 연습했지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기타 교본이 따로 있더군요. 그때는 누구에게 음악적 조언을 구할 주변머리도 없었고 그럴 수 있는 사람도 주위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중학교에 진학한 어느 날, 선명회 합창단원이였던 급우가 “베토벤 교향곡 5번 있잖아!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했던 LP판, 정말 대단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클래식 세계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동경하기 시작했지요. 바로 옆 동네에 있던 작은 교회의 ‘성가문화의 밤’공연에서 까무잡잡한 여고생이 쇼팽의 ‘검은 건반을 위한 연습곡’을 쳤을 때 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벅찬 감동과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와 같은 학년인데다가 이런 변두리에서 저렇게 빛나게 연주하는 학생이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베를린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는데, 그녀가 바로 클래식 작곡가로 잘 알려진 ‘진은숙’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학습지 회사를 다니다 그곳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했지요. 나름 자리를 잡아 잘 지내던 차에 독일에서 성악으로 유학중이던 여동생과 매제로부터 편지 한 장을 받았습니다. 직장생활은 언제라도 다시 할 수 있으니 오빠가 가지고 있는 음악적 재능을 독일와서 다시 펼쳐보라는 초대장이었습니다. 당시 둘째가 갓난아기인 데다가 가장이 대책없이 공부를 시작하면 주위에서 받게 될 따가운 시선들로 심신이 고달플 것이므로 그냥 웃어 넘겼지요. 당시 저의 소박한 소망은 ‘성음사’나 ‘서라벌 레코드사’ 같이 음악과 관련된 일터에서 일하며, 음악잡지의 객원기자가 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한 달 뒤 여동생으로부터 또 다시 편지가 온 겁니다. 한국 상황이 정리되는대로 독일로 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빠의 인생살이를 저렇게 간단히 요리해 내는 당찬 여동생의 패기에 눌려 번민이 찾아왔지요. 이윽고 둘째 편지를 아내에게 보여주고 이틀이 지나자, 아내는 저에게 독일로 가라고 선뜻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음악을 얼마나 좋아하는 지를 잘 알고 있던 아내의 용감한 결단이었지요. 두고 갈 아내와 두 아이가 어찌 먹고 살지의 걱정은 일단 뒤로 한 채, 1992년 3월 독일로 갔습니다. 제 나이가 이미 34세이다 보니 부모들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요.


독일에서 지휘자로서의 두 번째 꿈에 도전하다!

  나이 들어서 공부하는 모든 학생에게 생길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두려움을 이겨내기를 결심하며 베를린에 도착해서 어학학원을 다녔습니다. 당시 선배였던 ‘이성우’씨가 졸업을 앞둔 바쁜 상황에도 불구하고 몇 개월간 기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중학생 때 독일에서 온 첼로 연주가의 눈에 뜨일 정도로 천재적인 독학연주자였는데, 나이가 들어서 기타로 전향해 버린 기절초풍할 인물이었지요. 당시 저보다 세 살 많았기에 나이든 저에게 안도의 숨을 쉬게 해 주기도 한 은인이었습니다.


  이런 선배가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소개해 준 독일 선생님은 무뚝뚝하게 가르치셨지만 비범했습니다. 입학시험을 치기위해 ‘가비’선생님을 소개받아 ‘마그데부르그’에 찾아갔을 때, 그 분과 함께 오신 ‘마티아스 바움 바흐’선생님이 절 너무 좋아하셔서 덜컥 합격하였지요. 베를린에 사는 한국인들은 노익호는 독일에서 합격할 수 없을 거라 점쳤기에, 합격한 후에 ‘내가 천재인가?’라는 황홀함과 기쁨에 한껏 도취되기도 했습니다. 


