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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에게 불편한 진실, 난징대학살 기념관

2018년 11월호(제109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11. 20.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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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대학살 기념관을 둘러보고]



일본인들에게 불편한 진실, 

난징대학살 기념관

 

난징하면 떠오르는 것이, 중국의 과거 여러 왕조들의 남쪽 수도라는 점과, 중국인들에게는 가장 수치스러운 점인,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저지른 만행인 ‘난징대학살’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중국으로의 공동체여행을 하며 난징에 가면 꼭 둘러보려고 마음먹은 곳이 난징대학살 기념관이었습니다. 중국의 매우 긴 역사에 비해서 난징대학살 기념관은 한 점에 불과하지만, 꼭 보아야 할 이유는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수치스러운 역사를 어떻게 정리하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택시를 탄 어떤 일본인 관광객이 영어로 목적지를 말하자, 중국인 택시 기사는 ‘일본인은 여길 봐야 한다.’며 목적지를 무시하고 택시비를 받지 않은 채 이 기념관으로 데리고 왔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저희는 물론 공짜 택시가 아닌 전철로 방문했습니다. 입구부터 참관하려는 사람이 많아, 굽이굽이 뻗은 안전바를 지나고 지나서야 기념관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난징대학살, 중국의 태도

1937년 7월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그해 11월 상하이를 점령하고 장제스 수반의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을 침공했습니다. 국민당 정부는 곧바로 난징을 포기하고 운한을 거쳐 충칭으로 피신을 했으나 군 사령관 탕셩즈 장군은 항전을 주장하며 일본군의 투항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그해 12월 10일 일본군은 난징 공격을 시작한 뒤 사흘 만인 12월 13일 난징을 점령했습니다. 난징대학살은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며 자행된 범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731부대의 생체실험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벌인 가장 끔찍한 만행으로 꼽힙니다.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아주 거대한 조각상은 아이를 잃은 여인의 모습으로 난징주민들의 고통과 아픔을 전달하여 방문객들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 누르는 것 같습니다. 좀 더 걸어가면 전시장 외벽에는 300,000명이라는 숫자가 한국어는 물론 각국의 언어로 선명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뒤를 따라 한걸음씩 들어가면 지하로 내려가는 전시장을 볼 수 있는데 마치 무덤으로 내려가는 으스스함을 느꼈습니다. 입구에는 수많은 희생당한 사람들의 이름을 벽에 적어놓았는데 마치 묘비명 같았습니다. 검은 스크린에는 하얀색 폰트로 희생자들의 이름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전시관은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공간입니다. 수많은 희생자들의 한 명 한 명 자료를 보며, 학살이라는 단어가 인류사에 반복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인간이란 이렇게 무식할 정도로 악한존재도 인간이고 또한 정반대로 한 없이 연약한 존재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구잡이로 학살하는 인간들과 그리고 허망하게 죽어간 인간들! 학살은 인간이 인간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흉악한 행위이지만 지금도 지구의 어느 구석에서 자행되는 가슴 아픈 일이며 인간의 비합리성과 비도덕성을 만천하에 드러내나 정반대로 그것을 덮어 두려는 비겁함과 부정직도 만연합니다. 지구 정반대편에서 동일한 시기에 동일한 범죄를 인간이 저지른 것이 바로 독일의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유대인의 ‘홀로코스트’입니다.

난징대학살 기념관은 그 자체로 중국이 일본에게 받은 피해를 확실하게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사건발생 70주년인 2007년 12월 13일에 맞춰 18개월간 보수와 정비를 마치고 기념관을 확장 개관하였으며 77주년인 2014년 12월 13일을 맞이하여 중국정부는 이 날을 국가추모일로 지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잊지 말자는 뜻에서 상시무료입장 정책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에 받은 피해에 대해 확실한 표현이지만,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국은 일본에 대해 배상을 청구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난징대학살 박물관 전경>

