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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대가 되니달라지는 것들

2021년 3월호(137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1. 4. 5.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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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대가 되니
달라지는 것들

 

2021년 새해를 맞아 지난 달력을 버리며 1월 달력을 새롭게 펼치니, 친구의 진심 담긴 농담이 떠오르더군요. 나이의 앞자리가 4로 바뀌고부터는 새해가 되어도 나이를 세지 않게 되었다고요. 그러다 보니 가끔씩 누군가 나이를 물어보면 ‘내가 몇 살이지?’속으로 세어보느라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한다고요. 그 말을 듣고는 한참을 웃었지만 저도 공감이 되었습니다. 
몇 년 전만해도 누군가 나이를 물으면 “00살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마 00살일 걸요?”라고 대답을 하고, 나이보다는 출생년도를 말해주는 게 더 편해지고, 일년에 몇 번 가족 행사 때 만나는 조카들의 나이와 키가 훌쩍 자란 것을 보고서야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사십 중반이 되다 보니, 제 나이보다 부모님의 나이를 더 기억해야 하고 신경써야 하는 때가 되었더군요. 바쁘다는 이유와 코로나를 핑계로 한동안 홀로 지내시던 아버지를 찾아뵙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하게 오늘은 아버지댁에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말 저녁 아버지를 찾아뵈었습니다. 눈에 익숙한 오래된 살림살이들과 적막함이 느껴지는 아버지 집에 들어서는 순간, 왠지 모를 쓸쓸함과 피곤함이 몰려왔습니다. 


아버지는 어릴 적 북한 황해도 해주에서 피난을 내려와 부산 학고방(종이로 만든 집)에서 살며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딸만 다섯에 막내 아들로 귀하게 대우받으며 태어났지만, 6.25전쟁의 상처는 가족들을 모두 힘들게 했습니다. 어릴 적 어머니를 지병으로 일찍 잃으시고 누나들 속에서 자란 아버지는 성격도, 건강도 매우 유약하셨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싫은 말을 못하시고, 여러 질환으로 입퇴원을 반복하며 평생 약을 복용하고 지내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한편으로는 불쌍하면서도 엄마와 자식들을 고생시키는 것 같아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점점 아버지를 포기하고 그저 살아계신 것만으로 감사하자며 지내고 있었지요.


오랜만에 집에 오니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저녁은 잠시 쉬었다 먹기로하고 눈을 감고 쉬고 있는데, 아버지가 저를 부르며 기저귀를 사다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거였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것도 아닌데 기저귀는 왜?”라며 안방으로 들어선 순간, 바닥이며 이불에 피가 중간중간 묻어있고 아버지는 물티슈로 핏자국을 닦아내고 계셨습니다. 며칠 전부터 배가 아파 설사를 했는데 오후부터 갑자기 하혈을 하신다며 “괜찮아지겠지, 기저귀만 좀 사다 줘” 하십니다. 순간, ‘조금만 더 일찍 올걸. 왜 집에 왔을 때 바로 눈치채지 못했을까? 아버지 상태를 좀 더 살필 걸…’ 하는 후회가 가슴에 몰아쳤습니다. 
아버지는 평소 피가 한 번 나면 멈추지 않는 질병을 앓고 계시기에 급하게 택시를 타고 병원 응급실로 향했습니다. 밤새 점점 심해지는 하혈로 급하게 입원 수속을 마치고, 다른 가족들에게도 상황을 알리며 거의 밤을 꼬박 세웠습니다. 다음날 만난 의사는 피가 계속 멈추지 않을 경우, 수술을 해야 하는데 아버지는 지혈이 안되니 수술이 위험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불의의 사고가 있을 경우, 병원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서약서, 각종 검사들마다 필요한 ‘보호자 동의서’에 서명을 하며 이제는 내가 아버지의 보호자라는 사실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보호자와 피보호자로 위치가 한순간 바뀐 것이 참 어색하고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습니다. 


며칠 간의 약물치료와 수혈을 하며 다행히 위험한 고비는 넘기고, 2주 후 퇴원을 하고 집으로 모셔왔습니다. 아버지의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저를 포함한 자녀들은 구체적으로 한 달에 몇 번 부모님을 찾아뵐 것인지 정하고, 갑작스런 입원으로 인해 목돈이 필요한 경우를 대비해 저축하고,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약속들부터 지켜가고 있습니다. 위급한 상황을 겪어보니 그동안 얼마나 내 삶에만 집중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님을 잊고 살았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부모님을 떠올릴 때면 으레껏 어린 시절의 부모님, 나를 서운하게 하셨던 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과거들만 떠올렸었습니다. 좋은 순간들도 분명 있었을텐데 그것보다는 부정적인 일들을 더 기억하고 스스로 부모님과의 거리를 두었던 것이죠.


나이가 들며 저도 제 자신을 돌아보고 부모님을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이제 보청기가 없이는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보청기 없이 대화가 가능했을 때 아버지와 더 많은 대화의 시간들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 후회가 됩니다. 
이런 후회, 아쉬움과 함께 아버지의 남은 생애를 어떻게 하면 의미있게 보낼 수 있는지, 스스로 생각하고 실천하실 수 있도록 제가 딸로서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중간중간 찾아와 식사를 챙겨드리고, 집안을 청소하고 필담 섞인 대화를 하며, 아버지의 생애를 돌아보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정리하며 세워가시도록 도와드리려고 합니다. 저 또한 노년을 아버지를 통해 배우면서 지금 마음껏 움직이고 가장 뜨겁게 살 수 있는 시기를 나 스스로 만들어 놓은 한계 때문에 결코 헛되게 보내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웹디자이너 고경명

joyfuloil@naver.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37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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