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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왜 전제적,폭력적,독재적 정치정체성을 가지는가?(2)

2021년 9월호(143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1. 9. 15.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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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화(명)비평 5]

     러시아는 왜 전제적,폭력적,독재적 
정치정체성을 가지는가?(2) 

우리는 러시아의 정치적 정체성이 ‘전제적’, ‘폭력적’, ‘독재적’이라는 특징을 가진 점에 계속 집중하고 있습니다.
‘전제적’이라는 말은 혈통(왕권)을 이은 자만이 통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러시아 전제정치는 반전설적으로 끼에쁘에서 류리크-올레크가 통치(862)한 데 있습니다. 이어서 이고리→미망인 올가→스뱌토슬라브가로 대를 이어가며 통치하다, 형제들의 정권투쟁 중에 최종적으로 성공한 이는 셋째 블라디미르(980~1015)였습니다. 그는 러시아 정치에서 자신의 출신인 류리크 가문만이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원천이라는 전통을 창조했습니다(라자놉스키, 러시아의 역사(상) 61). 즉 단일지배가문이라는 정치구조를 형성하였고, 심지어 몇 백 년 후인 19세기까지도 러시아 내에서는 이 가문에 대한 존경심이 유지되었습니다. 이 단일지배가문의 통치 전통은 끼에쁘가 몽골에 의해 함락된 후 새롭게 러시아 정치의 중심으로 등장한 도시국가인 모스끄바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이렇게 국가란 통치자 혈통의 ‘세습자산’이라고 정의한 가운데, 이를 기반으로 지배권의 범위를 동방으로 뻗어나가려는 ‘러시아 땅 모으기’전통을 형성하였습니다(위의 책 145). 통치 혈통이 끊어진 짧은 ‘혼란기’(the time of trouble)를 지난 후에 계속 거대해져가는 러시아를 300여 년간 중단 없이 통치한 로마노프왕조(1613~1918)도 이런 전제적 통치를 이어갔을 뿐 만 아니라, 이어진 소련시절(1918~1991)에도 공산당이 이데올로기를 피처럼 나눈 하나의 정신적 혈족이 되어 정권을 장악한 체제를 형성하였습니다.
 ‘독재적’은 법과 원칙이 아니라 통치자의 자의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는 통치를 의미합니다. 또 ‘폭력적’이란 말은 위의 두 정치체제/형태 속에서 강압적 물리력을 사용하여 피통치자를 지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모든 전제군주가 폭력적이지 않을 수 있고, 모든 독재자가 늘 폭력적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비교적 늦게 9세기에 시작된 러시아 정치역사의 대부분은 ‘전제적’+‘폭력적’ 혹은 ‘독재적’+‘폭력적’ 조합이라는 특징을 가집니다. 즉 러시아에서 어떤 정치체제나 이데올로기가가 나타나든 이런 정치적 특징이 반복되어 나타나 러시아의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했던 겁니다.
