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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러험 링컨 Abraham Lincoln (1) (1809.2.12 ~ 1865.4.15)

2020년 8월호(130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10. 4.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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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들의 내면 들여다보기 1]

 

에이브러험 링컨
Abraham Lincoln (1)

(1809.2.12~1865.4.15)

1865414(금요일) 저녁 1013분경-기독교에서 예수의 죽음(금요일)과 부활(주일)을 기념하는 수난절,부활절로 알려진 첫날인 금요일- 그 존재가 바로 미국이며, 신생국으로 독립한 과거의 미국과, 세계를 평화롭게 선도하여 우주시대를 열어야 할 모든 것을 갖춘 미래의 미국을 여전히 연결하고 있는 인물이, 날짜의 일치라는 상징이 표현하듯 예수처럼 순교당한 날입니다. 흔히 그의 죽음을 종교적 용어인 순교로 표현하진 않지만, 저는 여기서 순교라고 말하려 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믿은 기독교를 포괄적 의미에서 본다면 그의 삶과 죽음은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할 자비와 정의를 구현하는 순교를 향한 행진이기 때문입니다.

 

좁은 의미의 기독교 vs. 넓은 의미의 기독교

좁은 의미의 종교’(특히 기독교)는 교파적,교리적 기독교에 불과합니다. 링컨이 활동하던 당시의 기독교는, 18세기와 19세기 초의 대각성운동이 지난 후여서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였습니다. 미국에서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영국의 영향을 받아 무디 운동 등과 같은 세계선교로 기독교가 방향을 틀었고, 그 결과 20세기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넓은 의미의 기독교 차원은 영국에 비해 정신적으로 미성숙했던 미국에서는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영국의 기독교는 좁은 의미의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와 역사에 실제로 기여하는 넓은 의미의 기독교로 넘어가기 시작하여, 존 웨슬리(J.Wesley 1703~1791)와 감리교의 대각성운동(1738년 시작)18세기 중엽부터 전개되었습니다. 첫째, 종교적 각성과 동시에 사회적 각성이 필요함을 깨달은 존 웨슬리는 먼저 영국 사회의 심각한 정신적 부패가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노예제와 상관되었다고 엄중하게 경고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둘째, 한 세대가 지나 노예선 선장이었으나 나중에 웨슬리의 영향으로 회심하고 목사가 되어 교회와 사회개혁에 앞장선, 존 뉴턴(J.Newton 1725~1807)이 그 바톤을 이어 설교로 노예제 폐지를 외쳤습니다. 셋째, 18세기 말, 존 뉴턴의 설교를 듣다가 크게 번민하여 목사가 되려고 그를 찾아간 윌리엄 윌버포스(W.Wilberforce 1759~1833), 그의 설득에 감동하여 목사가 되는 대신 정치가가 되어 영국 국회에서 한 사람의 희생(미국은 60만 희생!, 영국과 미국의 희생비율 : 060)도 없이 노예제 폐지(1833년 성취)에 전 인생을 걸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윌버포스는 좁은 의미의 기독교인 교회나 교단이 아니라, 영국의 사회개혁과 노예제 폐지라는 단일 목표에 몰입하기 위해 클랍함이라는 한 지역에 모여사는 정치공동체인, ‘클랍함 공동체’(Clapham Sect)를 통해 이 일을 이루어내었습니다. 즉 직접 노예제를 폐지한 것은 목사,교회,교단이 아니라, 한 정치가와 그를 중심으로 한 헌신된 공동체에 의해서였습니다. 이 공동체 성원들이 성인으로서의 활동기간인 30년을 그야말로 몰빵하였습니다. 그래서 영국 GDP1/3를 담당하던 노예제를 포기하도록 영국 국민과 국회를 설득한 것은 기적이거나 신적 섭리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오래전 5세기에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하나님 나라(교리,교단,교파적 기독교)와 세상 나라로 구분한 이원론을 그대로 답습한 로마교나 개신교는, 좁은 의미의 기독교를 이룰 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18~19세기의 영국은 좁은 의미의 기독교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기독교라야 사회에 썩어지는 밀알로 침투하여 그 치명적 결함을 척결할 수 있다는 점을, 3세대(웨슬리-뉴턴-윌버포스)100(1738~1833)에 걸친 장구한 역사로 증명하였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19세기에 링컨이 자신의 생을 던진다 하더라도, 60만명이라는 엄청난 희생이 치러져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21세기가 이미 시작된 20208월 현재까지도 흑인의 생명도 귀중하다’(Black Lives Matter!)운동이 촉발되어, 미국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 지경이 되었습니다. 한국 기독교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미국의 기독교를 근본주의적 종교라고 말하지만, 이는 부분을 지적한 것일 뿐입니다. 미국 기독교는 그 어떤 때보다 총체적 기독교가 아니라 극단적일 정도의 이원론적 기독교로 바뀌었기 때문에, 정치,경제에서 사회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현실적 문제에 뛰어들어 개혁할 힘을 상실한 겁니다. 교회,교파,교리 안에서는 교인들은 이미 천국에 도달했다고 착각하고 썩어질 세상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기에, 링컨 이후에라도 흑백문제가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겁니다. 이런 미국에서 노예제의 공적 폐지라는 엄청난 성과를 이루어낸, 미국 사람 링컨이 마음에 품었던 종교는 무엇이었을까라는 문제에 도달합니다.

