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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실 야전사령관, 다시 초심으로 시작하다

2020년 10월호(132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12. 6.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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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실 야전사령관, 
다시 초심으로 시작하다

 

1984년 3월 마취과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한 후로 2019년 12월 말까지, 36년 동안 수술실에서 고군분투하며 지냈습니다. 위험부담이 커서 아무도 수술하려 하지 않던 90대 할머니의 수술도 성공적으로 하고요. 한밤중에 수혈을 아무리 많이 해도 혈압이 잡히지 않는 응급상황의 SOS 연락을 받고 달려가 혈장 부족의 원인을 찾아 정상으로 만들어준 적도 있습니다. 저는 주로 생명이 태어나는 현장인 산부인과 수술실에서 심장이 멎은 산모를 살리는 등, 산과 마취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응급상황을 다 처치할 수 있을 정도의 경력을 쌓아왔습니다. 후배들은 이런 저를 ‘야전사령관’이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그러던 제가 올해 4월, 72세의 나이로 전라남도 구례에 있는 노인요양병원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거의 30년을 젊은 산모와 신생아들을 만나다가 지금은 주로 70대 이상의 환자들을 보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수술이 필요한 환자를 위해 수술 준비부터 수술 후 회복까지를 집중적으로 책임져왔다면 이제는 평생 병을 앓는 환자들을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치료해야 하는, 완전히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셈이지요. 


구례 요양병원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면서 저를 가장 당황하고 힘들게 하는 건 다름 아닌 컴퓨터입니다. 이전 병원에서는 “이거 컴퓨터에 저장해줘요~”하고 직원들의 도움을 받거나, 집에서는 “인터넷에서 이것 좀 찾아봐라. 이건 어떻게 하는 거냐?”하면 자식들이 다 해주었는데, 지금은 제가 직접 하려니 죽을 맛입니다. 독수리타법으로 띄엄띄엄 한 시간 내내 입력하고 분명히 저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저장이 안 되었는지 데이터가 하나도 없고, 기껏 입력했는데 나중에 보니 날짜를 잘못 입력해 다 지워져 다시 입력하고… 이렇게 몇 번씩 다시 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그래도 여긴 시골이라 저 같은 의사들이 많이 와서 의례 간호사들이 그러려니 하고 “원장님 이렇게 하시면 돼요.”하며 알려주고, 빠트렸으면 체크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서울깍쟁이들은 “원장님이 이거 안하셔서 다른 것도 제대로 못했잖아요. 하셔야해요.”라고 국물도 없다고 하네요. 지금도 친구들이나 후배들이 왜 구례까지 내려갔느냐고 물으면 컴퓨터를 못해서 갔다고 이야기한답니다.(웃음)


산부인과는 항상 분초를 다투는 시간 싸움을 해서 사람을 살려야 하는 곳이었다면, 요양병원은 환자를 살리는 것보다는 편하게 해주는 것이 주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로 치매, 당뇨, 고혈압 등을 오랫동안 앓은 환자들이 많아 최대한 편안하게 남은 여생을 살 수 있도록 해드리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한번은 80대 후반의 어르신이 치매도 있고 건강 상태도 많이 좋지 않아 음식물을 삼키지 못했습니다. 호스를 꽂아 음식을 집어넣는 경관급식이라도 해야 몸이 버틸 수 있는 상태였지요. 그래서 보호자들에게 호스로 음식을 넣지 않고 그냥 드셨다가 자칫 기도로 음식물이 들어가면 기도가 막혀서 돌아가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며 호스로 음식 넣기를 권했습니다. 그런데 이 어르신이 대구의 다른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호스를 넣고 경관급식을 했는데 너무 괴로워 불편해하셨다면서 한 이틀만 기다려주면 보호자가 직접 방문해서 어머님을 뵙고 결정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때까지 뭐라도 드셔야 하니 그날 저녁 조심스레 음식을 드시다가 켁켁 거리며 음식을 토하고, 갑자기 의식도 없어지면서 상태가 안 좋아졌습니다. 아무래도 돌아가실 것 같다고 연락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경관급식을 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했음에도 보호자가 선택을 한 것이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렇듯 환자가 힘들고 괴로울 것을 알지만 생명 연장을 위해 의사인 저의 선택은 생명을 살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여 모든 처치를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보호자나 본인들이 하지 않겠다고 할 경우에는 잘못될 확률이 높음을 말씀드리고 설득하지만 최종 선택은 제가 할 수 없는 것이니 간혹 안타까운 일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곳 전남 구례에 있으면서 경기도 군포에 사는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고 있으니 무엇보다 제 건강은 스스로 유지하려고 합니다. 섬진강변을 매일 1시간 반씩 걸으며 운동하고, 8층 병원은 항상 계단으로 걸어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병원 내에 운동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입원해 있는 혈액 투석 환자들 중 저보다 젊은 환자들은 내가 운동하는 걸 보면서 같이 열심히 돌아다닙니다. 대부분 당뇨환자들인데, 본인에게 필요한 운동을 열심히 하니 좋은 현상이지요. 그리고 이곳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 이외의 다른 두 의사 선생님이 저보다 12~13세 더 많은 84, 85세 선생님들이라 제가 가장 젊고 활동적인 의사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어디 가서 72세에 젊다는 대접받고 일하기가 흔치 않은데 말입니다.(웃음)


인생의 선택에 우여곡절도 많았고 어찌어찌하다 마취과 의사를 하게 되었지만 70세가 넘어서 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아파서 일을 할 수 없게 되기 전까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참 복 받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미소요양병원 의사 이호성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32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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