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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따뜻한 남자,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2018년 12월호(제110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12. 16.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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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통신 노익호의 지휘자 이야기 7]



가슴이 

따뜻한 남자,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2008년 독일 그라모폰 잡지에서 음악 평론가들의 투표를 거쳐 오케스트라의 순위를 발표한 적이 있었다는데요. 놀랍게도 베를린 필과 비엔나 필을 제치고 암스테르담 왕립 ‘콘세르트헤보’(CONCERTGEBOW) 관현악단이 1위에 등극합니다. 80년대의 라디오 FM클래식방송에서 자주 등장했던 암스테르담 왕립 ‘콘세르트헤보’오케스트라 그리고 지휘자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귀에 박히게 듣다보니 왠지 가볍게 느껴졌더랬습니다. 그와 그 오케스트라가 들려주는 음악들이 너무나 깔끔하다보니 클래식의 대명사격인 ‘심오함’이 결여되어 왠지 칼 뵘이 몇 수 위인 것만 같았던 그 때 그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93년 어느 날, 베르나르트 하이팅크의 지휘를 직접 보고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베를린에서


 여동생이 친구들을 초대했다고 오빠인 저더러 네 시간만 나갔다오면 안되겠냐고 해서 시간을 때우려고 ‘베를린필하모닉 홀’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날 따라 가격이 저렴한 학생할인표가 매진되었고 S석만 남았는데 반값으로 준다고 해서 고민하다가 일단 샀습니다. 그리고 보았고 들었지요. 베르나르트 하이팅크가(왜 제 눈엔 미국사람 처럼 보였는지 모르겠네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당시 최고로 인기 있는 몇몇 성악가들과 무대 뒤를 꽉 채운 합창단원들과 연주한 곡이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이었던 겁니다.



 교향곡의 발전사


 음악사적으로 베토벤이 교향곡의 최정점을 찍었고, 이후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로 가면서 하향곡선을 그었으며 말러에 가서 다시 교향곡의 부흥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다 음악전문가들의 얘기이니 이럴 땐 일단‘그런가부다’하면 좋지요.(웃음) 사실, 예전에는 말러의 교향곡이 음악애호가들에게 별 환영을 못 받았었는데 지금은 대단히 각광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무튼 그 날의 감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전혀 기대없이 시간을 때우려고 갔었는데 말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은 꼭 말러의 교향곡 2번을 감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동안 부탁드린 적이 없었으니 꼭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대기만성형 지휘자


 ‘베르나르트 하이팅크’(Bernard Haitink, 1929~ )는 평범한 회사원이 대기업의 총수가 되기 까지의 일대기를 보여주듯 성실과 끈기로 최고의 지휘자가 됩니다. 그의 이력을 잠깐 살펴보면,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나 그 곳의 음악원에 진학해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지휘법도 공부합니다. 졸업과 동시에 네덜란드 방송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 바이올린 주자로 입단합니다. 그러다가 25, 26세 때 ‘국제 지휘법 강좌’를 수강하고 곧 네덜란드 방송연합의 부지휘자가 됩니다. 얼마 뒤엔 네덜란드 방송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인 ‘파울 폰 캠펜’이 사망하여 하이팅크가 그 자리를 잇습니다. 이 때부터 그의 이름이 서서히 널리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LA필과 협연, 콘세르트헤보, 런던 필의 상임지휘자로,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음악감독으로,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상임지휘자로, 보스톤 심포니의 명예지휘자로, 시카고 심포니의 수석지휘자로 이어지게 됩니다.

 


 참으로 솔직하고 겸손한


 드레스덴 슈타츠 카펠레에서 음악감독으로 와 주길 바랬으나 사양하고 상임지휘자로 취임하였으며, 시카고 심포니의 경우에서도 나이가 들었으니 전체적인 운영에 대한 책임이 있는 음악 감독직을 사양하고 지휘만 전념하겠다고 하여 상임지휘자로 취임하였습니다. 또한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카라얀이 서거하고 난 후, 단원들은 하이팅크가 맡아주길 희망하였으나 정중히 거절하였다는 말도 전해집니다.

 


 가슴이 따뜻한 남자


 그렇게 하이팅크는 격렬하고도 침착하게 말러의 교향곡 2번을 끝내고 무대 전면의 왼쪽 출구로 나갔습니다. 또한 저도 모르게 빨려 들 듯이 뒤따라 나갔습니다. 그는 대기실로 들어가 잠깐이라도 숨을 돌리려는 듯 급히 걸어갔습니다. 저는 “하이팅크!”라고 불렀고, 그는 돌연한 저의 등장에 멈칫했으며 “라디오 인터뷰?”냐고 묻지를 않겠습니까.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그제사 깨닫고 손을 저으며 돌아 나왔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고, 손에 들고 있던 프로그램에 인쇄되어 있는 그의 얼굴사진을 펼쳐 사인을 해달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그가 글쎄 품에서 만년필을 꺼내어 사인을 해주더군요. 따뜻한 가슴에 있던 만년필로 말입니다. 




칠레에서 노익호
melquisedec.puentealto@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10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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