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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일본인 기타리스트‘하타슈지’

2018년 12월호(제110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12. 15.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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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김미경이 만난 사람]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일본인 기타리스트‘하타슈지’


 


 쌀쌀한 날씨가 낙엽을 마구 거리에 떨어뜨리던 10월의 마지막 날, 모처럼 미세먼지 없는 가을의 파란하늘을 보며 ‘이 좋은 날씨가 웬 떡이냐?’하는 마음으로 기분 좋게 학동역 삼익악기 건물을 찾았습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일본인 기타리스트 ‘하타슈지’(Shuji Hata) 를 만나기 위해서였죠. 한수정 학생기자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데, 동네 아저씨 같은 친근한 모습의 하타슈지님이 기타를 메고 문으로 들어섰습니다.


| 인연의 시작


한국과는 결혼으로 인연을 맺었죠. 물론 일본에 있을 때 한·일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한번 가 볼까’라고 마음을 먹은 뒤 1988년 한국에 와서 집사람 소개 받고 첫눈에 반해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한국 사람이 일본에서 사는 것보다, 일본사람이 한국에서 사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에서 외국 사람이 적응하면서 무척 힘들어 하는 모습을 많이 봐와서 그랬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제가 한국을 좋아하고, 사랑해서 남고 싶더라고요. 88서울올림픽 당시 한국은 열정적이고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어요. 그런 느낌이 너무 좋았습니다. 또 근대적인 건축물과 옛날 건축물들이 서로서로 조화롭게 보였고, 특히 한국 사람은 정이 많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한국의 매력에 푹 빠진 거죠. 그 당시 국제결혼이 별로 흔하지 않았어요. 우리 집사람이 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어요.(웃음) 예를 들면 의료보험에 제 이름을 올리는 것 하나도 행정담당공무원이 잘 모르니 일일이 싸우고 큰소리치면서 해결했답니다. 저는 한국말을 못하니 집사람이 할 수밖에 없었죠. 제가 보기에는 ‘이것 해주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을 정도가 될 때까지 밀어붙여서 해결했던 것 같아요. 이렇게 애써준 집사람에게 너무 고맙죠.  


| 한국과 일본의 가장 큰 문화적 차이


먼저 표현하는 문화에서 확실히 차이가 나는 것 같아요. 한국 사람의 매력은 정(情)이 많은 것인데 그러다 보니 한국인은 관계중심이고 이성보다 정(情)이 위에 있어요. 반면 일본사람들은 이성이 정(情)을 컨트롤하죠.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성이 컨트롤 하는 게 아니라 정(情)중심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사람이니까요.(웃음) 이성은 학습을 통해서 생기는 것인데 이러한 이성이 위에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일본인은 이성이 컨트롤 하다 보니 뭔가가 이상합니다. 표현을 잘 못하고, 속마음을 잘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저는 일본 사람치고는  오픈 마인드로 살았는데도 장모님에게 속마음 표현하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죠. 예를 들어 일본 사람들은 공연을 보며 ‘여기서는 가만있어야 돼’ ‘말하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을 먼저 하고 있으니 즐길 수 있는 범위가 좁아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상태에서 공연을 감상하기 때문이죠. 한마디로 ‘이렇게 하면 안돼!’ 하는 이성의 소리를 듣습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음악을 들을 때 소리 하나만으로도 즐기고 막히는 부분이 없습니다. 공연을 할 때도 신나서 하죠. 반면 일본 사람들은 마음의 깊은 부분에서 느끼려고 합니다. 일본에서 슬픈 곡을 연주할 때 조용히 눈물 흘리며 듣고 있는 분들도 있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것보다 “재밌었어요.” “신났어요.” 하는 표현과 반응에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음악을 해서 그런지 이런 부분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어요. 물론 다른 나라에서 산다면 또 다르겠죠.

