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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장과 상흔 사이

2020년 8월호(130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11. 1.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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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trospective & prospective 29]

훈장과 상흔 사이

 여름의 기세가 한풀 꺾이고 찬바람이 불어오는  9월 초쯤이면 우리 발등엔 지난 여름 뜨거운 햇살이 남기고 간 샌들자국이 선명히 남을 것이고, 팔에는 반팔 길이만큼 소매자국이 드리워 질 것입니다. 어린 시절 넘어져 눈썹 부분을 다쳐 꿰맨 적 있는 내 동생의 왼쪽 눈썹은 잘 살펴보면 털이 자라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건 다 육체적인 흔적이지요. 정신적인 흔적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받지 못한 사랑은 트라우마가 되어 애정 결핍이라는 자국을 남길 수 있고, 학창시절 선생님의 작은 칭찬 하나가 뛰어난 예술가를 만들기도 합니다.


 모든 경험이 동반된 시간은 자국을 남깁니다. 그것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국이든 정신적으로 남은 상흔이든 모두 흔적을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여름 한 철 2~3개월 햇빛도 우리 몸에 자국을 남기는데 한 평생 몸 바쳐 일한 직장이 만들어 놓은 흔적은 강력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평생 나전칠기 작업을 해온 장인의 손톱 밑은 새까만 물이 빠질 날이 없고, 오랜 세월 운동으로 단련된 볼링선수의 오른쪽 엄지손가락은 굳은살로 모양마저 변형됩니다.


 우리에게 일이란 이런 것입니다. 그저 단순히 밥벌이의 수단이라 생각되기도 하고, 꿈을 이루기 위한 중간 기착지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어찌어찌하여 평생을 바친 내 직장은 나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흔적을 남깁니다. 우리에게 그 흔적이 훈장이 될지 상흔이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모든 의무를 마친 후 평가받을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잘못이 덮어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미리 예단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시류에 편승하지 말고 묵묵히 자신이 잘하는 일을 하다보면 그것에 상응하는 평가는 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최근 우리는 서울 시민이라면 모두 다 아는, 다수의 지지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한 정치인의 죽음을 목도하였습니다. 선량하게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국민들은 그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죽어야만 했는지 여러 평가들 중 어느 것이 진실인지 혼란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표면에 드러난 여러 정황들은 피해자를 2차 가해로 몰아가기도 하고, 생전에 쌓아놓은 고인의 업적을 내놓고 폄훼하기 위한 가짜 뉴스도 횡행합니다. 고인이 된 그의 일, 업적, 성과는 그에게 어떤 정신적, 육체적 흔적을 남겨줄까요? 일의 의미가 퇴색한 요즘, 실업난으로 지쳐있고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한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 못하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이 일이 내 일생을 걸만한 일인가? 이런 고민으로 진로를 못 정하고 있거나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회의를 느끼는 젊은이들을 많이 만납니다.
 어떤 일이든 더 가치 있거나 의미 있는 일이라고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그 가치와 의미는 일을 하는 사람의 정성과 투여된 시간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때, 몇 단계 점프 업을 하여 시간을 앞당기려는 시도를 하기 보다는 눈앞에 있는, 꼭 해내야만 하는 그 일을 잘 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해야 할 일을 잘 해낸 이후엔 그 다음 목표로 가기 위한 튼튼한 계단이 눈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 길을 묵묵히 가다보면 그 일로 인해 나의 정신엔 일에 대한 보람과 긍지로 훈장 같은 자부심이 새겨질 것이며, 나의 육체엔 일에 쏟은 시간만큼의 영광스런 흔적이 무엇으로든 남을 것입니다. 코로나와 사회적 거리두기로 점철된 올여름 내리쬐는 태양을 보면서 이 여름은 나에게 어떤 흔적으로 남을까 잠시 생각해 봅니다. 

 

예술의 전당 공연예술본부장 손미정

mirha2000@naver.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30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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