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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중국지배를 가능하게 했던 탁월한 통신·교통·물류 시스템 : 역참제도

2018년 9월호(제107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10. 6.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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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역참제도 연구]


원나라의 중국지배를 가능하게 했던 

탁월한 통신·교통·물류 시스템

 : 역참제도



 지금으로부터 700여 년 전, 원나라를 여행했던 서양인의 파란 눈에 비친 놀라운 제도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역참제도’였습니다. 

“칸발리크시(북경)로부터 여러 지방으로 통하는 길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주요한 큰 길 가에는 어느 곳이나 40km 내지 48km마다 여행자를 위한 숙박시설과 역을 마련해 놓았다...(중략)...왕이든 황제든 지구상 누구라도 그런 제도를 보면 위대한 자산이라며 감탄할 것이다.”(마르크 폴로의 ‘동방견문록’ 中에서)

 ‘역참’은 각종 정보와 물자를 당시 최고의 속도로 주고받던 통신·교통·물류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한 국가의 발전 정도를 농업 혹은 제조공업 등의 1·2차 산업의 발전만 생각하지, 3차 산업 중의 하나인 교통·통신·물류 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가 1950년 한국전쟁의 고통과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 미만의 극빈상태에서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획기적인 고속압축 경제성장을 이룬 배경에는 1960~1970년대 정비된 도로망을 기초로 한 원활한 교통과 물류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작은 한반도의 사정이 이러하다면, 특별히 아시아와 유럽을 아우르는 세계제국을 경영해야 했던 몽골제국과 원나라의 경우 이것들은 필수적이었습니다.

 

 몽골제국과 원나라 역참제도의 세 가지 특징들

1. ‘기동성’을 특징으로 하는 유목국가에 적합한 시스템, ‘역참제도’ 

이러한 ‘역참제도’는 중국을 다스렸던 국가들 가운데 몽골(원나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주(周)나라부터 시작해서 진한시대를 거쳐, 당과 송나라도 비슷한 기능의 제도를 설치 운영했습니다. 이 중 가장 많은 역참을 설치한 국가는 유목민인 선비족의 북위를 계승한 당(唐)나라였습니다(1,639개소). 마찬가지로 유목민족인 몽골족에 의해 세워진 원나라는 수적인 면에서나(주변 칸국과 속국들에 설치된 역참을 제외한 1,400개소) 규모면에서(역참사이의 거리가 당나라의 2배 이상) 가장 활발한 ‘역참제도’를 운영했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을 지배한 이전 왕조들 중, 당나라와 특별히 몽골제국시대에 가장 활발하게 역참제도가 운영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영토의 크기의 차이도 있겠지만, 중국을 지배한 유목국가와 정주국가의 성격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할 수 있습니다. 즉, 몽골족과 같은 유목민은 농경민들과 달라서 한 곳에 정주하여 자급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기에, 그들이 일상적으로 생산할 수 없는 유목에 필요한 물자를 주변의 여러 민족들과 교류를 통해 획득해야만 했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선천적으로 이동성이 강하며, 많은 생산물을 내던 정주민족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고 그것을 신속하게 전달하는 일이야 말로 사활이 걸린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또한 안정적이고 수비적인 성격의 정주민과는 달리 유목민족은 공격적 성향이 강한데, 전투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기동성이었습니다. 

화살처럼 빠른 이 기동성을 사용하여 몽골의 칭기스칸은 서방원정초기부터 군사상의 신속한 정보를 제공할 뿐 아니라 보급품과 약탈물의 운반을 가능케 하는 ‘역참’을 설치하여 이용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우구데이’는 이것을 아예 제도화하여 역참제도를 만들었는데, 그는 자신이 한 4대업적 중에 이를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고 공언하였습니다.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칸 때 가장 많은 역참이 세워졌는데, 이는 남송의 정벌과 효율적인 제국 통치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의 명(明)나라와 청(淸)나라는 원나라가 만들어 놓은 ‘역참제도’를 기반으로 운영하였는데, 영토의 크기 문제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유목민족인 청나라(1,600개소)가 명나라(1,182개소)에 비해 400개나 더 많은 역참을 두고 운영했다는 사실은, ‘역참제도’가 유목민 국가들에게 더 적합한 시스템이라는 것을 반영하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2. 거대한 몽골제국을 통합하는 소통수단으로서의 ‘역참제도’

