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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에 철학을 담아 구워 내는 ‘곽지원’명장을 만나다

2020년 3월호(125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4. 4.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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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김미경이 만난 사람]

 

빵에 철학을 담아 구워 내는
‘곽지원’명장을 만나다

건국대학원 응용생물화학 박사 수료
동경제과학교 양과자 본과, 빵과 본과 졸업
일본 동경 트로와고르, 동크, 폼파도르 제과점 근무
프랑스 파리 쉐 모듀이, 오팡 팔레 근무
사단법인 한국 제빵협회 이사장
곽지원 빵 공방 대표, 곽지원 빵 아카데미 대표
잠실 여섯시 오븐 대표

 

신종코로나로 온 지구가 들썩거리는 가운데도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에 흔쾌히 인터뷰를 허락하신 곽지원 명장을 만나고 왔습니다. 양평에 도착해 ‘곽지원 빵 아카데미’ 2층으로 올라가니, 발효종 빵을 구워내는 교육생들의 손놀림이 분주하더군요. 고소한 빵 냄새를 뒤로 하고 테이블에 앉아, 명쾌하고 분명한 명장님의 말을 처음으로 이끌어 낸 것은 군포중 1학년 설지원 학생기자의 질문이었습니다. 


곽지원 선생님께서는 경제학과를 나오셨는데,왜 일본으로 제빵을 배우러 유학을 가셨는지 궁금합니다. (학생기자)
어릴 적 저희 집안은 군산에 있는 곽씨 집성촌에 시골 부자였어요. 할아버지는 양의사로 대전에 계셨고, 아버지는 세브란스 의대에 다니셨지요. 면장과 한학을 하신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 장손인 아버지가 서울에서 잠깐 내려와 집안을 돌보게 되었는데, 결국 눌러앉게 되신 것이죠. 학교를 다 마치지 못한 아버지는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힘든 삶을 사셔야 했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어린 저에게 큰 트라우마였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더 악착같이 살았던 것 같습니다.


대학을 다닐 때, 학비를 벌기 위해 여름 방학에 변산 해수욕장에서 술집을 운영하며 등록금을 마련했어요. 그 외에도 여러 일을 해 학비를 직접 벌어 대학을 다녔는데, 숙대 앞에 경양식집을 내기까지 했지요. 그런데 효창공원에 있는 양아치들이 장사를 방해했어요. 제가 학교에 다녀오면, 직원들이 “사장님! 양아치 녀석들이 와서, 매장에서 욕하고 난리를 피웠어요.” 하는 겁니다. 손님들이 떨어져 나가고, 저는‘음식만 잘 만들면 장사가 되는 게 아니구나. 장사는 정말 어려운 거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장사를 접어야만 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에 입사해서 솔선수범하며 일을 분명하게 처리하니 저희 부서뿐 아니라, 다른 부서에서도 다 저를 인정해주었습니다. 승진시즌이 되어 고가 점수 1등인 제가 당연히 승진할 거라며 미리 축하를 받기까지 했는데, 웬걸 학벌에 밀려 떨어졌습니다. 정말 창피했지만, 당시에는 20대라 웃어넘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40대가 되었을 때는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을 하니, 현실이 암담했죠. 그래서 곧장 아내와 상의를 하고 일본 제빵 유학이라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수 많은 기술 중에서 빵을 택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게 음식이고, 한식, 중식, 일식, 양식이 있지만, 빵은 전 세계가 공통으로 먹는 것이기 때문이었죠. 유학을 갈 당시 8살 어린 아들이 하나 있어 아버지께 “저와 아내가 같이 일본에 빵을 배우러 가겠으니, 아들을 맡아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드렸죠. 그러자 아버지는 정신병원에 가자고 하셨어요. 아버지 눈에 저희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죠. 우여곡절 끝에 저와 아내는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일본에 도착해 안 해 본 일 빼놓고 다 해보다
1985년, 일본 동경에 도착해 삼 일째부터 술집에서 컵을 닦으며 오후 5시부터 새벽 4시까지 11시간 일을 하는데, 머릿속에 삼라만상이 다 지나가더군요. 일본에 왔다고 바로 빵을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일단 랭귀지 스쿨을 2년 정도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돈이 되는 것은 다 했습니다. 화장실 변기 고치는 것, 술집에서 기타 치며 반주하고… 그런데 가끔 손님이 없을 때 4층 술집에서 내려다보면, 길거리에서 과일을 파는데 너무 잘 팔리는 겁니다. 그걸 보고 당장에 과일 장사를 해야겠다 마음먹고 트럭을 샀습니다. 한 번 마음먹으면 바로 실행하는 성격이라 지체할 필요가 없었거든요. 


