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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임동확) - 같이 음미해 볼까요? 

2021년 3월호(137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1. 4. 3. 22:04

본문

북    

- 임동확(1959~)

 

  원하기만 한다면, 난 미래의 시간을 낚는 어부, 영광된 과거를 놓아주지 않는 거만한 황제, 늘 재고로 쌓이곤 하는 현재를 서둘러 처분하려는 상인. 혹은 때와 장소에 따라 난시청지대의 TV 안테나를 타고 기어오르는 나팔꽃이거나 적대적인 세계의 장력張力 속을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가로질러가는 도둑고양이. 내리칠수록 더욱 힘을 내는 팽이처럼 난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생의 소용돌이를 반긴다. 단 한 번의 상처도 받지 않는 것처럼 돌연 푸른 강물로 흘러가거나 때로 그 어떤 슬픔도, 부정도 없는 절정의 난타를 즐긴다.
  난 빠르고 세차게 두들기면 두들길수록 미처 예기치 못한 불꽃의 리듬, 말할 수 없는 말의 맥박들로 불끈 일어선다. 아예 처음부터 고통이나 아픔 따위와 무관하다는 듯 매 순간 극단에서 극단의 율동으로 치달으며 길가의 미루나무처럼 뻔뻔하게 굴어댄다. 도대체 염치라곤 모르는 철부지들의 열애처럼 낯선 이들의 눈치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연신 소리의 혓바닥을 내밀기에 급급하다.
  오직 타격하는 손길과 속도에 따라 여전히 하늘과 땅 사이를 새처럼 겉돌거나 불현듯 나조차 알 수 없는 영원한 시간 속으로 질주해 가는 내가 보일 뿐, 끝없는 부재가 부재를 부르는 나의 진동 속엔 풀리지 않은 원한이나 원망은 없다. 이제 더 이상 종족의 울음이, 결핍의 역사가 새겨져 있지 않다. 억제하기엔 너무나도 힘든 무한한 긍정과 자유의 내 살가죽 속엔.

 

 같이 음미해 볼까요? 
송승헌의 ‘난타’나 ‘정통 판소리’공연에 가신 적이 있나요? 그랬다면 이 소리들은 이순신의 칼의 서슬 푸른 검명(‘한 번 휘두르니 천하가 베어지는도다!’)과 같지, 조선을 침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왜군의 검에 쓰여진 허망하고 요망한 (김훈의 칼의 노래) 검명(‘오, 사꾸라같이 지고 마는 오사카의 영광이여!’)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잘 이해할 겁니다. 임동확의 시 ‘북’은 이순신의 검명, 난타, 정통 판소리에 내재된 한민족의 정신적 흐름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탁월한 작품입니다. 모두 3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각 연에서의 발전적 표현으로 마치 음표들을 미적분을 정교하게 풀어내는 바흐의 음악을 듣는 것 같습니다. 결국 도구가 되었던 수학은 뒤로 슬며시 숨고 저자의 가슴을 가득 채웠던 문학적 격랑만 독자들에게 남을 것입니다. 제1연은 북을 두드리는 자신을 어떤 대상들의 ‘세 가지’에서 출발하여 비유하면서, ‘셋-둘-하나’로 좁혀나갑니다. 제2연은 북을 두드리는 나의 동작 자체를 ‘두 가지’ 비유로 몰입해서 자세하게 풀어냅니다. 제3연에서는 드디어 ‘한 가지’로, 북에 대한 비유나 동작들조차 모두 다 뒤로 물리고 더 몰입하여 ‘나’만 남긴 후에 드러난 나의 내면을 자랑스러워하며 환희에 빠집니다.

 

제1연
(세 가지)에서는 비유 대상을 ‘셋’에서 출발해 ‘둘’로 좁히다가 마지막엔 ‘하나’인 팽이로 남습니다. 즉 ‘셋’(인간-어부,황제,상인)에서 ‘둘’(동식물-나팔꽃,도둑고양이)로, 거기서 다시 ‘하나’(무생명체-팽이)로 점차 복잡성을 제거해가며 결국 하나의 메시지로 독자를 몰입시킵니다.

‘셋’(인간) : 단 하나의 음만 표현할 수 있는 북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세 구분과 그것에 철저히 얽매여서 움직이는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로 싸잡을 수 있는 신통방통한 물건입니다 :‘미래의 시간을 낚는 어부’,‘영광된 과거를 놓아주지 않는 거만한 황제’,‘늘 재고로 쌓이는 현재를 서둘러 처분하려는 상인’,

‘둘’(동식물) :‘때와 장소를 적절하게 골라서 난시청 지대 TV안테나를 절묘하게 타고 오르는 나팔꽃’,‘적대적 세계의 장력(중력과 거리)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가로지르는 도둑고양이’,

‘하나’(무생명체) :‘내리칠수록 더욱 힘을 내는 팽이’. 그런데 북이 표현해 내는 다양한 인간군 자체는 시간에 매인 존재이지만, 동식물과 무생물은 오히려 중력과 거리를 극복하는, 인간보다 위대한 존재같이 보입니다. 심지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생의 소용돌이를 인생처럼 겁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반갑게 맞이하는 무생물인 팽이는 가히 초월적으로 높아 보입니다. 이처럼 단순한 북이지만 우주의 모든 존재들을 완전히 소화해 표현해내면서도 ‘단 한 번의 상처도 받지 않은 것처럼 갑작스럽게 푸른 강물로 흘러가 버리거나’, 절정에 이른 난타는 그 어떤 ‘슬픔도 부정’도 없는 고매한 인품의 선비로 발전되어버렸습니다. 더욱이 이 ‘슬픔과 부정’을 극복하는 감정은 제3연에서 ‘원한이나 원망’조차도 품지 않는 존재로 발전합니다.


