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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없다!(1)

2018년 10월호(제108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11. 3.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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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연구여행]



  중국은 없다!(1)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10월호가 애독하시는 여러분들의 손에 들려져있을 때쯤이면, 추석연휴를 이용하여 중국을 여행하는 우리의 몸은 아마 중국 남방 땅에 있을 겁니다. 저는 여행가기 전과 다녀온 후를 모두 묶어서 두 제목으로 된 하나의 주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그것은 ‘중국은 없다!’ ‘중국은 있다!’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나누어질 수 있긴 하지만 사실상 하나의 주제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번 호(10월호)에는 ‘중국은 없다!’를 먼저 다루지만 이어서 점차적으로 ‘중국은 있다!’를 다루려고 하는 데 여기에는 작은 심리적 목적이 있긴 합니다. 누구에게 전할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을 때에 무엇부터 듣겠느냐고 묻을 때,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나쁜 소식을 먼저 그리고 좋은 것은 나중에 들으려고 할 것입니다. 중국에 대해서도 이런 순서로 할 것인데(‘없다!’부터), 그 이유는 중국을 손에 쥐었다 폈다 해 보았던 서구적 관점이나 혹은 그동안 외국인을 함부로 대하던, 반쯤은 폐쇄된 섬사람(반도) 기질을 따라서 ‘짱께’, ‘놈’, ‘왕서방’ 등으로 내뱉었던 것처럼 중국을 감정적으로 손쉽게 폄하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또 ‘중국은 있다!’를 나중에 하는 이유 역시 중국을 긍정하고, 나아가 궁극적으로 중국을 전면에 드러내려는 목적에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선시대 내내 만연했던 중국사대주의자들, 혹은 최근에 중국바람으로 중국통이 되거나 겁나게 성장하는 중국의 위력에 압도당한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둘 중에 어느 쪽으로 기울까를 생각한다면 전자(‘없다’) 쪽으로 조금 더 갈 것 같습니다. 만약 누가 나에게 중국 국적을 준다고 할 때에 택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아니라고 분명히 답할 것입니다(아마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처럼?). 저의 아버님은 북경사범대학을 재학하면서 축구로 중국, 조선, 일본에까지 유명해지셨는데(차범근, 박지성, 손흥민 이상으로), 장개석과 그의 아내 송미령(같은 송씨라는 이유로)이 저희 아버님에게 대만으로 가자는 초청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아버님의 전설같은 이야기를 들은 저는 그 때에 아버님이 한국에 남기로 작정하신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제가 대만인이나 중국인이 아닌 한국인이 되었으니까요. 


 또 한편으로 저 개인은 청년 후기 10년을 한국어가 어눌해질 정도로 유럽에서 유학하며 보내었기 때문에 서구적, 특히 유럽적 관점을 어느 정도 가졌고, 그래서 한국에 만연한, 설익고 무지막지한 미국문화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것은 분명합니다. 외형적으로는 서구적 학제를 장착한 중국의 많은 대학들에서 이루어지는 인문, 사회과학 특히 중국 자체에 대한 연구들이 실질적으로는 민족주의 혹은 애국심과 구분하지 않는 가운데 나온 것을 볼 때마다 솔직히 역겨운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반면에 지나친 서구적 객관성 추구는 사탄적이고 제3자적이며 냉혹한 관찰의 늪에 빠지기 십상이어서, 결국 대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또 다른 차원의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 데, 서구인 자신들도 자각을 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는 이글을 쓰는 저 개인이나 글 쓰는 다른 모든 분들의 호불호의 감정을 따라 쓴 글이 실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저는 여기서 중국과 중국인 그리고 이들이 이룬 모든 것을 바라보는 네 가지 관점(서구적, 중국적, 한국적, 일본적) 모두를 극복하고, 전지구적-전역사적으로 관찰, 질문, 평가하는 자세를 취하려고 합니다. 즉 ‘지역적’이지만 동시에 ‘세계적’이고, 또한 ‘(21세기)시대적’이지만 동시에 ‘(전)역사적’이 되려는 이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취지를 따르고자 합니다. 세계인 누구나, 적어도 제정신 차린 중국인이라면, 읽어서 수긍할 의견들을 제시하려고 애쓰려는 겁니다. 중국(인)이 무엇이(누구)냐?라는 질문에 단칼로 ‘없다!’ 혹은 ‘있다!’로 답하기에는 이 대상은 너무 크고, 많고, 다양하고, 너무 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 여러분들은 앞으로 저와 중국에 대해 글을 쓰시는 분들이 다루는 각각의 항목들을 독립적으로 판단하시되 동시에 전체적 흐름이나 기획에 대한 비평도 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이 글들로 여러분들 사이에 대화를 시작하는 소재로 삼거나 글쓴이들과 메일, SNS 상에서 대화를 이어가시기를 기대합니다. 먼저 ‘중국은 없다!’입니다. 