 

링컨의 종교는 무엇이었을까?

링컨의 내면세계 중에서 그의 종교를 다루는 이유는, 종교란 링컨 개인의 경험,판단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초월적 존재와 관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어쩌면 링컨 자신도 어쩌지 못하게 그 분의 섭리에 의해서 세상에서의 생명이 시작되었고, 또 동시에 그 분의 때에 그 생명이 거두어진 것이라는 점이 그의 행적에서 발견하는 종교적 차원입니다. 본인이 어떤 종교관을 가졌던가와 관계없을 수 있고, 또 그가 이룬 통치가 어떤 궁극적 의미를 가졌는가를 그가 제대로 반성하지 못한 채로 죽었을 수도 있는 의미에서, 그를 초월한 종교적 차원입니다. 종교란 물론 그가 어떤 신을, 어떻게 믿고 행동했느냐에도 달렸습니다(주관적 차원). 하지만 외부에서 그를 객관적으로 관찰할 때 어떤 초월적 존재(그가 혼자서 믿는 하나님)에 의해서 그도 모르는 사이에, 용광로와 같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결국 소멸될 상황가운데 그를 쑤셔 넣어 그 일을 완성하도록 했느냐에 달려있기도 합니다(객관적 차원).우리들 중 누구도 종교적으로나, 인류사적으로나 그가 이룬 객관적 업적을 부인할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의원이나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에 기독교인이 아니며 성경을 부인한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물론 이런 비난을 받을 만했습니다. 그는 외적으로는 어떤 특정한 교회에 나가지 않은 가나안’(교회에 안나가!’) 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그의 부모는 독립침례교인이었고 규칙적으로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도 어렸을 적에는 부모를 따라 교회에 나갔지만, 성인이 되면서 점차로 나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교파의 전통을 따라서 링컨은 금욕적 삶(,담배 금지)을 습관화하였지요. 그렇지만, 19세기의 미국에서는 영적 대각성운동이 사회개혁으로 전환했던 영국의 구세군과 같은 건강한 사회운동이 등장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링컨의 할아버지도 인디언에 살해당하는 등 모든 미국인들이 생존에 급급했으며, 미국 전체로는 서부개척과 아메리카 인디언 문제, 멕시코와의 전쟁(1846~1848), 노예제도 등이 미해결된 채로 있었습니다. 링컨의 소년-청년시절의 미국교회들은 링컨이 살던 시골지역에까지 교리,교파적 논쟁으로 분리주의적 경향을 심하게 겪었기 때문에, 사회와 역사문제에 대한 넓은 의미의 기독교적 모습을 보이는 것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링컨의 매우 실제적인 종교관이 형성된 겁니다.

