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낯선 언어 속에서 6개월 살아남기 폴란드 교환 학생기

2020년 8월호(130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11. 1. 17:52

본문

낯선 언어 속에서 
6개월 살아남기
폴란드 교환 학생기

 

 

 모르는 게 약! 무조건 도전
 코로나가 전 세계를 잠식해 버린 지, 수개월이 지났습니다. 마스크 없이 돌아다닐 수 있던 지난 9월, 저는 한 학기 교환학생으로 폴란드 바르샤바로 떠났습니다. 바르샤바는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고발한 영화 ‘피아니스트’의 배경으로 잘 알려진 곳입니다. 제가 폴란드로 간다고 했을 때 주변 친구들 절반이 ‘어디? 핀란드?’냐고 되물었습니다. 랜선으로나마 폴란드 여행을 마친 저에게도 여전히 생경한 곳이었으니까요. 
 친구들에게 정보를 얻을 수도 없고 인터넷 검색으로도 알 수 있는 내용은 한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처럼 오히려 걱정은 없었습니다. 물론 조금 답답하기는 했지만, 그만큼 제가 스스로 찾아내 전해 줄 내용이 많다는 뜻이었으니까요. 결정적으로 도전을 좋아하는 저였기에, 아주 낯선 환경에 저를 던져 넣고 싶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 속에서 살아남아 보는 것. 그걸 넘어서면 나중에 어떤 환경에서도 잘 적응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는 나라, 독일과 개운치 못한 과거가 있는 나라, 쇼팽의 나라… 한 나라를 설명하기에는 충분치 않은 키워드들을 머리에 애써 입력하고, 그렇게 바르샤바 쇼팽 공항으로 양손 가득 캐리어를 쥐고 떠났습니다.

 폴란드는 유럽의 중심?
 떠나기 전, 저의 바람처럼 폴란드는 여태껏 가본 그 어떤 곳보다 낯설었습니다.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바르샤바는 중심가의 쇼핑센터 인근 높은 빌딩들을 제외하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추운 날씨 탓인지 사람들은 늘 모자를 푹 눌러 써 눈썹까지 가리고 외투에 파묻혀 양팔로 몸을 감싸고 바삐 걸었습니다. 저에게 폴란드는 첫 유럽이었으나 그간 상상해온 ‘유럽 감성’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동유럽 감성’이 뭔지 알 것만 같았습니다.(여담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출판되는 여행 서적에는 폴란드가 동유럽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폴란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폴란드는 중앙유럽이라며 선을 긋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한 나라의 수도이니 외국인들이 제법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학교를 오가는 트램을 타고 다닐 때도 동양인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트램과 지하철에서 아이들이나 어르신들의 호기심 가득 찬 시선을 받기 십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의기소침했지만, 나중에는 저도 같이 쳐다봤습니다.

 

제노바에서 공수해 온 페스토 소스를 곁들인 파스타를 손수 분배하는 이탈리아 친구


 음식을 만들며 가까워지다
 교환학생 생활의 특성상 여유로운 시간 속에 가장 열심히 했던 일은 장보기와 요리였습니다. 다만 큰 마트에서도 영어 표기가 되어 있지 않아 구글의 이미지 번역기 덕을 톡톡히 봐야 했습니다. 물가, 특히 식자재 물가가 한국의 2/3 정도라 신선한 과일과 맛있는 요거트를 매일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터치 한 번이면 웬만한 물건들은 문 앞까지 다 배달되지만, 그곳에서는 무거운 물이라도 사려면 같이 사는 플랫메이트들과 백팩을 하나씩 짊어지고 장을 보러 가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느림의 미학이라고 할까요?

 

친구 집에서 김밥과 폴란드 전통음식 피에로기(pierogi)를 만든 날

 
 익숙해지다 보니 나름의 재미도 있고, 돌아서면 다가올 끼니를 고민하는 가사노동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한국인 3명, 이탈리아인 1명, 인도인 1명, 캐나다인 1명, 스페인인 1명이 함께 사는 플랫(여러 방이 있는 집에서 한 방을 빌리는 것)은 저녁 시간이 되면 이국적인 향으로 가득 찼습니다. 날이 성하지 않은 칼로 투박하게 덩어리 고기를 썰고, 냄비로 지은 쌀밥을 후라이팬에 김치와 볶아 친구들과 나눠 먹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엄마가 챙겨 주신 페스토 소스를 한 솥 가득 끓인 푸실리 파스타에 부어, 한 접시씩 덜어주던 이탈리아 ‘언니’와는 한국에 와서도 매일 카톡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혼자 자취를 하다 보니 때가 되면 끼니를 때운다는 느낌으로 밥을 먹을 때가 많았는데, 등교 전 친구들과 저녁 메뉴를 정하고 수업이 끝나면 같이 장을 보고 저녁을 해 먹던 일상은 돌이켜 생각해도 참 따뜻한 기억입니다. 