또 다른 하나는 인간관계를 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한국은 서로 만나는 약속을 많이 하죠. 밥 먹고, 한잔하고 이런 게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만나야 되죠. 하지만 일본사람들은 한 번 친해지면 마음의 고리가 1년, 2년, 아니 10년 만나지 않아도 똑같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안보면 멀어지는 것 같아요. 이렇다 보니 한국은 지속적으로 만나야하는 문화로 비즈니스맨들도 힘들 것 같고, 심지어 대학교에서 연구하는 분들, 교수님들도 매일 약속이 있더라고요. 일본은 대학에서 연구하는 분들은 약속이 한 달에 한 두 번일 정도로 연구만 하는 거죠. 이런 차이가 있어요.


| 한국에 계속 머물게 한 힘

먼저는 집사람, 우리가족, 처가식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서 일본으로 못간 것 같고요.(웃음) 두 번째는 계속 말씀드렸듯이 정 때문인 것 같아요. 처음 한국에 와서는 한국어 공부를 집에서 하고, 오후에 말도 배울 겸 밖에 나가 복덕방이나 가게에 들어가 한마디씩 한국말을 하고 다녔어요. 하루는 복덕방에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모여 계셨는데 제가“아~ 저 일본에서 왔습니다.”하며 일본인으로서 과거 역사에 대해 사과를 했어요. 속으로는 ‘이런 말을 하면 맞아죽지 않을까’ 걱정도 하면서요. 그런데 오히려 “아니야, 너는 죄가 없다.” 하시더군요. 일본이란 국가에 대해서는 감정이 있어도 국민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감정은 하나도 없는 거였어요. 어르신들의 반응에 정말 놀랐고 이런 점이 저를 한국에 남게 한 힘이 아니었나 싶네요.
또 재밌었던 것 중 하나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가방을 들어 주겠다고 말도 없이 가져가 처음에는 빼앗는 줄 알고 깜짝 놀랐죠. 어르신들이 타면 얼른 자리도 다 비켜주고 그랬는데 요즘은 보기도 힘들어요. 점차 개인주의가 확대되고 스마트폰만 보고 있으니 아예 눈길도 주지 않죠.
 
| ‘꽃보라 되어’라는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곡을 작곡하셨죠. 일본인으로서 어떻게 이런 곡을 작곡하게 되었나요?

저는 한·일 간의 역사를 일본에서 들었을 때부터 위안부 문제가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에 있으면서 위안부 할머니를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신문, 방송매체에서 언급될 때마다 민감했죠.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음악가로서 작곡하고 발표하고 그런 게 아닐까? ’위로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음악저작권협회 ‘백순진’ 이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2015년이 정전 70년, 한일 국교회복 50주년 해라 하더군요. 그전에 뭔가 해야 한다는 게 점점 제 마음속에서 커지더라고요. 딱히 계획해서라기보다 이런 마음이 커지니 8월 15일 전에는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꽃보라 되어’ 동영상, 음원 등을 준비했죠. 7월에 시작해 2015년 8월 5일 유투브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녹음은 ‘바다 위의 이슬’ (이순신과 한산도의 내용을 담은 곡)을 같이한 알에스 프레소 (RS Presso)팀이 때마침 녹음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녹음 기사분에게 이곡의 취지를 알리고 너무 비싸지 않게 해 달라 부탁하니 고맙게도 돈을 받지 않겠다 하더군요. 또 영상을 만들 때도 아는 분에게 이야기를 하니 그 분도 돈을 받지 않겠다며 작업을 해주셨죠. 아~~ 저는 정말 감동을 받았어요. 이렇게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기획하면서 동영상에 제 음성으로 위로의 편지를 넣고 싶어 제가 쓴 것을 토대로 계속 수정을 받으면서 일본말과 한국말로 된 동영상 2개를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곡을 발표하고 큰 깨달음이 있었어요. 한국에 27년 동안 살면서 저는 똑같이 한국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곡을 발표하고 나니 ‘아! 제가 있어야 할 자리는 한국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을 응원하고, 한국을 정말 좋은 방향으로 선도하는 외국인, 일본인으로 서 있는 게 제자리다’라는 것이었어요.(정말 깨달은 눈빛) 무리하게 한국 사람이 되고 싶다고 어깨에 힘을 주고 살아 온 게 한 번에 무너졌죠. 제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은 큰 깨달음이 되었던 시간이었습니다.  


|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작곡, 남과 다른 창의성의 원천이 무엇인가요?