 

한 사례를 소개하겠습니다. 링컨의 강력한 라이벌이었으나 링컨의 넓은 아량으로 재무장관이 되었던 체이스는 성경읽기도 기도도 매우 규칙적으로 하는, 엄격한 퀘이커교도였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 속에는 1864년 선거에서 대통령이 되려는 정치적 야심을 누구나 다 알 정도로 유치하게 지니고 있었습니다. 링컨은 그가 재무를 잘 감당하기 때문에 재무장관에 두었지만, 그가 뻐기면서 5번이나 사표를 내며 본인의 존재감을 각인시켰으나, 링컨도 마지막에는 그의 사표를 수리하여 그는 당황했지요. 그렇지만 링컨은 그를 낙심시키지 않기 위해서 대법원장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정치욕,지배욕에 쩔은, 교리,교파,교회에 성실한 신자를 택하겠습니까? 아니면 가나안 신자였지만, 반석같은 확신으로 수많이 양보하며 많은 사람을 다독여 고통스러운 4년의 남북전쟁을 치러내고 결국 노예해방을 이루어낸 링컨의 길을 택하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링컨이 택한 가나안신자가 옳은 것이 아니다는 점을 성경과 예수 자신과 전통적 기독교는 확고하게 말합니다. 또 실제로 링컨의 삶에서 가장 치명적 약점이었던 우수,우울,비애를 생애 전반을 통해서 가진 것은 바로 그가 그 엄청난 짐을 공동체 없이 홀로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그의 이런 슬픔의 깊이를 이해할 수 없었고, 동참할 수도 없었습니다. 만약 링컨이 그 당시의 교리,교파 기독교와 그 목사들의 설교를 당시의 습관을 따라서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대신 성경의 하나님, 링컨처럼 순교당한 예수의 종교, 적어도 사도 바울이 가르쳤던 순교하는 기독교 자체에 집중했다면 이야기는 달랐을 겁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 자신이 지독하게 외로웠고, 사방에 우겨쌈을 당하였고, 엄청난 고난과 나중에는 순교를 당하였지만, 그 마음에는 결코 링컨과 같은 우수와 비애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신 끝까지 자신이 일구어간 제자들과 공동체를 섬기다가 최후로 순교라는 영광의 면류관을 감사함으로 기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독서의 사람인 링컨은 독서를 통해서 그 시대의 사상을 호흡하였습니다. 18세기에 유럽에 유행하였던 철학적으로는 계몽주의’, ‘이성주의’, 종교적으로는 이신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링컨은 성경의 기적 같은 것에 대해 불신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곧 그 한계를 알고 19세기 초부터 등장한낭만주의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또 동시대인인 시어도어 파커(Th.Parker 1810~1860)1) 나 랄프 왈도 에머슨(R.W.Emerson 1803~1882)자연주의’, ‘초월주의의 영향도 링컨의 종교와 사상 속에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종교적,철학적 경향들은 당시의 매우 좁은 의미의 기독교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이후 19~20세기 서양의 기독교는 더 좁아터져갔으며, 거기에 반발하는 세상은 더 파괴적이 되어갔습니다.

 

그렇지만 링컨은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정치현실을 종교적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부딪쳤습니다. 그는, 친엄마가 남겨주었고, 그 위에 손을 얹고 대통령선서를 하였던, 성경을 읽고 깊이 묵상했으며, 성경의 사례로 장관들을 설득했고, 무릎 꿇고 기도함으로 어려움을 뚫어가기도 했습니다. 위선을 모르던 링컨이 위선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했을 리는 만무합니다. 링컨은 첫 사랑이자 영원한 사랑인, 늙어서도 그녀를 생각한다고 고백했던 앤 터틀리지가 죽었을 때, 그 비애를 극복하지 못해 친구들은 그가 자살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그의 주머니칼을 훔쳐 다른 곳에 두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그가 사후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 현재의 삶만이 전부라는, 링컨의 종교에 대한 치우친 해석이 링컨 이해의 주를 이루긴 합니다. 그는 기존에 존재하는 개념의 신자는 아니었고, 또 자신의 종교관에 대해 세밀히 고백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실제를 잘 모릅니다. 그런데 그 내면 속의 성경의 종교에 대한 종교적 성숙과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다음의 태산과 같은 도전을 이겨내는 정신적, 인격적 능력들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

