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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호(125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3. 30.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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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력  

 

오현석 (1963~   )

새 달 돌아오면
휙 넘겨지는 지난 달 달력

바로 나타나는 다음 페이지 달력
그 속의 서른칸에 담긴 날들
소중하게 붙들고 눈여겨 살핀다
칠일씩 네 단위를 
현재에 가까운 순서 따라
중요도 부여하면서

새해 돌아오면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는 지난 해 달력

선물로 들어온 새 달력
새로운 한 해 소중한 계획 펼치기에
열두 장씩이나 되는 두툼한 페이지로 
넉넉하게 장전된 시간의 실탄
벌써부터 배부르다 

지난달은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내 시간이건만
이미 지났으므로 거리낌 없이 넘겨버린다
철 지난 달력과 함께

지난해도 
오롯이 나 홀로 쓴 시간들
거침없이 없어져야 할 것으로 뒤로 던진다
지난 달력과 함께

넘겨지고 버려진 달력과 함께
소멸된 것으로 치부해 점점 희미해지는 나의 과거,
새 달력과 함께
찬란하게 다가오는 깔깔거리는 나의 미래,
다 같이 소중한 나 자체가 아니라면
그 사이에 우왕좌왕하는 현재의 나는
어디에 서 있는 셈인가

흘러간 시간 안쓰러이 붙잡으려
지난 달력의 좋은 그림이라도 
잘라 코팅해 화장실에 붙여보지만
이젠 과거가 된 시간의 
흐릿애매하게라도 끝까지 날 휘감아 도는
아쉬움 억울함 후회함 미안함 원통함
만족감 뿌듯함 성취감 자신감 자랑하고픈 생각들
뿌리 채 뽑아지지 않는다

금연 절주 운동 같은 것들로
꼭 붙잡으려 해도 
작심삼일 걱정 때문에
허탈함만 채워질 다가오는 시간들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쉽게 잊혀 지지 않는 과거는
또 안달복달 불안하지 않아도 될 현재는
헛된 장밋빛으로 가슴을 물들지 않아도 될 미래는
과연 만들 순 없을까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으신 바로 그 분이라면

팔팔한 기상으로 인생출발선에 선 청춘
용기백배 현장에 풍덩 뛰어드는 중년
오랜 시간 뼈 부러지게 노동하며 인내해야 하는 장년
움직일 순 없어 관조만 할 노년까지
좋거나 나쁘거나 찬란하거나 헛된 시간들을 
현미경으로 이 잡듯이 처절하게 뒤져 
심판하실 그 분
진정한 회개 근본적 자기 버림 이루지 않는다면
그러나 이룬다면
내팽개쳐진 달력처럼 뒤로 던지며 기억도 않으실 분

또 냉수 한 그릇 베푸는 선함부터 
생명을 포기하는 희생까지
박수 없이 보상 없이 잊혀지며 
심지어 비난까지 받아 스러지고 말 
세상시간을 지날지라도
그 한 페이지 역사를 기어이 찾아내어 
궁극적 보상으로 퍼부어 주실 바로 그 분 

이 아버지 같은 분이 주시는
단 하나의 시간들의 균형추
토 라 TORAH

화창한 젊은 시절 
아들같이 면 대 면 하나하나 가르치시는 분

이해 못 할 바닥모를 깊은 고난의 우물
견딜 수 없는 용광로
풍덩 빠지는 중장년이 부르짖는 단말마
당신은 어디 계시나이까
외려 침묵하고 숨으시고 대답 없으신 분
그 깊고 견고한 섭리위하여

흰머리 쭈그러진 얼굴 침침한 눈 들리지 않는 귀
메뚜기조차 짐 되어 손 하나 꼼짝 못해 
관찰의 시간만 보낼
더럽고 추하고 냄새나는 노년에도
아기처럼 나를 안으실 분

이 분이라면 
지난 지나는 다가오는 시간들로 갈갈이 찢겨진
나를 내 가치를
한 꾸러미 구슬다발로 꿰어
걸고 다니실 걸
당신의 자랑스러운 목걸이로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5>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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