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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것

2021년 7월호(141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1. 7. 1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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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것

 

낯 선 방문객
아파트 인테리어 공사를 하려면 꼭 거쳐야 하는 관문 중 하나가 공사 동의서를 받는 것입니다. 공사 과정에서 발생하는 적지 않은 소음과 분진으로 불편함을 겪을 이웃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것인데, 아파트마다 다르지만 많게는 50가구 넘게 사인을 받아야 할 때도 있으니,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지요. 고층 아파트의 가장 위층부터 시작해 비상계단을 통해 내려오며 가가호호 방문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지만, 주민들이 집에 있을 만한 시간을 찾다 보니, 느즈막한 저녁 시간에 찾아가 문을 두드려야 하는 건 여간한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방문객의 입장도 이러한데, 늦은 시간에 찾아온 처음 보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 주민의 편에선 더 부담스러운 게 아닐 수 없겠지요. 더구나 요즘같이 코로나 시대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고요. 그래서 코로나가 막 번져나갈 즈음에 방문한 한 아파트에서는 인터폰을 통해 “왜 이런 때 찾아 오냐?”,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냐?”라는 젊은 아주머니의 매몰찬 거절도 받아야 했지요.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것
하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낯선 방문객에게 기꺼이 문을 열고 사인을 해줍니다.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고 재빨리 인기척이 있는지 귀를 쫑긋 세웁니다. 강아지 짖는 소리부터 요란한 집도 있고, “누가 왔나 봐”, “나가 봐”, “여보세요?”, “누구세요?” 다양한 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커집니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내가 서 있는 어둑한 복도로 환한 불빛이 쏟아져 나옵니다. 동시에 각양 냄새들이 열린 문 사이로 흘러나옵니다. 저녁 식사의 음식 냄새가 허기진 배를 자극하기도 합니다. 꿉꿉한 곰팡이 냄새, 싸구려 방향제 냄새, 샴푸 냄새, 강아지 냄새, 어르신의 군내와 노총각 냄새까지 집집마다 독특한 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잠시 열린 문 사이로 그 불빛과 냄새의 주인공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소박하다 못해 때론 당황스러울 정도로 자유로운 모습의 이웃들입니다. 헐렁한 흰 런닝 차림의 아저씨, 설거지한 손의 물기도 닦지 못한 채 달려 나오신 어머니, 화장기 하나 없는 젊은 딸내미, 그리고 호기심과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한 꼬맹이들도 있지요. 아이들은 낯선 방문객을 경계하지 않습니다. 뭐라도 한마디 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으로 엄마 아빠 옆에서 장난을 칩니다. 반가운 마음에 “안녕~” 인사라도 하면, 신이나 밖으로 뛰어나올 기세입니다. 그렇게 열린 문 사이로 우리 이웃의 따뜻한 관심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다락방에 숨었던 어릴 적 나
어릴 적, 촌구석 집에 외지 손님이 올 때면 저는 재빨리 안방에 달린 다락방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얼른 나와 인사하라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뻘쭘하게 고개를 숙였지만, 뭐가 그렇게 창피하고 무서웠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산골짜기 화전민의 아들로 일제 강점기와 6.25 동란을 고스란히 겪으며 피해 다니고 숨어 지내야 했던 아버지의 경험이 고스란히 저에게 녹아 있기 때문이었겠지요. 또 지나가는 낯선 사람을 향해 아무 이유 없이 감자 주먹을 날렸다는 욕쟁이 고모의 유년 시절 이야기는 침탈과 전쟁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가진 상처와 피해의식, 뿌리 깊은 경계심을 담고 있기에 마냥 웃고 지나갈 수만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아버지의 가계와는 달리 어머니는 사람들을 반기고 대접하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지나가는 나물꾼이나 집배원, 인부들 할 것 없이 누구라도 만나면, 먹을 것을 대접하고 시원한 지하수 펌프 물 한 바가지라도 건네는 것을 잊지 않으셨죠. 이런 어머니가 하도 신기해 십여 년 전에 어머니와 함께 태어나 자란 마을을 일부러 찾아가 보았습니다. 넓고 탁 트인 곳이 아닐까 했는데, 기대와는 정반대로 우리 집보다 더 외지고 좁디좁은 산골짜기였지요. 대신 어머니는 어릴 적 마을에서 반장을 맡아 활발하게 마을 사람들과 만나 교제하셨던 아버지(저의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똑같은 처지의 이웃들을 향해 뭐라도 하나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스스로 키워 오셨던 거지요.

열린 문이 닫히지 않도록
하지만 나이가 들고, 세대가 흘러가면서 이웃을 향한 열린 마음들은 점점 더 닫힐 수 있습니다. 아흔을 바라보시는 어머니께서 전화로 “이제는 늙어서 나만 알지. 나 하나 간수하기도 힘들어”라고 한탄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층간소음, 흡연, 주차문제 등으로 이웃 간에 심각한 다툼이 많아졌습니다. 인테리어 공사 중에도 입주민들과 얼굴을 붉히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열린 문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자재를 다 실을 때까지 승강기 열림 버튼을 꼬옥 눌러주시는 분도 계십니다. 서두르는 저에게 “천천히 하세요”라고 고마운 말씀까지 해주시면서요. 또 짐을 든 저를 보고 공동 현관문까지 달려와 문을 열어주는 기특한 꼬마도 있습니다. “너 참 멋진 친구구나.” 칭찬을 해주면 아이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지요. 톨스토이는 그의 짧은 소설,《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사람은 자신을 위한 염려가 아니라, ‘이웃을 향한 관심과 사랑으로 사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과 함께, 어느 시인이 노래했던 것처럼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그의 과거, 현재,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는 실로 어마어마한 사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엘리베이터에서 잠시 만난 꼬마 아이에게도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허리를 낮추어 반가운 인사를 건넬 수 있는 거겠죠. “꼬마야, 네 녹색 옷 정말 멋있다. 화단의 나뭇잎들이 부러워하겠는데”

 

어메이징 스페이스 대표 고종훈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41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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