 제2연
(두 가지)에서도 이제는 동작 자체에 집중하여 ‘두’동작에 좁히면서도 또 다시 ‘둘’-‘둘’이라는 수학적 전개방식을 이어갑니다. 첫째 ‘둘’(‘미처 예기치 못한 불꽃의 리듬’,‘말할 수 없는 말의 맥락’)에서 불끈 일어서며 특이하지만 동일한 리듬과 맥락이라는 북이 주는 타격에 독자는 얻어맞습니다. 둘째 ‘둘’에서는 뻔뻔하고 염치없는 점에서 동일한 두 대상을 선정합니다(‘길가의 미루나무’,‘염치라고는 모르는 철부지들의 열애’).

이 둘에서는 비유대상을 더 세밀히 관찰하여, 각각에 대해 장려하고 자세한 문장을 선사합니다. 길가에서 극단적으로 변화하는 날씨를 온몸으로 맞이하며 극단에서 극단으로 변화하는 미루나무는 그 흔들림으로 이제는 고통이나 아픔 따위와 무관하다는 듯 자세를 취합니다. 주위 눈치 하나 보지 않고 서로 입맞추며 쪽쪽거리는 소리의 혓바닥을 독자들이 오히려 흠칫거리며 들어야 했던 철부지들의 열애가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이제 제3연에서는 한 가지(‘나’)만 남았습니다.

물론 ‘하늘과 땅 사이를 겉도는 새’가 나오지만, 곧 시인의 상상력이 본론에 들어가듯 내리꽃혀, ‘불현듯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영원한 시간 속으로 질주해가는 나’만 보입니다. 드디어 ‘끝없는 부재가 부재를 부르는 나’로 귀결됩니다. 그런 내가 치는 북을 따라 느끼는 ‘나의 진동’ 속에, 그동안 나를 사로잡던 세 가지(여기서도 또 다시 3이라는 수학!)로 대표되던 모든 것들이 소멸되지만, 점차로 차원이 높아집니다. 첫째는 ‘풀리지 않는 원한이나 원망’이라는, 억울한 개인의 과거 경험을 역투사하여 조작해낸 개인 역사에 대한 가짜해석입니다. 둘째는 ‘종족의 울음’이라는 민족주의적,국수주의적인 허망한 울부짖음입니다. 또 셋째는 ‘결핍’이니 불평등이니 하는 붉은 완장을 찬 거짓의 아비를 닮은 거짓의 아들들(요한복음 8:44)이 만든 이데올로기입니다. 이리하여 진동하는 북의 표면은 어느새 ‘억제하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무한한 긍정과 자유의 내 살가죽’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몰입과 자유를 탁월하게 드러낸 이 시 자체도 ‘자기긍정과 자유’라는 또 하나의 헛된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약점을 우리는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겠습니까? 니체의 신화적 존재로, 끊임없이 돌을 굴려 언덕을 넘으려하나 항상 제자리도 돌아오고 마는 시지프스의 행위 자체를 인생이라고 해야 하기에는, 그런 의지철학이 끼친 폐해가 얼마나 큰지 역사가 이미 증명하지 않았나요? 또 인류역사상 최고 둘째 악당인 히틀러에 (은근히) 동조한 하이데거가 남긴 실존철학을 따라 무엇이든 집중하고 열정적으로 살면 된다는 삶의 철학이 2차대전 이후 서구가 주도하는 정신적 황폐를 조금이라도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1960~70년대 유럽과 심지어 한국까지 강타한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서》처럼) 처음부터 피조물 인간이 창조주를 멀리 떠나갔던 동양의 아주 다양하고 오래된 역사나, 철저히 창조주를 도전하고 배신한 서양의 (중세기와 그 이후를 망쳐놓은 로마교와 근현대에 세상의 빛이 전혀 되지 못한 개신교를 포함한) 역사 모두, 인생이 죽음으로 끝난다는, 피하고 싶지만 피해지지 않는 가장 실존적 고통을 누가 해결할까요? 아무리 자유를 추구하며 열정적으로 무엇인가 몰입하고 성취하며 산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죽음을 직면해야 삶이 해결되는데, 죽음을 모른척하는 열정과 자유는 허망하지 않나요? 가무와 신명나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 민족성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또 인생이 한 일에 대한 궁극적 보상이나 궁극적 책임이 없다면, 내가 윤리적이 되어야 할 이유 자체가 없다면, 그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이럴 때일수록 임동확과는 정반대로 하늘을 향해서 겸손하게 손을 들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에서 건져내랴’라고 외쳐야 하는 것 아닐까요? (로마서 7:24)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37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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