우리는 먼저 러시아가 ‘전제적’, ‘독재적’, ‘폭력적’ 정치적 정체성을 가진 첫째 이유로 러시아가 매우 광활하고 생존이 어려운 지리적 환경 때문임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류가 사방으로 뻥 뚫린 광활한 자연환경을 다스릴 방식으로 러시아가 형성한 이런 열등한 정치적 정체성의 역사를 정확하게 읽고 제대로 반성한다면, 더욱 더 광활한 우주를 통치하기 시작할 시점인 21세기에 다시는 이런 열등한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즉 광활함이라는 지리적,우주적 특성이라 할지라도 러시아가 형성했던 열악한 정치적 정체성을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바로 옆에서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아주 위험한 공산당독재를 획책하는 정치적 정체성을 인류에게 주입하려는 중국에 대해 무척 우려하고 경각심을 가지면서 말입니다. 이어서 이번 호에는 러시아가 이와 같은 정치적 정체성을 가지게 된 그 다음의 이유 두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


2) 끼에쁘 루시의 블라디미르 대공이 비잔틴정교를 국교로 수납(988)한 이유인 ‘미’美
3) 정치에 시녀된 종교로서의 비잔틴정교와 더욱 변질된 러시아정교

2) 끼에쁘 루시의 블라디미르 대공이 비잔틴정교를 국교로 수납(988)한 이유인 미美
형제들과의 혈투에서 천신만고 끝에 승리한 삼남인 블라디미르 대공(980~1015)은 극심한 혼란에 빠진 동슬라브족이 끼에쁘에 충성하도록 만든 후에 발트해까지 진출하며 정식 국가로 발돋움하는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야심이 있고 매우 신중한 왕들이라면 다 하는 것이지만, 블라디미르가 내린 매우 특이한 결정은 바로 비잔틴기독교를 정식 국교(988)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입니다. 그 역사적 배경은 이렇습니다. 중세기의 지구온난화 시절에 북쪽의 바이킹족은 북미의 뉴펀드랜드까지 진출하거나(서쪽), 영국해협을 거쳐 지중해까지 식민지를 개척하거나(남쪽), 드네프르강 등을 이용하여 비잔틴제국까지 위협하기도 했습니다(동남쪽). 이런 역사적 흐름의 중간에 위치한 슬라브족은 문화적으로 융성한 비잔틴제국의 회유를 받아 비잔틴 북쪽에서 비잔틴의 위협이 되었던 불가리아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비잔틴제국과 지속적인 정치적 연관을 맺으며 그 고급문화를 흡수하는 쪽으로 진행합니다. 그 중에 이루어진 결정적 행보가 바로 비잔틴정교를 국교로 채택한 사건입니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와 동슬라브족은, 서방교회의 전통을 가진 라틴기독교(로마교,개신교)가 아니라, 동로마제국의 종교인 비잔틴정교를 모체로 하게 되었습니다. 블라디미르의 통치 초기에는 우레의 신‘페룬’의 상을 만들어 백성이 섬기도록 했지만, 결국 러시아를 비롯한 전체 슬라브족 나라들의 종교가 된 비잔틴정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는 과감한 결정을 한 겁니다. 고대의 연대기([원초연대기])에는 종교를 받아들일 때 있었던 전설적인 내러티브narrative가 있습니다. 블라디미르는 당시의 모든 종교(로마교,유대교,이슬람,비잔틴정교)를 비교하게 했고, 다음의 이유로, 다른 종교 중에 비잔틴정교를 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인들은 하염없이 방황만 할 운명이며,
   이슬람교의 신도들은 음주를 할 수 없으며 그 예배에는 슬픔만 있고,
   로마교는 엄격한 규율만 있으며 그 예배에 영광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비잔틴정교의 예배에는 자신들이 천국에 있는지 지상에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이 인간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어떤 예배의식보다 더 아름다웠다.”  
아름다움, '미’ 美를 종교 선택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겁니다. 이 전설적인 내러티브 속에 담긴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은, 러시아 종교의 본질뿐 아니라 러시아인의 정치적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아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1) ‘미’ 美라는 특이한 기준으로 종교를 선택함, (2) 개인이 아니라 통치자가 종교를 결정함. 

