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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범의 종횡무진 고고(古考)한 이야기(1)

2021년 12월호(146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2. 1. 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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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범의 종횡무진 고고(古考)한 이야기(1)

육조거리-1914년 경성부명세신지도

 

서울 광화문광장 조성거리 터파기 공사, 내 눈에 조선이 들어오다
서울은 구석기시대부터 현재까지 시간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역사의 시간과 공간을 담은 도시이다. 흔히 서울의 역사를 말할 때 한성백제부터 생각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이 도시에 사람들이 처음 살았던 연유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찾아 다녔던 유적 얘기를 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먼저 시대를 아주 내려와서 조선의 한양 육조거리 발굴 얘기부터 하겠다. 
최근 서울시가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을 위해 2019년 1월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2021년 5월에 완료한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종합청사 주변의 터에서 조선시대 육조를 비롯한 주요 관청터(삼군부,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와 관련시설 등이 발굴조사를 통해 새로이 확인되었다. 이는 문헌의 기록을 고고학이 증명한 아주 중요한 사례로 서울 고고학 연구의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조사를 토대로 조선시대 육조거리 시간의 변화상을 쌓인 지층을 통해 살필 수 있었고, 이 토층을 기준으로 주변 유적을 조사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광화문광장 조성사업은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추진 중이었던 ‘광화문 복원사업’과 연계하여 2008년까지 서울시가 세종로에 광화문광장 조성을 하기 위해 수립했던 프로젝트였다. 이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2007년 6월 문화재 지표조사를 진행하고 문화재 입회조사를 위해 공사일정을 파악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2008년 8월 26일 13시 30분, 서울특별시 도시개발본부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내용은 지금 광화문광장 조성거리 지역에 터파기 공사가 시작되었으니, 입회조사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알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당시 나는 김포 양촌(현 김포 한강신도시)의 발굴조사현장에 있었는데 약간의 고민이 생겼다. 이미 광화문광장 지표조사를 실시하였고, 종로 열린 광장 발굴조사도 진행했던 터라 세종로 지하에 육조거리와 관련된 지층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다만, 서울 도심의 가장 한복판, 더욱이 중심 도로인 세종로를 발굴한다는 것은 여간 간이 큰 사람이 아니면 감히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시 전화가 왔다. 그래서 나는 “좀 더 터파기를 진행한 후에 연락을 주십시오!”했다. 그러나 도시개발본부 부서의 김주임은 단호했다. 일정표를 가지고 움직이는 공무원임을 강조하며 오늘 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도착한 것이 15시 30분이었다. 

당시의 현장은 이순신 장군 동상 뒤편을 중심으로 약 4m정도의 깊이로 터파기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처음 눈에 띈 것은 모래층과 펄층이었다. 세종로 밑의 지하 세계가 드러나 있었다. 그 다음으로 동물뼈와 백자편, 토기편 등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현장에 쌓여있는 흙더미로 눈이 갔다. 하얀색 빛이 서쪽하늘의 저무는 태양에 반짝이더니 용 한마리가 보였다. 철화백자 용문 항아리 조각이었다. 내 눈에 조선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세종로 밑의 토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자연 범람층이 아닌 인공으로 조성된 지층이 한층, 한층 보이기 시작했다. 육조거리다!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그러나 좀 더 사실 확인이 필요했다. 그 때가 16시 30분 이었다.

드디어 조선시대 육조거리를 발굴하다
육조거리가 임진왜란 이후 다시 제 모습을 갖춘 것은 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복원되면서부터였다. 일본강점기의 육조거리는 1914년 ‘광화문통’으로 개칭되었으며 1926년 조선총독부의 완공과 함께 광화문이 이전되고 육조거리 양편에 건설되었던 장랑들은 사라졌다.  
19세기말, 20세기 초의 육조거리 관련 사진을 보면 관아를 출입하는 관료와, 분주히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상여행렬, 전차가 지나는 광경 등 매우 역동적인 거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이 쇠퇴하고 일제가 강점하면서 육조거리와 주변 관아 등은 허물어지고 관공서가 들어서게 되어 원래의 경관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육조거리의 발굴은 세종로 아스팔트를 걷어내면서 시작되었다. 도로로 사용되었던 부분을 아래로 1m 가량 걷어내자 1968년에 철거된 전차 선로의 침목이 확인되었다. 서울전차 선로는 광화문방향에서 남대문 방향으로 향하던 노선이었다. 이 노선은 1928년에서 1930년 사이에 복선화가 되었으며 이 때 이 지점으로 이설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차선로는 1968년 세종로 지하차도 공사로 폐선 되었는데 당시의 철 선로는 현재 없으며 침목, 잡석, 콘크리트 바닥만이 남아있었다. 다시 아래로 4m까지 평면조사를 하면서 마침내 육조거리의 토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육조거리의 지층은 하천의 영향을 받은 자연퇴적층, 자연퇴적층을 보강한 후 조성한 조선개국기 육조거리 조성층, 임진왜란 전후 층, 고종 연간의 경복궁 중건기 층, 일본강점기~현대층 등으로 확인되었다. 
육조거리는 조선토목기술의 완결이라 할 수 있다.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도로 축조방법은 자갈을 깐다거나 큰 잡석으로 기단부를 채운 후 흙을 쌓았다. 그러나 육조거리는 흙다짐을 하여 쌓은 토층이다. 따라서 돌을 쌓아 만든 기술보다 더 정밀한 축조 기술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흙길이 자연재해나 인공적으로 훼손되지 않도록 유지 보수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육조거리 토층 안에서 발견되는 동물뼈, 기와편, 도기편 등은 도로가 유지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육조거리 북벽 토층 사진 왼쪽에 세종문화회관, 오늘쪽에 kt 통신 건물이 보인다


육조거리, 조선의 상징으로 되살아나다
육조거리는 조선전기부터 현재까지의 지층을 고스란히 간직한 조선시대 주작대로이다. 이 발굴을 통해 1928년에 신설되었다가 1968년 폐선 된 서울전차의 복선 선로 및 침목 등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문헌과 옛 지도를 통해 전해져온 조선시대 육조거리가 확인되었다. 육조거리는 조선시대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따라서 육조거리 조성 이전과 이후의 지질, 고지형, 고환경, 지층의 퇴적물 분석, 연대측정, 수종분석 등 다양한 과학 분석을 실시하여 조선시대 서울의 역사복원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문화유산 연구원 부원장 박준범

amimuseo@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46>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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