 1. 중국까지 전개된 인류의 종교역사


  중국 이야기를 종교에서 시작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중국의 사회와 역사에 나타난 전형적인 현상의 원인은 중국에 진정한 종교가 없었기 때문이기에 그렇습니다. 이 점을 인류의 이동과 함께 이루어진 종교변화와 관련해서 살펴볼까요? 아프리카 혹은 에덴(동산)에서 인류는 남북으로가 아니라 동서 특히 동으로 이동하였습니다. ‘J.다이아몬드¹)’ 의 생각대로 남쪽으로 아프리카의 희망봉과 북쪽의 북극으로의 이동은 여러 기후의 변화를 경험하여야 하고 그 파생통로 자체가 좁았으므로 자연스러운 인류의 이동은 그 반대방향인 동으로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동과 함께 가장 먼저 변화 혹은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종교 혹은 종교의식의 변화였습니다. 인류의 이동 출발지인 서아시아 서쪽 끝에는 현 인류의 거의 반 이상이 믿는 세 절대종교(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가 기원한 점은 매우 선명합니다. 바로 그 끝단에서 (‘에덴의 동쪽으로’)동진하여 유라시아대륙의 동쪽 끝인 중국과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발현된 종교형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전개되었습니다.



  




 이 변화에서 매우 특이하게도 일종의 일관된 흐름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계속 동진하면서 신 혹은 종교에 대한 진정한 사고에서 점차로 멀어져 갔다는 겁니다. 물론 이들이 더 나아가 삶이 척박한 환경인 북극 아래쪽을 지나 베링해를 넘어서 북, 남아메리카로 내려간 인류(소위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종교는 그 척박한 환경 때문에 남북의 차이가 거의 없이 단순한 형태로만 전개되었습니다(예: 하늘, 정령, 조상숭배 등). 그보다 아래쪽인 좀 더 살기 좋은 온대기후대를 관통하여 이동한 인류들에게는 위에서 표시된 형태로 종교가 전개된 것은 학문적 사고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19세기 이후로 많이 받아들여졌으며 상식화되었지만 억측에 불과한 소위 ‘종교의 진화’라는 관점과는 정반대의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구속주, 역사주, 우주주, 심판주 절대신 하나님이지만 만지거나 보는 물질세계를 초월한 종교는 인간의 종교적 개념이 발전한 최후의 형태가 아니라 사실상 최초의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절대종교의 신을 떠나니 인간이 겪는 수많은 현상을 설명하고 의존할 초월적 신들을 찾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바로 서아시아의 동쪽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매우 흔한 다신교입니다. 이어서 조금 더 동진하면 아래로는 두 면이 바다로 둘러쌓여 있으며 위로는 가로로 길게 누운 히말라야 산맥에 인간이 가로 막혀서 거의 섬처럼 오도가도 못하는 고인 물과 같은 지역인 인도가 나옵니다. 여기서 종교는 더욱 파생하여 엄청난 신들을 만들어 결국은 종교의 셋째 형태인 힌두교/범신론이 나온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대한 고인 물웅덩이 같은 인도에서 인간들이 오래 살면서 종교발현의 정반대 현상, 즉 뒤집기 혹은 혁신이 일어났는데 바로 인간이 신들을 만들어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신 즉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종교인 불교입니다. 실제로 부처의 고향인 룸비니는 인류동진과 어울리게도 인도에서 서쪽에 치우쳐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처가 된 사람이 극소수라는 주장하던 불교가 중국을 거쳐서 다시 일본까지 가면, 인간은 누구나 부처(‘호토케’)다 라는 사상으로 변하여 불교 진화의 끝판인 종교의 사멸을 봅니다. 