(1) ‘미’ 美라는 특이한 기준으로 종교를 선택함
종교적,철학적,논리적 성향이 매우 강한 한국인에게 절대적 가치를 따질 때 누구나 잘 아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진-선-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스코리아를 뽑을 때에도 1,2,3등을 그런 순서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미스러시아를 결정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러시아의 종교를 결정하는 일(988)에 있어 1등 선택의 기준은 바로 우리가 3등으로 여기는 ‘미’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러시아는 종교를 선택할 때에도 ‘미학적’이었을지 몰라도, 그만큼 ‘비종교적’이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우리에게도 아주 잘 알려졌으며, 사형 몇 시간 전에 황제의 사면을 받은 후에 급격한 종교적 회심을 경험한, 그 후로 한 때 노름의 유혹에 빠지기도 한, 누구보다 러시아적 종교적 전통을 매우 사랑한 문학가는 바로《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로 유명한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그는 러시아의 이런 종교 전통을 방어하며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표현하면서, 러시아인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각별한 사모함을 나타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진리 자체를 추구하는 ‘진’과 그 진리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행위인 ‘선’은 포기되거나 부차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러시아 종교의 항구적 특성을 형성하고 만 것입니다. 물론 이 전설적 내러티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두 번째 이유인‘통치자가 종교를 결정하는 사실을 포장하기 위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정교의 신학은 ‘아름다움의 신학’이라는 특징을 가졌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석영중, 러시아정교, 18). 즉 ‘심원한 종교적 원리 ’나 ‘깊은 사상적 기초’, 혹은 ‘기본을 탄탄히 갖춘 희생 윤리’ 때문이 아니라, ‘감각적 아름다움에 매료된 종교’로 방향을 설정한 겁니다. 즉 1) 금빛 찬란한 사제들의 복식과 보석장식, 2) 현란한 모자이크와 프레스코로 장식된 예배당, 3)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성가와 종소리들, 4) 후각을 매혹시키는 진한 향내가 어우러지는 비잔틴정교의 예배는 러시아인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깊은 종교적 만족감을 채웠던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은 우리가 지금 다루는 러시아인의 정치적 정체성이‘전제적’, ‘독재적’, ‘폭력적’으로 흐르는 것을 막는데 러시아정교가 매우 무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됩니다. 즉 비잔틴정교는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터어키에 의해 멸망(1453)되면서 소멸되거나, 혹은 정치적 주체가 사라진 그리스정교로 심각하게 축소되었으나, 러시아정교에게는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겼습니다. 로마교와의 교리투쟁을 계속하여 결국 결별(1054)한 비잔틴정교를 신봉하던 이들은, 종교와 철학의 본질을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철저히 추구하던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적 정신을 가졌던 그리스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매우 척박하고 춥고 황량한 곳에 살던 러시아인들에게는 그런 원리적인 것보다는 1) 현실적 체험을 하게 해주는 정교회의 감각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과 2) 현실정치에서 지배권을 명확하게 장악하는 일이 훨씬 본질적으로 여겨졌습니다. 종교가 미를 추구하면, 정치,사회,역사의 부패를 막을 힘을 가질 수 없습니다. 러시아인의 정치적 정체성이 부정적으로 형성된 결정적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미’를 종교 선택의 기준으로 삼았던 천여 년 전의 결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2) 개인이 아니라 통치자가 종교를 결정함
기독교가 시작된 이래로 전도와 선교는 늘 개인으로부터 시작되었지, 결코 정치와 연관되지 않았다는 것을 신약성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로마 고위직의 한 사람인 데오빌로 각하를 향해서 사도 바울의 제자인 누가가 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기독교가 정치적 영향력에 의존하거나 확대하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를 믿게 된 로마 황제 집안사람들(‘시저 집안의 사람들’)을 아주 예외적으로 언급하긴 하지만, 정치와 종교를 연관하려는 의도가 결코 없었음을 문맥 자체에서 선명히 알 수 있습니다(빌립보서 4:22). 만약 종교가 정치 즉 로마 황제의 힘을 빌리려고 했다면, 매우 정교한 계획과 체계로 접근해야 하는데, 신약성경에는 일말의 흔적조차 없이 순진하기까지naive 합니다. 철저히 개인이 종교적 체험과 행동의 근본 변화를 이룸을 통해 기독교를 전파하는 전통을 신약성경과 초기 기독교는 늘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8~9세기 경에 간혹 북유럽에 원시종족들이 족장에 의해서 한꺼번에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예외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블라디미르 대공이 그동안 섬기던 우상을 한 번에 다 없애고 자기 할머니처럼 개인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정도가 아니라, 국교로 선택한 후 모든 백성들이 드네프르강에서 세례를 받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두 가지 점에서 앞으로 러시아에 있어서의 종교뿐 아니라 정치적 발전에도 매우 부정적 효과를 끼쳤습니다.