칭기스칸과 우구데이(칭기스칸의 셋째 아들), 그리그 그의 아들인 ‘구육’으로 이어진 정복사업으로 서유럽까지 위협하는 거대한 제국을 완성한 몽골은 후계자 계승을 둘러싼 내부 분열의 문제를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치열한 투쟁 끝에 대칸의 자리에 올라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에게 몽골제국의 통합은 더욱 중요한 과제였는데, 대칸 계승 과정에서 확연하게 드러난 내부 분열과 크고 작은 전쟁은 자칫 몽골제국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몽골제국은 대칸이 다스리는 원나라 이외에 킵차크, 일, 오고타이, 차카타이 칸국들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들과의 소통의 통로를 확보하는 것은 대칸으로서 몽골제국 전체의 평화를 유지하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소통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것이 바로‘역참제도’였습니다. 쿠빌라이는 대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유럽에 이르는 ‘북도(北道)’, 우리에게 ‘실크로드’로 알려진 이 길에 많은 역참을 설치하고 서쪽 칸국(주로 일칸국)들과의 교류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쿠빌라이와 대립관계에 있던 오고타이 칸국의 방해로 ‘북도’를 이용할 수 없게 되자, 쿠빌라이는 서안(西安)을 기점으로 파미르고원을 거쳐 서아시아에 이르는 ‘남도(南道)’를 재건하고 역참을 설치함으로써, 어떻게 하든지 칸국들과의 교류가 끊어지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역참제도’는 거대한 유라시아 몽골제국 각 지역 간의 정치·경제·문화 교류를 가능케 한 소통의 수단으로, 몽골정권이 붕괴하기까지 느슨하게나마 몽골제국의 일체성을 보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교통과 통신 및 물류까지 포괄하는 맞춤식 역참제도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원나라 이전의 나라들도 정(亭), 우(郵), 역(驛), 전(傳)과 같은 것을 설치하여 문서의 전달에서부터 사신들의 조공물의 이동 등에까지 이용했습니다. 하지만 원나라는 이 밖에도 황실에서 소비되는 물자의 수송, 서쪽 칸국에서 거두어진 물자의 수송, 전쟁수행에 필요한 군수물자들의 수송, 심지어 공훈대신들의 시신을 고향으로 운반하는데 까지 포괄적으로 역참을 이용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역참이 설치된 지역의 지형적 특징에 맞춰 육로에서는 말과 소가 끄는 수레를, 수로에서는 배, 산악지역에서는 가마, 더 험준한 지역에서는 일꾼들을 배치하여 효과적으로 물자를 나르고 운반 할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요동과 같은 추운지역에서는 개썰매를 준비하여 운영하기도 했으니, 그 치밀함이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일의 완급을 고려하여 사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을 구분하고, 사용할 수 있는 거리도 정해 두었습니다. 특별히 군사와 관련된 국가의 위급한 일이 발생했을 때는 일반적으로 120km로 제한된 사용거리를 넘어, 밤낮으로 280~350km를 달릴 수 있고, 언제든지 말을 탈 수 있는 패까지 발급해 사용했습니다. 


원나라 역참제도의 붕괴 원인

1.  지나치게 광범위한 운영과 시스템 의존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 증가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원나라의 역참제도는 거대한 제국의 통신·교통·물류를 감당하는 광범위한 국가 시스템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역참제도를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고, 이는 역참을 운영하는 관리인들에 많은 부담을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나라는 철저하게 신분을 나누어 백성을 통치했는데, 역참을 운영하는 ‘참호(站戶)’는 세금을 감면받는 대신 역참에 필요한 인력과 교통수단(말, 소, 당나귀 등)을 제공해야 했습니다. 여기에 사료를 준비해 말을 기르고 역참을 이용하는 귀족들을 위한 술과 식사까지 제공해야 했으니 이들이 갖는 부담은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전쟁으로 나라에서 말을 징발해 가는 가운데, 역참에서 제공한 말이 죽거나 병들면 참호가 새로운 말을 사서 보충하는 배상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또한 업무의 성격상 잠시라도 시간을 늦추거나 준비를 소홀히 할 수 없었기에, 당시 가장 어려운 생활을 했던 민호(民戶, 농민)들 보다 더 많은 부담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2. 원나라 내부의 각종 비리와 부패로 역참제도의 황폐화 초래

무엇보다도 쿠빌라이 칸 이후로 급속도로 부패하고 퇴락해가는 조정의 분위기에 편승해 역참을 이용함에 있어 각종 불법이 행해진 것이 역참제도의 붕괴에 결정적 이유였습니다. 해외원정이 거듭 실패한 가운데 쿠빌라이가 죽자, 원나라는 점점 유목민 특유의 진취성을 잃어가고 내부에 안주합니다. 급기야 원 말기에는 관료집단의 부패가 극에 이르러 ‘바구니 안에 들어 있는 썩은 사과처럼’관료 세력 전체가 부패하고, 원나라 사회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심각한 도덕적 타락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적법한 절차 없이 지위를 사용해 역참을 이용하고, 고관과 결탁해 사적인 영리목적으로 역참을 이용하는 일들이 많아졌으며, 역참을 이용할 수 있는 각종 서류와 패를 위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대여하는 등의 부패가 만연했습니다. 이것을 제어할 수 있는 행정적 힘이 사라지면서 고통에 시달리던 수많은 참호들이 역참을 이탈하여 정상적인 역참의 운영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나라 한반도가 세계를 경영한다면?

유목민의 나라 몽골제국은 당시의 서양인들이 깜짝 놀랄 역참제도라는 국가 시스템을 만들어 세계를 제패하고 운영했습니다. 유목민으로서 통신과 교통, 물류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너무나 불리합니다. 한반도라는 작은 땅에 5천년 이상 눌러 살고 있는 우리는 많은 부분 정주민적 DNA로 고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가 세계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유목민적 의식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떻게요? 단순하지만 물리적으로라도 이 좁은 땅을 떠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해외여행도 가능하겠지만, 여행할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미리 공부하고 현장에서 확인하고 경험하는 여행은 더욱 좋을 것입니다. 더 많은 학생들이 일찍부터 외국으로 나가 공부하며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개척하면 어떨까요? 그리고 더 많은 기업들이 해외로 진출해 사업을 펼친다면 우리 안에 어느 정도 내재되어 있는 유목민의 기상이 다시 깨어나지 않을까요?




‘사무실을 예술관으로’고종훈 
dyl815@naver.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07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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