 인도 서쪽에서 인류가 다시 동진하여 중국에 이르면 주나라 시절부터 아예 신은 희미해지다가 없어지다가 전형적인 무신론사회를 형성하게 됩니다. 주나라를 성립한 주공의 사회사상을 이어받은 공자의 가르침이 맹자와 순자를 통해 유가로, 다시 그것이 정주민족정권인 송시대의 주이, 주돈이,주희 등을 거치면서 유교라는 종교형태로 변화되어간 겁니다. 이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중국종교가 전개된 것이 있습니다. 이와는 정반대편으로 중국종교가 전개된 형태는 춘추전국시대의 격동기를 지나면서 정치현실에 신물을 내면서 개인적 만족, 쾌락, 기쁨을 추구하는 사상을 선포한 노(자)장(자)의 사상입니다. 이것이 도가가 되었다가 나중에 도교라는 종교형태로 전개되었지요. 그러므로 유교나 도교 모두 사실 전형적인 중국적 종교현상인 셈입니다. 이 둘은 마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폴리스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정치철학으로는 도무지 유지할 수 없는 세계화된 헬라 사회에서, 엄격한 자기 절제를 주장하면서 세상을 세우려했던 스토아학파와 그와는 정반대로 개인적 만족, 쾌락을 추구했던 에피큐러스 학파가 지구의 정반대편에서 일어났던 것과 유사한 종교현상입니다. 즉 유럽에서의 스토아학파는 공자-유가-유교와, 또 에피큐러스 학파는 동쪽의 노자, 장자-도가-도교와 유사한 전개형태를 띄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중국에서의 유교-도교가 전개된 것은 인간이 절대종교에서 점차로 떨어져 나간 보편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중국에는 종교가 없다, 종교의 세속화 혹은 세속의 종교화만 있을 뿐! 


 그러므로 인류 이동의 동쪽 끝에 있는 중국에는 종교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때의 종교란 인간이 만든 종교가 아닌 진정한 종교, 절대종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중국 자체 내에서는 무종교사회로 전개되던 과정이 정치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매우 놀라운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정치적으로 중국의 중심을 지배하던 하나라의 종교는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것을 이은 상나라(혹은 은나라)의 종교는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주로 태양을 섬기며 주술적 예식을 행하는 종교였습니다. 이런 현상이 21세기의 한국인의 삶에도 남아있습니다. 소위 60갑자를 만드는, 10개의 태양을 의미하는 ‘10간’(갑, 을, 병 ,정...)과 그 태양아래서 사는 12종류의 동물들을 나타내는 ‘12지’(자, 축, 인, 묘...)입니다. 이 중에 10간은 바로 상나라인들이 섬기던 10개의 태양을 의미하는데, 이 태양들이 순차적으로 돌아가면서 새롭게 뜬다고 생각하여 10개의 태양을 섬겼던 거지요. 상나라의 군대도 갑(군),을(군),병, 정,. 등의 10간의 명칭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나라를 주나라가 무너뜨리면서 그것을 합리화하여 주장한 종교적 정치사상이 있습니다. 바로 천명天命사상인데, 섬기는 대상을 태양에서 그 태양의 배경에 깔린 약간은 추상적인 푸른 하늘(천), 상제上帝로 바꾼 거지요. 그런데 종교적 숭배의 대상을 이렇게 바꾸는 정치적 이유로 제시하였던 것이 바로 ‘사회윤리사상’입니다. 즉 왕이 이치를 따라서 합당하게 통치하지 않으면, ‘하늘’이 그 혹은 그의 왕조를 버리고 다른 왕이나 왕조를 택한다는 겁니다. 상나라 시절에는 일단 왕이 되면 그 왕을 제거하고 없애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는데, 그렇게 하려면 상나라를 주관하고 신앙하던 대상이었던 태양신의 심판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상나라의 종교에서 중요한 것은 갑골문 점을 치는 일을 주관하는 ‘정인’貞人(제사장)이었지만, 그 해석을 늘 주관하는 것은 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는 정치적 목적으로 먼저 태양신에서 하늘신으로 종교적 대상의 전환을 이루어 대중들에게 이런 두려움을 없애버렸습니다. 즉 정치(통치)를 합법화하기 위해 종교를 제작하는 중국 최초의 현상, 종교의 세속화가 일어난 겁니다. 중국을 통치하는 자는 이집트처럼 태양의 아들이 아닌, ‘천자’天子, 하늘의 아들로 불리었으며, 중국 뿐 아니라 주나라의 이런 정치사상을 이어받은 유교가 확고하게 전파된 조선에서도 ‘하늘天’과 관계된 종교적 개념, 건물, 대상들이 많이 있었던 겁니다. 이제 중요해진 것은 점을 치는 사람이나 왕의 해석이 아니라 그가 행하는 도덕적, 윤리적 행위였습니다. 즉 정치와 도덕, 윤리가 종교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고, 그 결과 종교가 제거되거나 무의미하게 된 무종교사회, 세속사회의 문을 열어젖힌 겁니다. 물론 막연한 하늘(상제), 조상신, 귀신에 대한 섬김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미 중국인들의 삶에서 핵심적 지위는 상실하였습니다. 