 

1) 마귀의 DNA를 가진 것 같이 끝까지 괴롭힌 아내를 견디어 낸 링컨의 힘은 어디서 왔을까요?

링컨의 아내 메리 토드의 부모는 사촌끼리의 근친혼으로 자녀를 낳았습니다. 근친혼을 할 때에 생기는 DNA의 이상 현상은 모든 문명에서 공통되게 증언합니다. 또 메리는, 링컨과 마찬가지로 어릴 때에 친엄마가 일찍 죽었는데, 새엄마는 의붓딸을 심하게 차별했습니다. 그래서 메리가 있는 곳은 으레 다락방아니면 지하실이었습니다. 또 자신의 집(home)은 고향집이 아니라 기숙학교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링컨과의 결혼도 사랑과 아무 상관 없이 아버지로부터 영향받은 정치적 성공을 이루어 자신 속의 부족한 것을 메우려는 허영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사랑은 사실상 링컨에게는 집착이라는 지옥이었을 뿐입니다. 첫째 결혼 예정일(1841.1.1)에 나타나지 않았던 링컨은, 자기 사무실에서 혼자 중얼거리며 넋이 나간 가운데 있는 것을 친구들이 발견했을 정도입니다. 마음이 약하였고 여자를 어떻게 다룰 줄을 몰랐던 링컨을 결혼이란 골을 향하여 세게 밀어부친 것은 메리였습니다. 메리가 링컨이 도의상으로라도 자신과 결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을 자주 했다는 여러 사람들의 증언이 있을 정도입니다. 여자와 강제로 성행위한 후에 갈 곳이 없다고 판단한 여자와 억지로 결혼하는 악한 남자들이 있습니다. 정반대로 남자와 성관계를 가진 후에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는 악한 여성의 육체적 혹은 정신적 술수에 링컨이 걸려들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링컨이 다시 프로포즈한 바로 그 날(1842.11.4) 당장 결혼하자는 메리의 성급함에 링컨은 깜짝 놀랐습니다. 링컨은 메리가 미신을 믿는다는 점에 꾀를 내어 그 날이 금요일이 아니냐고 지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지금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는 심정으로 당장 보석가게에 가서 사랑은 영원하리라는 문구(아마 메리가 만들었을!)를 새긴 반지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렇기에 링컨은 이 결혼을 매우 두려워했으며, 결혼 전에는 아무래도 나는 지옥에 가는 것 같애라는 섬뜩한 말을, 결혼 후에는 여기는 새로운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불가사의할 따름인 제 결혼을 제외하고서 말입니다는 정말 불가사의한 말을 남겼습니다. 실제 링컨은 순회재판소에 다닐 때에 일이 끝나면, 집에 가기 싫다는 말을 했습니다. 링컨의 생애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그의 암살이 아니라 그의 결혼이었다고 링컨을 깊이 연구한 데일 카네기는 평가합니다.2)

 

