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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되어 보석이 된 슬픔 하나 있다

2020년 6월호(128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8. 9.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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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되어 보석이 된 슬픔 하나 있다 *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

첫인상_‘정녕 이것이 쇼스타코비치의 곡이란 말인가?’
스탈린이 죽은 1953년의 봄은 쇼스타코비치 개인뿐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 전역에 숨통을 틔워 주었습니다. 하지만 연이은 죽음이 쇼스타코비치를 기다리고 있었죠. 사랑하는 아내가 실험 중 방사능에 노출되어 죽었고(1954년), 그를 음악의 길로 이끈 어머니(1955년)마저 숨을 거두었습니다. 스탈린의 죽음으로 찾아온 해방, 사랑하는 두 여인의 죽음이라는 충격에서 어느 정도 회복될 즈음, 그가 작곡한 곡이 바로 <피아노협주곡 2번>(1957년)입니다. 알려진 대로 아들, 막심의 19번째 생일선물로 만든 것이죠. 그래서 그런지 그의 다른 곡들과는 다르게 밝은 이미지가 많이 그려져 있습니다. 1, 3악장엔 여전히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정신없이 몰아치는 과격함이 있지만, 만화의 한 장면이 그려질 정도의 경쾌함을 느낄 수 있죠. 그리고 2악장은 낭만주의의 대가 쇼팽과, 그에 버금가는 낭만주의의 후계자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못지않게 정~말~ 아름답습니다. 씨크한 그의 사진을 보았거나, 박력 넘치는 그의 왈츠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쇼스타코비치가 만든 것이 맞아?’하는 생각이 대번에 들 것입니다.