첫째, 러시아 종교의 출발은 개인이 종교결정의 근본이라는 진리를 역행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서유럽의 개인주의와 그 이데올로기는 근세 이후에 형성되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서구에 늘 영향을 주었던 기독교의 종교적 기초는 늘 개인의 변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서유럽의 문화와 기독교 본질 자체를 구분하지 않는 보편적 실수를 많이 범합니다. 사실 종교,정치의 권위에 늘 도전하는 그리스적 본성을 유산으로 이어받은 서유럽의 문화(명)는 병존해온 기독교와 갈등 혹은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서유럽과 달리 러시아정교는 정치지도자가 결정한 종교라는 사실이 러시아의 종교뿐 아니라 정치 역사에도 매우 부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러시아정교가 소위 ‘이중신앙’이라는, 기독교와 함께 미신적 요소를 많이 함유한 종교라는 부정적 타이틀을 얻는 것도, 개인이 명확한 종교적,철학적,윤리적 변화에서 출발한 종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인의 정치적 정체성에 있어서도 부정적 영향을 항구적으로 미치게 되었는데, 즉 누가 종교를 결정해 주어서 믿은 것에 불과한 전통을 가지니, 종교적으로 근본변화를 체험한 개인으로 출발하여 올바른 역사관,세계관,정치관을 가지고 사회,문화,역사를 보고 변혁시키려는 의식을 갖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 블라디미르의 이 결정은 정치가 종교를 이용하는 비잔틴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 되었습니다. 
학자들은, 매우 교활하거나 혹은 매우 지혜로운 블라디미르가 이런 결정을 한 것은 비잔틴 문화(명)의 우수성을 본받으려는 단순한 목적 때문이라고 해석하지 않는 편입니다. 오히려 통일한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며, 동시에 종교를 자기 손아귀에 넣어서, 정치적 통치를 넘어 종교적 통치까지 이루려던, 동로마제국(비잔틴)의 정치전통을 그대로 흡수하려고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해석하는 편입니다. 사실 블라디미르 이전인 9세기경 불가리아 방면의 남슬라브족의 전도를 위해 1) 문자 만들어주기, 2) 성경번역하기, 3) 예식서(찬송) 만들기를 했던, 시릴과 메토디우스의 매우 탁월한 풀뿌리 기독교형성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블라디미르의 정치적 종교결정에 의해 소멸되거나 흡수된 사실은 러시아 종교와 정치의 미래라는 관점에서는 큰 불행인 셈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우리는 한층 더 깊이 들어가서, 러시아정교는 그 근원인 비잔틴정교의 부정적 패턴을 반복했던 사실을 지적해야 합니다.  

3) 정치의 시녀로 변질된 비잔틴정교, 거기서 더욱 변질된 러시아정교
비잔틴정교와 러시아정교 자체에 대해서는 따로 다룰 것이지만, 여기서는 이 두 정교Orthodox Churches의 정치적 성향만 집중하려고 합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이 두 정교는, 종교적으로 회심한 사람들이 모여 국가를 이루며 종교적 원리를 정치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가 종교를 결정하고 종교적 통치권까지 장악하는 형태를 가집니다. 블라디미르 대공이 비잔틴정교를 국교로 삼은 것은, 600여 년 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나아가 그것을 국교로 삼은 것(325)의 판박이라는 겁니다. 반면에 그 황제가 버리고 떠난 로마는 정치력이 진공상태가 된 가운데, 교회(교황)가 남아서 종교적 권위만 가질 뿐 아니라 실질적인 통치를 어느 정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교는 정치가 종교를 간섭하는 데서 자유할 뿐 아니라, 심지어 오히려 정치를 간섭하고 지배하는 데까지 나가기도 했습니다. 즉 종교와 정치의 상관관계에 있어서 서로마는 동로마와는 서로 정반대의 길을 걸어간 셈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두 교회 모두 정치와 종교 둘 중의 하나는 다른 하나를 종속시키려고 했으므로, 긴장의 역사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황제가 예수의 12사도급 지위를 가진 것으로 보는 동로마의 교회인 비잔틴정교에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모두 황제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정치가 만드는 악행,부조리에 대해 충격을 주며 예언자적 사명도 감당하지 못하는 교회라는 비참한 현실을 철저히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주 예외적이지만 폭발적 반발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비잔틴정교의 정치가 종교를 지배하는 전통은 단지 로마제국이라는 역사적 기초에 있지 원리적,성경적 근거는 없습니다. 