  이윽고 같이 살게 된 여동생 집은 베를린 필하모닉홀에서 걸어 7분 거리에 있었습니다. 덕분에 당대에 이름을 날리는 연주자나 지휘자들을 모두 직접 볼 수 있었지요. 레코드판으로 듣던 음악과는 전혀 다른 현장음악을 감상할 때의 엑스터시는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으니, 베를린 필하모닉홀을 내 집 드나들듯 하는 것은 당연했지요. 공부를 제대로 못하고 돌아가더라도, 베를린 필하모닉홀에서 음악회를 100회만 듣는다면 소원이 없겠다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95회 가량 들었으니 소원을 거의 이룬 셈이지 않습니까? ^^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는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들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쉬는 시간마다 뒤뜰에서 ‘카라얀’이며 ‘칼 뵘’, ‘카를로스 클라이버’, ‘로린 마젤’, ‘쥬빈 메타’등의 지휘 모습을 흉내내며 즐기곤 했지요. 그런데 세상에나! 돌아가신 ‘카라얀’, ‘칼 뵘’을 제외한 모든 기라성 같은 지휘자들을 직접 제 눈으로 보게 되다니요! 유학시절 만난 지휘자 ‘변욱’이 저보고 “혹시 지휘 공부하러 오신 거 아닙니까?”라고 착각할 정도로 지휘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연구했지요. 기타도 분명 즐거웠지만, 지휘자의 세계로 제 꿈이 점점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이상스럽게 지휘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교회의 성가지휘자가 나올 수 없는 사정이 생겨서 급하게 저에게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당시 교회의 지휘자는 쉬우면서도 어려운 위치였지요. 그 나이 때 기악이나 성악을 공부하러 온 당시에 쟁쟁한 학생들을 통솔한다는 게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은 거였으니 말입니다. 절반 이상의 성가대원와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교민이나 일반대학생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성가대 지휘자 자리에 있으면서 본격적으로 지휘자로서의 꿈을 더 꾸게 되었습니다. ‘마그데부르그’ 음대에서 지휘과목도 수강을 하였는데, 지도교수님이 제가 지휘하는 모습을 보시더니 너무나 놀라워했습니다. 모두가 서투른데 저만 멀쩡하게 지휘한 것이 기특했던가 봅니다. 드디어 이때부터 동료들이 절 무시하지 않더군요. 


  기타공부가 순풍에 돛단 듯 잘 흘러가서 일 년 뒤면 한국에 들어가 교수가 되든 뭐라도 하게 될 터였지만, 지휘자로서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휴학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 있던 중에, 유학기간 중간에 독일에 와서 이년 반을 같이 지내던 아내와 두 아이들이 초등학교 입학 때문에 한국으로 황급히 떠났지요.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과 같은 외로움이 엄습했지만, 이참에 맘 놓고 지휘자의 꿈을 이루어보자고 작정했습니다. 그러면서 지휘자로서 소박한 꿈으로 잡은 것이 한국교회 10대 성가지휘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때마침 성악과 학생의 도움으로 지휘를 공부할 수 있는 ‘할레’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독일에서 바뀐 제 2의 꿈이 곧 결실을 보일 것만 같아 제가 황홀해 죽을 지경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독일에서 칠레로, 그리고...

  그러던 중 한국에 불어닥친 IMF로 인한 생활고를 호소하던 아내가 아파트를 판 후에 칠레에 이미 이민가 있던 형수의 권유로 아이들과 함께 칠레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저에겐 황당한 사건이었지만 저는 상관없이 음악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아내로부터 걸려온 무서운 전화 한 통이 저의 발걸음을 칠레로 향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신, 다음 달에 칠레 안 들어오면 이혼할 줄 알아!” 즉각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일단 한국으로 보내려던 컨테이너에 담긴 짐의 방향을 칠레로 향하게 하고, 제 몸도 뒤따라서 칠레의 ‘산티아고’로 들어갔습니다. 물론 독일에서 1년간 같이 지내면서 생활력이 강한 아내를 칠레 생활에 익숙하게 해놓은 다음, 저는 부리나케 다시 독일로 가려는 나름의 속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술 세계의 길에 들어서도 잘 살 수 있나 보다!’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저를 바라보는 아내를 설득시킬 자신도 없고, 그렇다고 아내의 처지를 나 몰라라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나니 음악과는 거리가 정말 먼, 장사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칠레를 빨리 떠나 어떻게 하면 다시 독일로 돌아갈까만을 고민했습니다. 아내는 그런 저의 마음을 알았는지 남편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개척하여 장사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살만하다 싶은 순간 아내에게서 폐까지 전이된 유방암이 발견되었지요. 그저 음악만을 위해 살았던 제 소행이 몹시도 부끄러웠으며, 남편인 저만 바라보고 열심히 뒷바라지를 했던 절절한 아내의 사랑에 감복되어서 저는 전격적으로 아내의 병간호에 들어갔습니다. 다행히 대학을 졸업한 딸이 나서서 가게를 맡아 꾸려갔고, 아내가 얼추 회복이 되어 다시 같이 가게생활을 하면서 어느덧 칠레에서의 생활을 19년째 이어가고 있네요!