동경제과전문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다
신주쿠에 있는 도매상에서 과일을 사려 하는데, 어리바리해 잘 주려 하지 않고, 심지어 일본 노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몰라 야쿠자들에게 끌려다니기도 했습니다. 야쿠자도 무조건 폭력조직만 있는 게 아니라 노점상을 관리하는 조직도 있더군요. 노점상들에게 돈을 받아 위에 바치는 거였죠. 게다가 거리에서 장사를 하다 보니, 경찰들에게 붙잡히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때 돈을 제일 많이 벌었던 것 같아요. 저와 아내는 3년 동안 등록금을 내면서, 단 하루도 결석하지 않았고, 저는 동경제과전문학교를 1등으로 졸업했습니다.


빵의 본고장 유럽 프랑스에서 비정하게 홀로서기
1992년에 한국으로 돌아온 저희 부부는 곧바로 프랑스 유학을 결정했습니다. 일본 제과를 배웠지만, 빵의 본고장은 뭐니해도 유럽이기 때문이었죠. 이대로 한국에서 정착하면 평생 프랑스에 갈 기회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곳에서 2년을 보내면서 힘든 일도 많았지만, 오직 제대로 된 실력을 키우기 위해 끝까지 버텼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제약 조건들에 지는 경우가 많지요. 한 예로, 프랑스에서 같이 빵을 배우던 후배가 갑자기 한국에 가겠다는 겁니다.“왜 그러냐?”물으니, 어머님이 몸이 안 좋으셔서 누워계신다는 거였죠. 하지만 형도 있는데 꼭 자기가 가야 한다고 말하는 근간에는 사실 빵을 배우기 싫은 마음이 있는 것이죠.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수많은 핑계를 대고 그 마음을 합리화시키려고 합니다. 우리처럼 손으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직업은 수백 번, 수천 번하면서 익숙해지지 않으면 실력이 나오지 않기에 실력자로 설 때까지 홀로서는 냉정한 결정과 인내의 시간이 필요한 거죠.

 

일본과 프랑스의 차이
유학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저에게 가장 많이 물어보는 질문입니다. 일본은 수많은 사람들이 저처럼 외국에서 공부하고 들어와 네덜란드 빵, 프랑스 빵, 덴마크 빵, 스위스 빵 등을 총칭해서 ‘유럽 빵’이라고 부르며 만들고 있습니다. 제가 프랑스에 가서 ‘아~ 이게 프랑스 빵 이었구나!’, ‘아~ 조프(Zopf, 꼬아진 빵)는 스위스 빵이구나!’를 확실하게 안 것이죠. 이런 안목을 프랑스에 2년 있으면서 스페인과 지중해 쪽 유럽으로 빵 여행을 다니며 터득했어요. 그래서 저는 제자들과 유럽 빵의 다양함을 배우기 위해 매년 한 번씩 프랑크푸르트, 오스트리아, 스위스, 파리로 빵 여행을 다녀옵니다. 올해는 3월 30일 출발 할 예정입니다. 


유학 후 돌아온 한국! 이제부터 생존이다
분명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빵이 있을 텐데, 제가 외국에서 유학을 하고 오니 당장 한국의 실정을 잘 모르잖습니까? 그래서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아내에게, “지금까지는 배우는 학생으로 다 봐줄만한 상황이었지만, 이제부터 생존이다.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라며 한국 시장을 알고 저를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당시 유명한 나폴레옹제과점 책임자로 들어가 기숙사에서 4년 6개월을 지냈습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어요. 일하는 직원이 80여 명 정도 되었는데, 7~8년 일한 직원들은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습니다. 명색이 책임자지만 분명 그들보다 부족한 것도 있는데, 무시당할 것을 알면서 “야! 너 왜 이리 잘하냐? 나 좀 알려줘라”라는 말이 쉽지 않았습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계급장 내려놓고 서로 부대껴 가며, 안 되는 것을 물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이겨내지 못한다면, 10년의 유학 시간이 흘러간 물이 된다고 생각하면서요. “야! 너희들 똑바로 못할래!”라고 말하기까지 딱 1년 걸렸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며 본인의 철학이 담긴 빵을 구워내다
나폴레옹제과에서 나와 1995년부터 2006년까지 잠실 부근에서 제과점 3개를 운영하며 직원 30명과 함께 10년 동안을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점차 특색있는 빵집을 만들지 않으면 동네 빵집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우리, 일본 떠날 때처럼 다시 시작하자.” 말하고, 잘 되고 있던 빵집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양평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이전의 구태의연한 방식 즉 버터 넣고, 설탕 넣고, 달걀 넣는 빵이 아닌, 다른 빵을 만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내가 만드는 제품이 다른 사람의 건강을 담보로 하는 것인 만큼 건강한 빵을 만들기로 작정한 것이죠. 그래서 시작한 것이 설탕 없이 천연 효모발효 종으로 빵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믿을 만한 밀가루를 얻기 위해 밀을 직접 재배하여 사용할 정도로 세심하게 빵을 만들고 있습니다.