끝까지 세례를 미루다가 죽기 얼마 전에 겨우 세례를 받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 당시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어버린 기독교를 어쩔 수 없이 공인해 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종교를 정치에 활용하여 자신의 통치에 대한 정치적 안정과 함께 정신적,종교적 근거를 마련하려한 것입니다. 신학자들이 종교회의의 토론을 이끌지만 그 회의 결정은 황제 자신이 주도하고 이단 파문을 자신의 이름으로 함으로써 종교에 대한 확고한 지배권을 행사했습니다. 이런 점을 블라디미르와 그를 잇는 러시아의 통치자들은 그대로 복사해서 자신의 나라에 적용했습니다. 즉 동로마의 황제들이 비잔틴정교의 교리 확정에 영향을 미쳤지, 그 반대인 황제의 통치에 대해 종교가 정당한 비판을 하거나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일을 하지 못했고, 이 역사가 동로마가 망할 때까지 반복해서 시행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통치자,황제가 러시아정교를 좌지우지했지, 그 반대로 러시아정교가 통치자나 황제의 악한 통치를 비판하거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심지어 로마노프왕조의 뾰또르 대제는, 로마 황제가 비잔틴정교를 지배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즉 러시아정교 자체의 최고의사결정기구를 없애고, 대신 ‘신성종무원’이라는 국가기관을 만들었으며, 그 최고의 자리에 앉을 이를 황제가 임명하는, 정말 러시아교회에 독이 되는 치명적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로마노프왕조를 바로 이은 소련 공산주의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종교를 없애버리고 정치가 종교 자체가 되어버렸습니다. 심지어 그렇기 때문에 이전의 종교 자체를 뿌리 뽑으려는 노력을 소련 공산주의가 끝나는 시점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비잔틴제국과 비잔틴정교는 그리스인에 의해서 운용되었기 때문에, 그래도 그리스인의 본질을 철저히 추구하는 본성의 장점은 비잔틴제국과 비잔틴정교의 생명이 길어지는 어느 정도의 원인이 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전제적’, ‘독재적’, ‘폭력적’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했기 때문에, 비잔틴제국보다는 훨씬 부정적 방향으로 발전하여 러시아정교는 더욱 철저히 정치의 시녀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소련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이 불필요한 시녀를 지구상에서 아예 죽여 버리고, 황제가 시녀의 역할까지 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러시아는 이렇게 도달한 역사의 최저점에서 기적적으로 회복되어 새로운 나라를 이루었지만, 이제 그 역사가 겨우 30년에 불과할 뿐 아니라 외부인의 입장에는 뿌띤이 독재 통치를 이어가는 러시아가 어떤 미래를 설정할지 근심하는 자세로 바라보게 됩니다: 1) 그동안 한 번도 걸어가지 않았던 개인의 종교적,정치적 결정권을 존중하는 밝은 미래로 갈 것인가, 2) 아니면 지난날의 실패한 정치,종교의 역사에 되풀이할 것인가. 그 민족의 내면에 오랜 역사를 통해서 형성된 정체성, 그 중에서 정치적 정체성은 변화되기가 무척 매우 힘들기에, 우리는 러시아의 미래가 부정적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을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나라의 정치,종교의 방향은 그 나라의 민족성에 의해서 좌우되기 매우 쉬운데, 한반도 한민족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리스인과 유사할 정도로, 본질,근원을 찾아가기를 좋아하는 우리의 관점에서는 러시아와 러시아정교의 역사는 매우 한심하게 보입니다. 그렇지만 지리적으로 우리 위에 떡 버티고 서 있는, 매우 이상하며 엄청 큰 나라인 러시아가 우리와 이룬 관계는 많지 않지만 가히 치명적 자취를 남겼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즉 ‘전제적’, ‘독재적’, ‘폭력적’ 정치적 정체성은 러시아제국에 이어 소련 공산당에서 발휘되었으며, 다시 이것을 답습한 북한에 의해서 현재까지 70여 년 이상이나 재시행 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남한 좌파들 역시 소련이라 불리웠던 러시아의 정치적 정체성에 영향을 받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반도의 정치적 정체성이 부정적, 즉 ‘전제적’, ‘독재적’, ‘폭력적’으로 흘러가도록 노력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segensong@gmail.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43>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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