칠레의 양반문화를 만나다!

  칠레에도 양반문화가 있는데 아주 점잖고 신사적입니다. 대부분의 칠레인들(‘마푸체’라는 소수의 칠레 인디오들 말고)은 선조가 유럽에서 왔다고 은근히 자부심이 많아서 그런지 행동은 백작의 후손쯤으로 하지요. 반면에 하층구조로 갈수록 남미 특유의 ‘될 대로 되라’는 ‘케세라 세라’형 문화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제가 칠레에 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저급하게만 생각되었던 이들의 생각과 행동양식이 마음에 들기까지 하니 저도 점점 칠레인이 되가는 거겠죠.


  이곳은 기후 탓도 있겠지만 모든 것이 느립니다. 어지간하면 천천히 걷고 느리게 일합니다. 거리에서 뛰는 사람은 도둑으로 취급할 정도이니 여간해선 뛰지 않습니다. 아무튼 장사의 세계에서 조차 이들이 느리다보니 발 빠른 한국인인 저희 식구가 먹고 사는 것 같군요. 느린 것에 대해 더 얘기하자면, 이웃에게 초대받았을 경우 15분가량 늦게 가야 좋아합니다. 일찍 가면 실례인 셈입니다. 그리고 초대된 집을 나올 때 ‘나 간다’하고 바로 나가면 안 됩니다. 간다고 말하고 삼십분 가량 뒷풀이를 늘어 놓으며 석별의 정을 나눠야 남미식 양반이 됩니다. 건설 부문도 그렇습니다. 저희 아파트 앞에 도로공사를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한국 같으면 삼 개월 정도면 끝낼 것을 2년이 지난 오늘까지 부분 개통만 할 정도지요. 그런데도 이들의 건설이나 건축물의 강도는 세계수준입니다. 아시다시피 칠레는 지진 최강국이라 건설부문 노하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또 문화재보호에 대한 이들의 관심은 아주 각별합니다. 가령 건물의 창틀이 문화재로 지정이 되면 이 창틀을 공간이동 시키지 않기 위해 지지물로 창틀만 지지하고 나머지 부분을 철거한 후에 새 건물을 시공할 정도입니다. 종종 담벼락만 문화재로 지정이 되곤 하는데 이럴 경우도 이 담벼락을 그대로 살리면서 새 건물을 짓는데 그 아이디어나 수준이 경탄할 지경입니다. 문화재로 지정이 된 건물을 주인이 칠을 한다거나 수리할 경우 대단히 엄격하게 관공서의 지침을 따라야 하고, 시골에서조차 약간 오래된 고가구들이 비싸게 거래되곤 합니다. 여기에 저도 편승하여 취미로 옛날 자명종 시계 따위를 사다가 숨겨놓기도 하지만 아내는 질색하곤 하지요.^^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누어 주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세상은 이미 많은 교훈, 또는 성공의 덕담과 미담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쉽게 이런 얘기들을 접할 수 있어서 멋지게 사는 방법 정도는 누구나 다 아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을 실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겠죠. 저는 멋지게 사는 삶을 ‘개인의 성공’에서 이제는 ‘사람과의 관계’로 새롭게 정의하고 실천해 보려고 합니다. 제가 페이스북을 시작한 동기 중 하나가 ‘사소한 일상이나 주변에서 행복찾기’였습니다. 의외로 척박하게 사시는 분이 많은 것 같아서 저 같이 별 재미가 없는 것 같은 환경에 놓인 분들이라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소개하고, 어떤 환경에서라도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거든요. 이웃들과 행복을 나누고 싶은 거죠. 그것이 아마도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에서 전하고 싶은 내용이 아닐까 하는데, 그런가요?


칠레에서 노익호

melquisedecpuentealto@gmail.com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99호 >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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