경고 없이 임파선 암이 찾아오다.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이 뭔가?
지금도 25년째 아침이면 에어로빅을 하고 있습니다. 운동을 거르지 않고 열심히 하는 편이죠. 저의 밑천은 육체인데, 하루종일 서서 일할 수 없는 체력이라면 이 일을 하는 것이 허상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느닷없이 2008년 12월에 임파선 암 진단을 받았죠. 다행히 초기에 발견되어 치료를 받고 완치 판정을 받았습니다. 12년 전 일이네요. 하지만 이 일로 나의 존재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정신없이 일에 매달려 살아왔는데, 70세가 되면 다 내려놓고 아내와 6개월 정도 스페인에 가서 살다 오려 합니다.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으니, 이 육체를 좀 쉬게 하고 싶은 거죠. 무엇보다 죽을 때 호탕하게 웃으며 죽고 싶어요. 이 세상에서 여한이 없이, 나처럼 격렬하게 살다가 죽은 사람이 있나 싶을 정도로 신나게 살다 가는 것이죠. 그런 저를 위해 진심으로 울어줄 사람, 제자가 있다면 그래도 잘 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아들, 30세에 진지하게 인생을 물어오다.
아들은 저처럼 살 자신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다며 컴퓨터를 전공했습니다. 그런데 나이 30이 되던 어느 날, 자기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상의하고 싶다며 연락이 왔습니다. “혹시 빵 한다는 것 아닐까?”라며 아내에게 말을 하니, 아내는 “무슨 빵이야! 게을러서 못 할 거다”고 한마디로 일축하더군요. 하지만 찾아온 아들의 입에서 “아버지! 빵 하면 어떻겠습니까?”라는 말이 나왔고, 저희는 일주일을 생각한 끝에 아들에게 특단의 조치를 내렸습니다. “자고로 만고불변의 진리가 있다. 지금까지 내가 이루어 놓은 게 있어 누군가에게 물려주고 가야겠지만, 그게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겠냐? 생각은 좋은데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는 것은 안 되니, 나가서 배워라!” 그렇게 해서 3년 동안을 다른 가게에서 밑바닥부터 배우게 했습니다. 그리고 제 밑에서 4년을 배웠습니다. 새벽 5시부터 저녁 8시까지 혼자 하게 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죠. 두 번 늦잠 자다 저에게 걸려, “넌 빵 할 자격이 없다”며 쫓아내기도 했습니다. 이 세상은 강인한 사람만이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지금은 결혼 후 따로 독립해서 빵집을 잘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명장의 삶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더 단련시켰던 것 같습니다. 똑같은 출발선이라면, 무조건 1등을 해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저는 또 독서광입니다. 지금도 책을 일주일에 한 권씩 읽는데, 서점에 가서 책을 보고 있을 때가 너무 행복해요.(명장님은 정말 행복한 표정이었어요) 책에 심취할 때는 운전하면서 신호등에 걸려 있는 그 시간에도 책을 봅니다. 타인의 삶을 책으로 익히고, 내 모습을 투영하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돌아봅니다. 저를 피드백 하는 힘들이 책에 있습니다. 술, 담배를 하지 않으니 남은 시간에 책을 읽고, 운동하고, 음악을 듣고, 직접 드럼 연주까지 할 수 있습니다. 남들이 보면 시골에서 빵이나 만들고 있겠다 하겠지만, 많은 생각을 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를 지탱해주는 끊임없는 꿈들
지금의 나이에 제 연배들은 다 은퇴를 했지만, 저는 지금 현역으로 뛰고 있습니다. 올해 방송통신대학 일본어학과 2학년에 편입 했습니다. 결국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이해하고 관계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죠. 가르치는 자리에 있기도 하지만, 계속 배우는 학생의 자리에 있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 공부를 잘 마무리하고, 여기 양평에서 콩으로 하는 된장, 야채로 하는 김치, 염장으로 하는 젓갈, 곡물로 하는 빵/맥주/막걸리, 과일로 하는 와인, 우유로 하는 치즈, 식초 등 7가지를 가지고 조그마한 발효 마을을 만들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년 제 돈을 들여서 ‘5일장 두물머리 발효 페스티발’을 제자들과 열고 있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퇴보하지 않고 발전할 수 있다고 믿거든요.


제2의 인생으로 빵을 하고자 찾아오는 이들에게 똑같은 빵을 만들어도 “네 철학을 담아서 만든 빵이냐”, “단순히 돈벌이로 만든 빵이냐”를 생각하라며, ‘빵쟁이의 철학이 담긴 빵’을 만들라고 이야기하는 곽지원 명장님! 이 세상을 허심탄회하고 행복한 소풍으로 마감했으면 하는 마음가짐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고자 노력한다는 말로 인터뷰를 맺었습니다. 곽지원 명장님은 인터뷰를 마치고 자신의 열정과 철학이 담긴 갓 구운 빵을 저의 품에 한가득 안겨주었습니다.

 

곽지원 빵 아카데미/곽지원 빵 공방
031-775-0375/kjwm7777@hanmail.net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5>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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