이런 평가와는 정반대로, 링컨부부가 행복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랑의 고백들은 단지 형식적 편지의 일부이거나, 자녀들이 관련되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결혼 이후는 훨씬 더 심각한 증상들이 메리에게 많이 나타났던 것에 대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남긴 증언은 차고 넘칩니다. 의부증이 너무 심해 백악관 파티에 오는 그 어떤 여자도 접근하지 못하게 해서, 링컨이 대화해야 할 여자를 메리에게 지명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하녀들은 하나같이 일주일을 견디지 못하고 겨났으며, ‘한나라는 한 사람만은 기적적으로 2년을 버텼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은 링컨의 술수 때문에 만들어진 것일 뿐이었습니다. 링컨은 그녀를 따로 불러서 아내의 그런 모습을 미리 말해주었으며, 견딘다면 수당을 더 주겠다고 비밀교섭을 한 것이었습니다. 남북전쟁이 종료되자 한나가 나타나서 남군에서 싸웠던 남편의 선처를 부탁하러 왔을 때, 링컨은 너무 고마워 집에 초대했지만, 메리는 싸늘하게 거절했습니다. 링컨은 몰래 백악관 출입증을 만들어 다음에 찾아올 수 있도록 했지만, 불발에 그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습니다. 링컨이 저격을 당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또 메리의 극성으로 자기 짐도 가지지 못한 채로 갑자기 쫓겨난 친척을 위해 동네의 유명한 사람이 와서 따지다가 메리에게 얻어맞을 상황까지 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가 다시 링컨에게 와서 하소연하자, 링컨은 오히려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여 그 사람이 오히려 미안해 하며 취소했을 정도입니다. “정말 유감스럽군요. 솔직하게 부탁드릴께요. 저는 지난 15년동안 매일 겪었던 일이니, 선생께서 조금만 참아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매일 이런 여자와 마주하며 23년간 결혼생활을 유지한 극단적 어려움 속에, 대통령직을 시작하자마자 터진 남북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긴장의 연속을 견디어낸 능력은 종교적 에너지 외에 어디에서 올 수 있었겠습니까?

 

2) 극단적 슬픔의 사람링컨이 가진 엄청난 감정이입풍성한 유머감각의 능력은 어디서 왔을까요?