일본에서 태어나 28살까지 살다, 한국에 와서 30년 가까이 살았으니 제 감성이 다른 사람보다는 좀 다르겠죠. 이런 다른 점이 작곡 할 때도 나타나지 않을까 합니다. 멜로디 위주에 화성을 붙이는 방식으로 작곡을 하면서 주제 음이 나오면 다음에는 어떤 음을 할까? 올라갈까? 내려갈까? 아니 비슷한 소리로 갈까? 자꾸 리듬을 바꿔가며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가죠. 그러다보면 한곡이 만들어집니다. 클래식을 작곡하는 것과는 좀 다르죠. 일본 가요 작곡가가 한 말을 전에 TV에서 들은 적이 있어요. “우리는 곡을 만들 때 선택하는 것뿐이다.” 요즘 그 말이 뭔지 알 것 같아요. 비록 선택하는 것이지만, 남들과는 다른 저의 감성으로 음 하나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니 이게 창의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 기타리스트로, 작곡가로 활동하고 계신데 자신의 음악으로 사람들과 무엇을 나누고 싶으세요? (한수정 학생기자)

저는 음악이 정말 위대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의사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병이 아니라, 마음을 고치고 치유하는, 즉 마음을 상대하는 의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원이 한 단계 높다고 생각하죠.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음악의 방향성’입니다. 특히 대중음악이 아주 자극적이죠. 젊은 사람들이 듣는 음악이 혼란스럽고, 뭔가 어두운 세계를 선도하는 것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너무 선정적인 춤과 음악으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면서 사람들을 끌어 들이죠. 감성적인 음악보다는 감각적인 음악으로 방향성이 잘못 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음악이 아닌 제대로 된 감성을 불러일으키고, 사람이 살아가는데 마음을 맑게 하는 이런 음악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싶어요. 작곡도 마찬가지고요.

| 자녀교육, 부부간의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요.

자녀가 4명인데 막내가 고3입니다. 아들들은 학교에서 친구사이가 되게 좋았어요. 하지만 딸들은 왕따를 당하기도 했지요. 어떤 때는 친구들에게 정말 힘든 편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제일 친한 친구에게 배신당하기도 했고요. 아마 다문화 가정이라서 그랬나 싶고, 끼리끼리 어울리는 문화로 자기와 남이 다른 상황을 용납하지 못해 그러나보다 했습니다. 일단 자녀교육도 교육이지만, 한국의 교육제도, 학원 등 사교육에 너무 문제가 많습니다. 공교육에서 배우는 게 아니라 모두 학원을 다녀야하고, 스마트폰이 없으면 왕따를 당하고 무엇보다 여름, 겨울방학에도 아침부터 학원 보내고 저녁에 들어옵니다. 여름, 겨울 방학이 왜 있습니까? 놀아야죠~ 어릴 때는 놀아야하고, 계속 놀다가‘아! 이제 공부 해볼까?’본인이 스스로 깨달아 공부를 시작하는 거죠. 한국의 이런 사교육이 도리어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이렇게 성장하면 안 되거든요. 요즘 pc방 살인사건도 이런 맥락이 아닌가 합니다. 어렸을 때 여러 가지 경험과 함께 자유롭게 잘 커야하는데(아쉬운 한숨)... 예전에는 한국이 잘 살지 못해서 부모세대는 교육을 못 받았지요. 그래서 ‘우리 얘들만큼은 이런 고생 하지 않게 잘해줘야지’하며 자녀에게 쏟아 붓고, 경쟁사회를 만들고, 반 친구들도 다 경쟁 대상이라는 것을 부모가 심어준다고 생각합니다. 일본도 이런 시대를 지나고 교육의 강도를 낮추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한국은 교육에 대해 대대적으로 다시 생각해 봐야할 것 같아요.