 주나라 이후 3천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의 중국역사는 (진정한)종교가 확실하게 사라진 세속사회가 전개된 시간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이전의 정치사상에서 ‘유교’와 ‘도교’라는 종교형태로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중국 내에서 정주적인 중국남방 정권인 남송시대에 이루어진 것일 뿐입니다. 즉 유목민족의 공격에 저항하지 못하고 부드러운 문화(예술)중심의 국가를 이룬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종교형태일 뿐입니다. 공자, 맹자와 순자의 사상의 핵심은 정치사상이었고 이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인성론(성선설, 성악설)을 발전시켰습니다. 하지만 남송은 동과 남쪽은 물로, 서쪽은 산맥으로, 북쪽은 유목민의 공격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정치사상을 새롭게 발전시킬 상황이 형성되지 않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理와 ‘기’氣에 대한 이론(이기론)과 그것을 더 전개시킨 이론(사단칠정론)이라는 사변적 생각에만 풍덩 빠진 새로운 종교형태를 만들어 종국적으로 ‘유가’/‘유학’이 유교라는 종교형태가 된 겁니다. 그렇지만 중국역사 속에서 유교는 대부분 ‘가족종교’로 머물거나 아니면 국가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과거제를 통한 관료제에 필요한 ‘국가종교’의 형태를 띌 뿐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매우 중국적 현실이라는 것을 ‘도가’/‘도학’이 ‘도교’라는 개인주의적 종교로 자연스럽게 전환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속의 종교화입니다. 이렇게 중국의 종교의 전개역사는 두 단계로 진행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상나라에서 주나라로 넘어가면서 정치가 종교를 바꾸고 변화시켜버리고 우위에 서는 세속사회적 경향이 매우 일찍 전개되었습니다. 종교가 없는 세속정치와 그 정치사상만이 사회를 주도하는 동력이 된 것입니다. 즉 종교의 세속화입니다.


 2) 그런 세속사상이 이제는 새로운 차원의 종교로 전환되어서 중국을 주도하는 현실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즉 세속의 종교화입니다.  


 중국의 종교역사에서 발현된 이런 현상은 중국 내부에서부터 제대로 된 자성으로 인한 결정적 변화나 외부로부터 중국 전체를 뒤집어버릴 폭발적 충격이 주어지지 않는 한, 앞으로 반복적으로 나타날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래서 21세기 현재 공산당 통치로 특이하게 유지되는 중국은 ‘종교를 세속화’한, 변질된 마르크스 공산주의임과 동시에, ‘세속을 종교화’하는 중국인 특유의 기질이 병합된 것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3. 중국에는 지도, 지리(map, geography)가 없다!


