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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오직 한 번의 삶, 순례의 인생

2020년 9월호(131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11. 2.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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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문법, 요트이야기 9]

에필로그 : 
오직 한 번의 삶, 
순례의 인생

 

 

6일간의 쉼 없는 45피트 요트 위의 배 생활, 장장 2주간의 여정의 마무리를 향해 나아간다. 루손섬을 배경으로 붉은 동이 트고 아름다운 아침노을이 펼쳐진다. 이 섬을 왼쪽으로 돌면 멀리 수빅 마리나가 있을 것이다. 밤새 조타를 함께 지키던 김 선장이 “하~ 이제 도착했구나, 감사합니다. 주님”하고 갑자기 눈물을 쏟는다. 6일간의 바다 생활이 마무리에 들어가는 시간. 뷰파인더로 그 모습을 우연히 잡아내며 마지막 밤을 같이 지새운 나도, 갑자기 울컥하며 코끝이 찡해진다. 주림과 주림의 시간. 바람과 파도, 햇빛과 별빛, 주림과 절제에 절여진 몸은, 수행을 하듯 기실 바다에서도 이런저런 생각들로 나를 들썩거리게 하며 자주 눈물을 자아냈다.

마리나를 들어가는 길목에 옛 한진중공업이 세웠다는 그 유명한 수빅 조선소가 보였다. 만 안에 운송선, 여객선, 방카 등 많은 배들이 보인다. 예인선 서너 대가 지나가고 난 자리에 반가운 하얀 요트 한 척이 풀 세일을 펴고 떠 있다. 수빅 마리나에 도착한 날이 일요일이라 관공서 및 마리나 매니저에게 우리 요트가 다가가고 있노라 연락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리나 사무실에서 세관, 이미그레이션, 검역의 기본 CIQ 수속을 밟는다. 수속 과정에 공공연히 150달러 정도의 돈을 요구하는 공무원들을 보며, 또 콜라 한 캔에 2,000원을 넘게 받는 마리나 물가를 보며 신혼 때 필리핀살이를 오래 해서 현지 상황을 잘 아는 나로서는 인상이 많이 찌푸려졌지만, 도착의 기쁨은 그 모든 것들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수속을 밟고 배에 돌아가 깨끗이 배를 청소했다. 군대 미씽 수준으로 치약을 짜서 화장실 등 실내 곳곳을 물청소하고 빡빡 닦아낸다. 그리고 비행기 시간에 밀려 선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필리핀의 유명한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인 ‘게리스 그릴’에 가서 필리핀 현지 최애 음식 조합인 망고 쉐이크와 시니강 바보이, 바베큐를 맛있게 시켜 먹었다. 일정에 밀려, 또 늦어진 항해에 마무리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즐기지 못했지만, 강렬했던 항해의 흔적들은 오랜 시간을 두고 삶 속의 여러 영감들로 남아 나를 움직일 것이라는, 그리고 그 영감들을 나의 삶 속에 잘 녹여내 다음 항해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 바로 이틀 후 가족들을 데리고 예정되었던 ‘코타키나발루’행 비행기를 탔다. 오래 아빠를 기다렸던 딸과 남편 없는 집을 지킨 아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코타키나발루에 가서도 현지 마리나를 방문해 아프리카, 유럽대륙, 아시아 등 전 세계에서 그곳으로 놀러온 요티들과 배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이한 점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50대 이상의 중년, 노년층이라는 점. 한국의 상황도 비슷하다. 세일링 항해는 전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기실 백인들 위주의 문화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년에, 모든 의무를 내려놓은 상황 속에서 세일링을 시작한다. 모든 루트가 짜여져 있는 듯 학창 시절과 20대의 방황, 30에서 50대까지의 육아, 양육, 생존 등의 짐을 짊어진 한국인들에게 이런 장기간의 여행은 결코 쉽지 않은 경험이다.  
하지만 이번 대양 항해를 통해 느낀 것은 자의이건 타의였건 이 지구에 태어난 운명이라면, 한 번쯤은 순례하듯 이 대양의 밤을 보아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사십 평생 살아오며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 또 빛났던 경험들 중의 하나였고 말 그대로 ‘혼자 보기 아까운 시간’들이었다. 이 글로 그 장면들을 담는 것은 10%도 채 되지 못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아름다움들은 말로 다 표현될 수 없이 강렬해 다만 그 장면 앞에서 눈물이 난다. 그런 탐험해 보지 않은 세계들이 이 세상에 널려 있고, 그것들에 접근하기에 세일링은 가장 좋은 수단들 중의 하나다. 그래서 권하고, 쓰고, 말하고, 오늘도 바람을 타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바람을 타고 이 지구를 여행할 것이다. 삶을 통째로 들쑤셔놓은 이 경험 이후로, 그 아름다움을 본 뒤로, 삶의 모든 과녁은 그 여행을 향해 맞춰져 있다. 

 

임대균 (세일링서울요트클럽, 모아나호 선장)

keaton70@naver.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31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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