슬픔_‘너의 정체는 무엇이냐?’
하지만 이 곡을 조용히 들으면 아름다움 속에 깃든, 오래된 슬픔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애잔함, 혹은 고독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듣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고통받고 신음하는 사람들 옆에서 함께 슬퍼하는, 아니 그들의 눈물을 대신 흘려주는 그런 음악이라고 할까요? 그의 음악이 갖는 이러한 특이함 때문인지, <쇼스타코비치는 어떻게 내 정신을 바꾸었는가?>라는 책까지 나왔으니까요. 그렇다면 쇼스타코비치는 어떻게 이런 음악을 만들 수 있었을까요? 도대체 그에게 있어 슬픔을 씻어주는 ‘슬픔’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음악가_자유를 빼앗긴 한 예술인으로서의 슬픔
쇼스타코비치를 만난 사람들은 누구나 쉽게 그의 표정과 행동 속에서 오래된 불안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공산화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의 어두운 역사와 함께할 시대적 운명을 갖고 태어났습니다(1906년). 그 어둠의 중심엔 강철 괴물, 스탈린(1878~1953)이 있었습니다. 스탈린은 1924년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자리에 오른 후, 1927년 말이 되자 프롤레타리아 계급 주도라는 이름으로 문화예술에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1934년 말, ‘대숙청 시대’가 시작되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쇼스타코비치의 후원자였던 ‘붉은 나폴레옹’이라 불리던 투하체프스키(1893~1937)가 스탈린에 의해 제거되었습니다. 문화예술 분야에선‘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창작활동의 새로운 기준으로 제시되었습니다. 기쁜 것, 희망적인 것만 보여주라는 것이죠. 쇼스타코비치에게도 위기가 닥쳤습니다. 스탈린의 평가 한마디에 잘 나가던 그의 오페라 <멕베스의 부인>이 쓰레기가 되었습니다. 더불어 그는 한 순간에 ‘형식주의자’로 낙인찍히며 인민의 원수가 되었죠. 그는 모스크바로 불려가 공개적인 자아비판의 수치를 감당해야 했고, 사람들은 나병환자 대하듯 그를 멀리했습니다. 자존심 강하고 어려서부터 존중받는 것을 좋아했던 쇼스타코비치가 받은 충격과 상처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이런 예술가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빼앗긴 고통과 슬픔이 그의 음악에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페테르부르크_혹독한 역사의 소용돌이 중심에 선 민중으로서의 슬픔
쇼스타코비치가 태어난 페테르부르크는 18세기 초, 표트로 1세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표트르=페테르=베드로) 발트해 연안에 세운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북유럽의 베니스’라 불릴 만큼 매우 아름답죠. 하지만 이 도시엔 또 하나의 별명이 있으니 ‘(사람들의) 뼈 위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수십만 명의 농노와 지역주민, 포로들이 이 거대한 토목공사에 동원되었고, 혹독한 환경과 노동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시체들은 대부분 도시의 기초가 되는 늪지대에 그대로 버려져 가라앉았습니다. 페테르부르크는 태생부터가 이렇게 고통과 죽음의 기초 위에 세워진 도시인 거죠. 
그 후 200년 동안 이 도시는 러시아 제국의 수도로서 외부와의 전쟁뿐 아니라, 지배자와 민중들 사이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러시아 제국은 무너졌지만, 여전히 공산당이라는 새로운 일당독재와 무자비한 지도자가 역사를 이어갔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대변하듯 이 도시의 이름은 1914년 페트로그라드로, 1924년 레닌그라드로, 10년 사이 2번이나 바뀌었습니다. 만일 독일군이 이곳을 함락했다면, 그들의 계획대로 ‘아돌프스부르크’가 되었을지도 모르죠. 웃기게도 독재자의 이름이 떠나질 않는 도시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민중들의 고통으로 가득한 도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쇼스타코비치는 바로 이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고 자라, 도시의 땅바닥에 주저앉아 신음하는 이웃들의 고통과 함께했습니다. 그는 병약하며 가난했고, 취미가 아니라 생계를 위해 피아노를 쳤고, 임금을 떼이기도 했습니다. 
1917년 혁명의 격동기에서 그는 기차역에서 본 레닌이 아니라, 코사크 병사의 검에 찔려 죽어가는 소년의 모습을 평생 마음속에 기억하고 살아갔습니다. 그는 11살의 나이로 <혁명의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장송곡>을 만들었고, 그 유명한 <교향곡 7번>으로 독일군에 의해 900일 동안 포위되어 고통과 절망 속에 있던 시민들에게 용기를 선물했습니다. 베니스의 화려한 기둥이 아니라, 마른 뼈들로 세워진 페테르부르크, 그리고 더 많은 뼈를 요구하며 다가오는 죽음의 발자국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혼혈혈통_뒤섞인 정체성 속에 고뇌하는 한 인간으로의 슬픔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의 2악장을 두고 쇼팽의 동일한 협주곡 2악장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비슷하기 때문인데, 사실 둘은 DNA상으로도 가깝습니다. 쇼스타코비치의 아버지 쪽 가계가 폴란드인이기 때문이죠. 그의 증조부 표트르는 폴란드인으로서 1830년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봉기에 가담했습니다. 하지만 무자비한 진압으로 봉기는 실패했고, 그와 그의 가족은 러시아의 황무지로 유배되었습니다. 그 뒤 가족 전체가 러시아로 귀화해서 살게 된 것이죠. 역사적으로 폴란드는 등 없는 새우였습니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의 고래들 틈새에 끼어 정신없이 까였죠. 쇼팽의 음악엔 개인적 낭만성만 아니라, 이러한 민족적 아픔이 들어있습니다.
1927년, 21살의 쇼스타코비치는 러시아 국가대표로 폴란드의 쇼팽콩쿠르에 나갔습니다. 그는 출국 심사를 받으며 폴란드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소련 당국은 그의 혈통을 근거로 출국 허락을 망설였기 때문이죠. 그는 러시아의 무자비한 탄압의 역사를 간직한 선조들의 땅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피해자와 가해자 중 자신을 어느 쪽에 두었을까요? 그가 자신을 러시아인으로 여겼다 할지라도, 여전히 정체성의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러시아인들은 끝없이 열등감 속에 ‘유럽 따라하기’에 열중했고, 동시에 아시아를 철저히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에게 이러한 다중적 정체성의 혼란은 오히려 그의 강점이 되었습니다. 나(민족)를 떠나 다른 사람(민족)의 고통에 동참하고 함께 아파하는 힘을 만든 것이죠. 그가 유대문화의 전형적인 특징인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유대민요에 관심을 가진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는 살벌한 반유대주의운동의 한가운데서 <유대민요 연가곡집>을 발표해 유대인들을 위로했고, 위험에 빠진 유대인 동료와 제자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무엇을 선물하려 했을까?
글머리에서 말했듯이 이 곡은 아들 막심의 19번째 생일선물로 만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은,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우리는 그의 <피아노협주곡 2번>의 선물 속에서 무엇을 발견해야 할까요? 음악적 기교와 단순한 음악적 즐거움이 아닐 것입니다. 시대와 역사의 아픔을 회피하지 않고 드러내어,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하고, 함께 울고, 대신 울어줄 수 있는 그 따뜻한 마음이 아닐까요? 그리고 더 나아가 쇼스타코비치가 하지 못했던,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삶과 문화의 실제를 앞서 보이고 만들어가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 전체제목은 이향아 시인의 시 ‘오래된 슬픔 하나’의 부분을 인용해서 만들었습니다.

 

어메이징 스페이스 대표 고종훈

dyl815@naver.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8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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