| 학생들을 가르칠 때 어떤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세요?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식은 단계에 따라 다르죠. ‘정성하’ 기타 신동을 중학생 때 제가 3년 동안 가르쳤어요. 제가 본 바는 리듬이나 연주하는 것이 평면적이었어요. 연주를 입체적으로 만들어 줘야하는, 즉 보이는 테크닉이 아닌, 보이지 않는 부분을 가르치는 게 중요했죠. 음악적으로도 폭넓게 클래식, 재즈, 락, 블루스 등 세포에 입력을 하듯 가르치고, 보강해야 할 부분을 익히도록 했습니다. 어느 분야나 ‘신동’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은 집중력이 있어요. 하지만 집중력은 있으나, 본인의 관심사가 아니면 신동도 가르칠 때 꾸벅꾸벅 졸아요. 재즈나 락 스타일의 영상을 보여주면 관심 없는 표정을 짓다 ‘핑거스타일’의 테크닉 영상을 보여주면 눈이 반짝반짝 하죠. 요새 대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테크닉에 있어 실력은 많이 올라왔어요. 그런데 테크닉을 더 끌어올리겠다라는 목표로 배우려고 합니다. 대부분 핑거스타일로 기타를 치는 사람들은 모든 곡들을 다 따라는 하는데 연주가 평면적입니다. 리듬감이나 풍성한 감성이 없는 거죠. 그러면 공연을 하더라도 가슴에 와 닿지 않게 됩니다. 사실 관객들은 모두 다른 상황에서 공연장에 옵니다. 어렵게 시간 내어 오기도하고, 각자 자기 삶에서 여러 가지 스트레스도 받고, 상사한테 깨지고, 엄마한테 혼나고 하며 오잖아요. 그러면 마음의 문이 몇 단계 닫혀 있습니다. 공연을 하며 저는 이런 마음을 음악으로 열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연주라도 평면적인 연주는 닫힌 마음을 열을 수가 없습니다. 감동이 전해지지 않으니까요. 입체적으로 연주하면서 연주자의 감성이 관객들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 음악인으로서 민간교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것 같아요. 한·중·일 동아시아가 어떻게 하나 되길 바라나요?

저도 한국과 일본만이 아닌 중국도 함께 힘을 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년 전, 그 중요성을 느끼고 한·중·일 3개국 뮤지션을 모아 한 팀을 만들어 여의도와 남양주에서‘아시안 하모니’라는 공연을 했어요. 3개국의 노래와 악기연주도 함께 하며 그 중요성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공연은 실패했죠. 사람이 별로 오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3개국 국민들의 관심이 활성화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 앞으로의 계획

올해 58세인데, 먼저 100세 때 3시간 공연 하는 게 목표입니다. 왜 이런 생각을 했냐고요? 몇 년 전, ‘폴 매카트니’가 한국에 공연하기 위해 방문했는데 그때가 74세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혼자 베이스기타 치고, 피아노에 앉아 연주하며 2시간 50분 공연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 나는 이것을 넘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한·중·일 3개국을 왔다 갔다 하며 공연하고 있습니다, 올해 처음 미국 LA에 다녀왔는데요. 관객들의 반응을 보면서 이제 유럽, 남미, 아프리카도 가려합니다. 좋은 음악, 좋은 연주를 세계 많은 분들에게 한사람이라도 들려주고 싶습니다.

인터뷰 내내 느낀 것은 한국사람 보다 한국을 더 섬세하게 이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들은 ‘뭐 그런 거지, 세태가 다 그렇잖아’ 하며 넘기는 것들을 하나하나 보며 한국의 좋은 것들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무척 안타까워했습니다. 무엇보다 음악인으로서 한사람에게라도 감동과 용기를 주고 긴장된 것들을 이완시켜주고 싶다며 음악을 듣고 기운을 받아, 온전한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하타슈지님의 말 하나하나에서 전달되었습니다.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10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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