 매우 거대한 땅덩어리를 가진 중국에 지도, 지리가 없다는 말은 전혀 엉뚱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은 지리적 정체성이 매우 취약한 나라입니다. 지리-심리학적인 의미에서 중국인들의 의식 속에는 중국이라는 지도, 지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교하여 반도이며 섬나라에 사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의식에서는 지리적 정체성이 매우 선명합니다.  


 먼저 ‘중국’(中國)이란 말은 매우 구심력²)적인 반면에 매우 반원심력적인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초에 쓰인 ‘중국’이라는 단어에는 ‘가운데 있는 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동시에 바깥에 있는 땅을 배격하고, 하시하는 심리가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바깥에 있는 땅을 동서남북으로 나누어서 동이, 서융, 북적, 남만으로 불러서 자기들 주위를 둘러싼 보잘 것 없는 오랑캐, 야만족으로 여겼습니다. 


 또 지리-심리-정치학적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가운데 있는 땅’을 의미하는 중국에 사는 사람들의 지리적 정체성은 정주민족적 정권인 한, 송, 명대의 사람들의 경우는 내적으로 축소되어서 좁으면 한없이 좁아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지금 한족의 중심을 이룬 남방에 정착한 이들은 밖으로 뻗어나갈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구심력적 지리적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이 소프트웨어적인 예술 중심의 문화를 이룬 것을 자랑하지만, 문화의 다른 면인 하드웨어적인 차원(군사, 국방, 외교, 정치, 경제)에서는 취약하였기 때문에, 이 자랑은 북방의 유목민족의 공격을 늘 두려워해야 했기 때문에 한 변명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정반대로 활달한 유목민족정권인 북위와 그를 이은 수,당, 그리고 몽골계통과 여진계통이 정권을 주고받았던 요-금-원-청은 중국을 지배했지만 결코 구심력적이지 않고 끊임없이 원심력적 지리적 정체성을 가졌습니다. 말을 타고 중국을 정복했고 지배했던 유목정권들에게는 지리적 정교성이나 확정성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실력만 된다면 말을 타고 언제든지 어디든지 확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가장 중요한 사례가 유라시아 전역에 걸친 세계제국을 이룬 칭기스칸과 그 후예인 원나라나, 점차적으로 동진해 오는 러시아에 지지 않으려고 러시아와 중국 중간에서 호시탐탐 몽골의 옛 명성을 이루기를 원했던 몽골의 후예인 갈탄과의 전쟁을 궁극적으로 승리로 마무리한 청나라의 강희제를 들 수 있습니다. 


 중국인들의 이런 지리적 정체성을 정치역사적 차원에서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작은 땅덩어리였지만 한반도에서 통일을 이룬 것은 BC 7세기 후반(676)에 신라에 의해서였고, 북동과 서남으로 길쭉하게 뻗어나간 땅인 일본열도의 통일도 한반도와 유사한 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한반도나 일본보다 몇 십 배나 큰 중국의 통일은 이것보다 훨씬 빨리 이루어졌고, 지구의 정반대편의 유럽은 아직까지도 연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통일은 주나라의 것으로 치거나(BC 1046) 심지어 진나라의 통일로 쳐도(BC 221) 매우 빨리 일어났지요. 이렇게 지리적으로 드넓으나 통일을 이루기 매우 쉬웠다는 사실은 중국인들이 통일을 향한 열망이 클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정치의식 역시 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정주민족적 관점에서 본 중국의 지리는 동쪽과 남쪽은 바다로, 서쪽은 산맥으로 경계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북방의 문은 항상 열려있고 그 쪽으로 늘 정체를 알 수 없는 세력이 갑자기 나타나서 2천년 중국역사의 7할 이상을 지배했기 때문에, 경계선을 명확하게 그을 수 없어서 항상 불안한 지리적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주민의 입장에서 야만인인 이들이 중국에 들어와서 중국인으로 행세하며 통치를 이어나갔기 때문에 정주민족과 유목민족 중에 누구의 지리적 정체성이 본질적일까요? 이 질문을 중국인들에게 한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까요?




1) <총·균·쇠>의 저자

2) 원운동하는 물체가 중심을 향하는 힘, 이에 반해 원심력은 바깥으로 작용하는 힘이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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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08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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