 ‘영어 울렁증’ 폴란드가 더 심해요
 ‘폴란드어가 따로 있어도 유럽 사람들은 영어를 웬만큼 하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우체국 업무를 볼 때나 은행 업무를 볼 때도 종종 저에게 차가운 얼굴로 “Proszę Polskie(폴란드어로 말해주세요)”를 외쳐 난처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헐리웃 영화를 보러 갔을 때도 예매 직후에 폴란드어 더빙이라는 걸 알고 급하게 예매를 취소한 적도 있었습니다. 한국어 더빙보다는 한국어 자막을 선호하는 우리나라와는 대조적이었습니다. 나중에 폴란드 친구가 말해주기를 많은 폴란드인들이 ‘영어 울렁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 공산주의 국가였던 폴란드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고립되어 있어 영어 교육의 필요성이 크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교류가 러시아 중심이라 학교에서는 러시아어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어를 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그리 길지 않은 것이죠. 가장 친한 폴란드인 친구의 조카도 아직 7살이지만 미국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과 주 3회 과외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두 달 겪었을 뿐이었지만, 초기에는 폴란드 사람들이 외국인을 경계하는 차가운 사람들이라는 편견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영어로 말을 걸어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오해를 한 것 같아 미안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도 나름의 노력으로 간단한 폴란드어 회화를 공부해 주문할 때나 질문을 할 때 최대한 폴란드어를 써보았습니다. 가게에서 외국인이 잘 안 되는 폴란드어로 낑낑대니 오히려 한층 온화한 미소로 답해주었지요. 폴란드어는 가장 배우기 어려운 언어들 순위에 들 정도로 한국인이 배우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언어입니다. 폴란드어는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와 유사해서 이 지역에서 실제로 폴란드로 유학을 오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친하게 지내던 우크라이나 친구는 고등학교 졸업 후 폴란드로 유학을 왔는데, 따로 폴란드어를 배우지 않고 학교 수업을 바로 따라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 언어로 여러 나라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부러운 마음이 들더군요.   
  
 불투명한 미래 속에 살아가는 폴란드의 젊은이들
 국적만 다를뿐 소울메이트 같은 폴란드인 친구를 사귀어 최대한 많은 시간 대화를 하며 생생한 폴란드 문화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폴란드에서 나고 자란 또래 친구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도 잘 알게 되었습니다. 폴란드의 많은 젊은이들은 폴란드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방학이 되면 다른 유럽국가로 가서 일을 하고, 돈도 벌고, 영어를 배운다고 합니다. 아직까지 폐쇄적인 편인 자국 안에서는 다양한 경험을 쌓고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 친구도 방학 때 영국에서 일을 하고 돈을 벌어 폴란드로 돌아와 학비를 내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아무 걱정 없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것만 같았는데, 요즘 우리나라 또래 젊은이들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산다는 사실이 신기했습니다. 

 부딪혀 얻는 성취감의 기쁨
 6개월의 시간은 어찌 보면 여행처럼 살아보는 경험이었습니다. 관광객처럼 한정적인 시간 안에서 폴란드의 볼거리는 둘러보면서도, 현지의 재료로 밥을 지어 먹고, 현지인들 틈바구니에서 부대끼며 일상을 보내야 했습니다. 서러운 일도 많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그 어떤 곳보다 낯선 곳에서 홀로 해결하며 경험치를 쌓아가고 독립심을 기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바르샤바에서 가을, 겨울만을 보낸 저에게는 화창한 날보다 안개가 잔뜩 낀 ‘문화과학궁전’이, 따뜻한 날의 피크닉보다는 추위에 오들오들 떨다 들어간 카페에서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던 일이 더 익숙합니다. 봄, 여름을 보내지 못한 게 아쉽기도 하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것은 일상의 원동력이 되겠지요. 한국에서는 때로 큰 성취만을 좇느라 작은 성취엔 만족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는 작은 일이라도 부딪혀서 해냈을 때의 성취감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파티나 행사에서의 일회성 우정 쌓기에 지친 저는 매주 금요일마다 만나는 K-Food Night 모임을 꾸려서 바르샤바의 한식당들을 다니고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꾸준히 만남을 지속했습니다. 향수병도 치료하고 추억도 쌓고 어찌 보면 유럽 각지의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한 셈입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또 한 번 느끼는 것은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폴란드 친구들이 폴란드엔 미래가 없다고 걱정했지만 더 큰 세계를 갈망하는 폴란드 친구들을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전보다는 외국인들의 유입이 훨씬 많아졌고, 그 만큼 다양한 생각들이 모이니 그곳 사람들의 견문도 점점 넓어질 것입니다. 애증의 도시 바르샤바였지만, 한국에 돌아와서도 뉴스에서 들려오는 폴란드 소식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폴란드의 코로나 환자 현황을 체크하는 걸 보면 저의 제2의 고향이 되어버렸나 봅니다.

 

성신여대 법학과 김수경

dys03061@naver.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30호>에 실려 있습니다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는 

  • '지역적 동네'뿐 아니라 '영역적 동네'로 확장하여 각각의 영역 속에 모여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스토리와 그 속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문명, 문화현상들을 동정적이고 창조적 비평과 함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국내 유일한 동네신문입니다.
  • 일체의 광고를 싣지 않으며, 이 신문을 읽는 분들의 구좌제와 후원을 통해 발행되는 여러분의 동네신문입니다.

정기구독을 신청하시면  매월 댁으로 발송해드립니다.
    연락처 : 편집장 김미경 010-8781-6874
    1 구좌 : 2만원(1년동안 신문을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예금주 : 김미경(동네신문)
    계   좌 : 국민은행 639001-01-509699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