미국인들은 주로 영국 출신이었긴 하지만, 신대륙에 정착하면서 영국인들처럼 우울하지 않고 매우 개방적이고 활달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극단적 슬픔의 사람 링컨의 모습은 그 당시 미국인에게도 매우 이질적으로 여겨졌고, 당시 사람들은 아무도 그런 링컨의 슬픔의 깊이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겁니다. 당대인이며 친하게 지냈던 헨리 휘트니는 우울증은 그의 본성이었고 그가 머리를 잘라낼 수 없는 것처럼 우울증을 털어낼 수 없었다”, 또 윌리엄 헌돈은 링컨이 걸어갈 때면 그의 몸에서 우수가 뚝뚝 떨어졌다고 증언하는데, 직접 링컨을 겪은 모든 사람들은 동일하게 말합니다. 어릴 적뿐 아니라 죽기까지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시간이 갈수록 더 심화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그가 사랑하고 사랑받은 세 여인의 이른 죽음과, 죽을 때까지 같이 그 옆에 착 붙어있었던 마귀같은 한 여자와의 삶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의 사랑의 대상이었던 세 여인은, 그가 9살 때 당시 우유병으로 죽은 생모 낸시 행크스’, 그를 엄마처럼 돌보았으나 결혼 이후 장티푸스로 죽은 3살 위의 누이 사라’, 그리고 첫사랑이자 영원한 사랑이었던 앤 러틀리지였습니다. 아버지인 토마스 링컨은 급한 생계를 위해 농사에 꼭 손이 필요했기 때문에 독서에만 몰입하는 링컨을 때리는 등 독서광,공부광인 링컨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링컨과 아버지와의 관계는 영구히 단절되었습니다. 다만 링컨을 깊이 이해하고 정확하게 링컨의 재능을 관찰하고 격려해 주었던, 새엄마 사라를 마음으로 엄마라 부르는 행복을 누린 것은, 악마같은 아내가 차별당했던 새엄마를 경험한 것과는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이 엄마조차 링컨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그 직을 위해 떠날 때에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으리라고 비상할 정도로 예상했는데, 실제로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링컨의 슬픔은 자신의 개인적 슬픔을 훨씬 넘어서, 보편적 인생 개개인, 그리고 국가(특히 미국),역사,문화 전체가 지닌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종교적일 정도의 고통과 우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통 개인이 슬프면 대개는 1) 한국인의 일반적인 정서처럼을 품거나, 2) 혼자만의 생각과 감정의 굴로 자폐증에 빠지거나, 3) ‘자기연민’(self-pity)에 들어가서 주위 사람을 괴롭히는 성격(링컨의 아내처럼)이 되거나, 4) 그 애통을 지속적으로 견딜 수 없어서 자살로 생애를 마감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습니다. 하지만 링컨에게서는 전혀 이런 모습을 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매우 역설적으로 링컨의 전혀 다른 장점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링컨이 가진 엄청난 감정이입능력입니다. 소년시절 작은 짐승 한 마리를 사냥한 후에 너무 비참해서 다시는 사냥을 하지 않겠다고 작정한 것이나, 물에 빠진 돼지가 생각이 나서 반마일이나 다시 돌아가서 그 짐승을 구해준 젊은 시절의 일은 매우 작은 것입니다. 대통령이 된 후에 남북전쟁을 치르면서 탈영병과 같은 죄에 대한 사면을 너무 남발하여 그 점에서는 미국 대통령 중에서 최고의 기록을 가지고 있을 정도입니다. 사형시키는 것보다 나가서 싸우게 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핑계를 대었지만, 사실 사형당할 개인에게는 본인의 죽음은 우주의 죽음이 된다는 확신이 링컨에게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링컨의 마음은 자기에게 악을 행한 사람에 대한 질투나 원한이 자리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링컨이 자기에게 해를 가하거나 이용해먹거나 하는 사람을 향해서 앙심을 품거나 보복을 할 생각을 했거나 실행했다는 보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개인적 원한,굴욕,고통을 초월할 줄 알았던, 그의 비범한 능력은 타인을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일단 이해해주는 엄청난 감정이입능력이 없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가 몽상가로 보이거나 관조적 성격을 가졌다고 주위에서 보고하는데, 그가 무엇인가에 집중하면 주위의 어떤 상황도 잘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슬픔이나 개인적 경험을 감정이입능력으로 승화시키는 능력과 관계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내리누르는 슬픔을 해결하는 탁월한 방식을 그는 개발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에 몰입하는 것입니다. 그는 소설을 읽는 대신 시를 낭독하며 또 자신의 시를 잘 썼습니다. 좋은 시를 잘 외우고 기록에 남겼다가 공적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특히 세익스피어의 작품맥베스는 거의 완전히 외웠습니다. 그 작품에 나오는 수많은 슬픔의 시들을 늘 암송하면서,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읊어주곤 했을 정도입니다. 또 하나의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개발한 탁월한 능력은 바로 풍성한 유머를 할 줄 아는 것이었습니다(다음 호에 다루겠습니다)

 


1)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사용한 두 구절은 모두 이 사람에게서 영향받은 것을 차용하여 창조적으로 변용하였습니다. 파커는 ‘모든 사람에 의한,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사람의 정부’라고 표현한 것을, 링컨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로 바꾸었습니다. 또 파커가 말한 ‘자유와 평등의 불멸성’을 ‘미합중국의 불멸성’으로 대체하였습니다.

 

2) “존 윌크스 부스가 링컨에게 총을 쏘았을 때는 링컨은 무엇이 그를 타격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23년간 그는 거의 매일, 헌돈이 묘사한 것처럼 ‘결혼의 불행에 대한 쓰라린 대가’를 받아들이며 살았다. 바도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당파적 증오와 반란의 소동 한가운데서, 고통의 한가운데서 ... 마치 십자가에 못박힌 고통처럼 ... 가정의 불행에 대해 우슬초가 링컨의 입을 내리눌렀다.”(데일 카네기,《기도》, 327)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010-6844-0609/segensong@gmail.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30>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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