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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태 변호사의 미쿡출장기

2020년 3월호(125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4. 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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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태 변호사의 미쿡출장기

미국을 떠나온 지금, 뉴욕주 북부지역(Upstate)의 공기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코를 거쳐 뇌를 바로 통과하는 듯한 그 신선한 느낌 말이죠. 우리에게 <코스모스>(Cosmos)란 책으로 잘 알려진 칼 세이건도 이 근처의 이타카(Ithaca)라는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그만큼 자연과 가깝다는 말이겠지요. 밤하늘이 바로 손에 잡힐 것 같은 지역, 시라큐스 대학 로스쿨(Syracuse Uni-versity College of Law)에서 약 한 달간 방문학자로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블록체인 관련 기업들과 일을 하면서 이 분야에 대한 뉴욕 주의 규제와 더불어 새로운 차원의 활용방안에 대해서 연구하는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학교에서 초대를 받게 된 것이었죠. 
2016년도 한국에서 비트코인 및 암호화폐 광풍이 불면서 분산화기술을 통해서 새로운 금융시스템을 추구하는 블록체인 초기의 취지가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그저 투기의 수단으로 인식되게 된 것이고, 많은 ICO(Initial Coin Offering) 프로젝트들이 실패로 귀결되었습니다. 블록체인 기술이 정확히 필요한 곳에 쓰이는 것을 고민하기보다 유행처럼 각종 사업적 아이디어에 갖다 붙인 결과이죠. 그러나 어찌되었든, 이 기술 자체가 가진 잠재력은 쉽게 무시할 바가 아니고, 초기에 버블이 일어나는 것은 과거 인터넷 기업들이 등장할 때에도 있었던 현상이므로 좀 더 두고 봐야 할 문제이긴 합니다. 

 

미국에 들어가면서 홍콩에 하루 스탑 오버를 하게 되었습니다. 들어가는 김에 홍콩의 친구들을 만나 최근의 정치상황에 대해 듣고자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현상과 블록체인 기술을 연결시킬 방법은 없을까’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기도 하였고요. 오랜만에 방문한 홍콩의 풍경이 반갑기도 하였지만 짙은 미세먼지가 암울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홍콩은 이제 중국에 속한 곳이지만 사실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 홍콩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 주장하는 곳입니다. 100년간의 영국통치경험이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새겨 넣은 것이죠. 홍콩정부가 중국과 범죄인 송환법을 추진하면서 저항운동이 시작되었는데 그 이유는 중국이 자신의 체제에 비판적인 책을 판매한 홍콩 서점들의 주인을 불법 체포하여 감금하였기 때문입니다. 범죄인 송환법이 홍콩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입에 재갈을 물리는 도구로 사용될 것이 분명하였기에 학생들을 주축으로 시민들이 이에 저항하게 된 것이 지금의 홍콩 정치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운동이 특이했던 점은 어떤 특정한 단체가 주도하는 것이 아닌 각지에 흩어진 학생과 시민들끼리 암호화된 소셜미디어 메신저를 활용하여 의사결정을 하고 저항운동을 만들어 간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민사회에서 이를 응원하고 후원하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식당들이 학생증을 가지고 들어오는 학생들에게 무료로 음식을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분산화된 의사결정구조, 그리고 자발적인 시민들의 운동의 모습이 블록체인이 추구하는 가치와 무척 닮아보였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운동을 기술과 금융을 접목시켜 활용하면 어떨까하는 아이디어가 홍콩의 바닷가를 바라보면서 문득 떠올랐습니다. 현실화는 모르겠지만, 일단 논문주제로는 괜찮아 보였기에 이를 품고 미국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시라큐스 대학 로스쿨