<난징대학살 희생자의 이름들>


중국의 대일청구권 포기의 배경

2차 세계대전이후 전후 처리를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강화회의가 열렸습니다. 51개국이 참여했으나 미국이 일방적으로 주도한 강화조약 안에 48개국이 조인하였고 소련, 폴란드, 체코는 끝까지 서명을 거부하였습니다. 인도와 같이 불참한 나라도 있었고, 한국, 태국, 몽골 등은 회의에 아예 초청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배상금을 받은 나라는 버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남베트남 4개국이었고 나머지 국가들은 배상이 아닌 차관과 경제협력 형식을 취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으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보았던 중국은 전승국의 일원임에도 강화회의에 참석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49년 말 국공내전으로 장개석 정권은 대만으로 쫓겨났고 중국은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과 장개석의 중화민국으로 2개의 정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본과의 협상에서 어느 쪽이 중국을 대표하는지 서로 합의할 수 없어서 중일양국의 자율의지로 알아서 해결할 문제로 남겨 둔 겁니다. 장개석의 중화민국은 중국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일본과의 강화조약을 서둘러야 했고, 그 조약내용은 가능한 일본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는 형식으로 배상청구권을 포기할 것을 강요 받습니다.

결국 장개석은 ‘중국의 관대한 도량’을 내세워 대일 배상을 자발적으로 포기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런데 키신저의 중국방문을(1971년 7월) 계기로 중국의 정통성은 대만에서 중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로서 다나카 수상이 모택동과 회담을 하며 중일 양국국교 정상화를 합의합니다.(1972년 9월 27일) 여기서 ‘주은래’는 다시 대일청구권 포기를 선언합니다. 중국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중국인민들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데, 당시 중공이 소련과의 관계 악화를 탈피하기 위해 미, 일과 관계 개선이 시급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택동과 주은래는 국교정상화를 위해 가장 껄끄러운 문제인 배상금청구 포기를 결정하고 대중을 철저하게 교육했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작년에 공동체여행으로 방문한 일본 나가사키의 평화공원은 자신들이 일으킨 전 세계를 향한 전쟁에 대해 반성은 없고 마치 자신들이 원폭의 피해자인 양 당당하게 피해를 전시한 것을 보았습니다. 역설적으로 난징대학살 기념관은 중국이 일본에 받았던 피해를 고스란히 드러냄으로 일본에게는 허리를 찌르는 역사의 가시처럼 되어 영원히 못 갚을 빚과 같은 숙제가 되어버렸습니다. 청구권 포기 당시는 외교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였으나, 현재로서는 일본에 대해 언제든지 꺼내어 쓸 수 있는 복수의 칼로 변한 겁니다. 


<집단학살 발굴현장>


한국의 대일 청구권 처리방식

한국은 이와 달리 합의가 이뤄져 무상공여 3억달러, 재정차관 2억달러, 상업차관 1억달러로 ‘재산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 정식 조인되어 대일청구권문제는 일단락되었습니다.(1965년 6월 22일) 대일청구권에 대해 찬성하는 측에서는 이렇게 받게 된 돈으로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 소양강댐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 건설을 통해 산업화가 가속되었고 미국과 일본 시장에 연결하여 경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반대하는 측에서는 필리핀이 4년간 지배를 받고 7억 달러를 받았는데 36년간 지배를 받은 우리가 받은 액수가 적으며, 개인들이 받아야 할 청구자금이 공적인 곳에 쓰였기 때문에, 대일청구권으로 받은 자금이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개인피해 등에 국가가 배상받은 것을 일단락 지음으로 더 이상 보상받지 못하는 것이 협상의 실패라고 여깁니다.

 제가 보기에 두 가지 관점 모두가 가지는 약점은 경제적 보상에 집중되어졌다는 겁니다. 만약 경제보상을 받지 않았다면 그 피해에 대한 짐이 역사적으로 일본에게 늘 남아 있었을 겁니다. 즉 ‘역사적 관점’에서 보는 겁니다. 유태인 학살에 대한 독일의 배상을 초기에는 이스라엘이 받지 않기로 하여서 그것이 영원한 짐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나라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죠. 현재 중국은 당시의 정치적, 외교적 상황 때문에 보상을 받지 않았지만 특이하게도 후손들은 역사적인 짐을 일본에게 지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며 그것을 잘 활용하는 것 같습니다. 과거를 물처럼 흘러 보내는 일본인의 관점은 역사의식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드러냅니다. 하지만 당시의 현장 자체는 지울 수 없는 것이므로 난징대학살 기념관은 일본에게 영원한 부담으로 남을 것입니다. 반면에 경제건설을 해야 하는 당시의 한국의 입장은 이해가 되나 역사로 일본에 영원한 채무를 지우고 역사로 그들을 교훈하는 일은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하게 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린휠(주) 대표 최승호
www.gbikeshop.co.kr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09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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