 처음에는 연구하고 짧은 논문만을 쓰고 돌아올 작정이었지만, 학교 측의 권유로 세미나를 하기로 했습니다. 미국인들 앞에서 한 달 동안의 짧은 기간 동안 이를 연구하여 발표하는 것이 부담이 되었으나, 제 낙천적인 성격 때문인지 그냥 저질러 버렸습니다. 세미나 주제를 확정하기 위한 미팅은 로스쿨 부학장인 앤드류(Andrew)와 미국변호사 데이빗(David), 그리고 저를 초대해준 손동후 변호사와 함께 하였습니다. 홍콩을 거쳐 들어오는 과정에서 찾게 된 주제를 가지고 노트에 적어 보여주며 설명하였는데, 비좁은 커피숍의 비좁은 테이블이었지만, 제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고 또 격려를 해주어 용기를 내어 시작하게 되었죠. 논문은 로스쿨의 금융법담당인 데이(Day)교수님이 담당하여 주었습니다. 이 분과는 대략적인 목차를 적어서 보내드리고 첫 미팅을 가졌는데, 블록체인이란 기술을 정치적 관점과 연결시켜서 현실에 적용하려 시도한 점이 독창적이라 칭찬해주셨습니다. 논문을 쓸 때에 참고해야 하는 <블루북>이란 책이 있는데 그 두꺼운 책을 다 보면서 시간낭비 할 필요 없으니 이것만 보라고 하며 손수 복사한 것을 건네 주셨는데 복사에 서투르셔서 한 쪽이 까맣게 나온 프린트물이 이 분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습니다. 


아이디어를 고민하고 세미나를 준비했던 과정은 행복했습니다. 잘 모르는 분야를 더듬거리며 나가는 것이 눈 쌓인 거리를 헤치며 걷는 것과 비슷했지만, 두터운 겨울옷의 촉감처럼 포근했던 것은 이 지역 주민들의 환대와 밤하늘의 높은 별 덕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민족의 전통이 제대로 섞이지 못하고 파편적인 서양문화의 한계를 가진 미국이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해서 이를 격려하고 북돋아주는 문화가 미국이 가진 저력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미나 때에도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오셨고, 한인학생회는 맛있는 점심으로, 그리고 본 세미나 한 주 전의 리허설을 제안해주고 보완사항을 지적해준 앤드류 부학장과 데이 교수님 덕분에 잘 마치게 되었습니다. 


 참석했던 대학채플의 목사님은 미래의 방향을 일견한 것 같다며 저녁식사에 초대해주시기도 했지만, 세미나 후의 제 마음은 홀가분하기보다 오히려 짐을 진 듯 무겁고 막막했습니다. 블록체인은 특히 기술뿐 아니라 경제 분야와 법, 그리고 정치이론을 같이 봐야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분야인데 제가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특히 기존 논문들을 조사하면서 블록체인이 기술이나 경제의 측면에서만 주목되었는데 이 기술과 현상이 가진 정치적 거버넌스의 관점에서의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논문과 세미나가 이를 주제로 다루고 활용방안을 제시한 것은 아마 최초일 것이라 앞으로의 길이 더 멀어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론이나 지식 자체보다도 종국적으로 이것은 우리 삶을 혁신하는 사업과 운동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 길이 더 막막해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독재화가 강화되는 중국과 러시아에 의한 민주주의의 위협, 이에 대한 홍콩과 대만의 저항이란 상황에서 북한과의 대치 속에 살아가는 남한 국민의 역할이란 무엇일까요? 제도권 정치가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시민사회의 연합을 꿈꾸고 이룰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다른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곧 저를 향한 질문이었습니다. 
우리가 ‘헬조선’이라 부르는 한국은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실 살기에 꽤 괜찮은 나라입니다. 왜 나에겐 이것밖에 해주지 않느냐고 불평하기보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우리가 가진 것들을 생각한다면 말이죠. 그러나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한국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일들이 밖에는 널려 있습니다. 특히 아시아의 비전을 제시하고 이끄는 부분에 있어서는 일본이나 중국 혹은 다른 동남아 국가들이 가지지 못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민자들의 나라, 각기 다른 전통들이 융합되지 못하고 뒤섞여 있는 곳, 누구나 딱히 주인이 아니지만, 그렇기에 유대인들이 맘껏 활개 칠 수 있었던 땅은, 어쩌면 그렇기에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기회의 땅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다음 단계를 착실히 고민하고 밟아야겠지요.

법률사무소 스프링앤 파트너스, 변호사 황경태
kyoungtae.hwang@springnpartners.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5>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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