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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질감 속에 새긴 깊은 삶의 이야기 - 박수근 전시회를 다녀와서

2021년 12월호(146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2. 1. 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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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친 질감 속에 새긴 깊은 삶의 이야기 
- 박수근 전시회를 다녀와서

1962년, 하드보드에 유채 59.3x121cm 농악

 

덕수궁 국립현대 미술관에서 열리는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시회를 관람하기 위해 토요일 아침 일찍, 서울 나들이를 떠났습니다. 
미술관이 위치한 덕수궁 안에는 얼마전까지 세상을 온통 황홀하게 물들였던 단풍의 끝자락이 남아있어, 고즈넉한 고궁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었습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는지 사람들은 많지 않았지만, 하나같이 행복한 얼굴로 늦가을 고궁의 정취를 즐기고 있었죠. 미술관이 열리기 전까지 고궁을 돌아보며, 때마침 전각과 정원에서 무료로 열리는 ‘덕수궁 프로젝트 2021: 상상의 정원’의 전시도 둘러보았습니다. 
개관시간이 임박하여 고궁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싶은 욕망을 뒤로하고 멋진 나무들과 작별인사를 한 뒤, 미술관으로 달려갔습니다. 궁전 서쪽에 우뚝 솟은 지극히 서양적인 석조건물의 미술관은 이질적이면서도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죠.
사전예약으로 빠르게 입장한 미술관 안은 제법 많은 관람객으로 북적이고 있었습니다. 작품들은 1, 2층에 각각 총 4개의 섹션으로 나누어 전시되어 있었는데, ‘밀레를 사랑한 소년’, ‘미군과 전람회’, ‘창신동 사람들’, ‘봄을 기다리는 나목’이 각 방의 제목이었죠.

오래된 화강암의 표면 같은 화면
박수근 작품의 가장 큰 표현상의 특징이라고 하면 단연 화면의 질감과 색깔일 것입니다. 물감을 겹겹이 쌓아 올린 표면의 돌 입자와 같은 입체감과 흰색, 회갈색, 황갈색으로 이루어진 토속적 색채는 동서양의 그 어느 작가의 작품과 다른 독특함을 지니고 있죠. 이러한 특징은 사진이 아닌 실제 작품을 보는 가운데 확연하게 드러났고,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작가 자신이 밝힌 것처럼, 화강암 석탑의 아름다움을 담아내고 있는 이 표면은 아마도 작가의 어린 시절부터 아주 익숙한 질감이었을 것입니다. 작가의 고향인 양구는 넓게 퍼진 화강암지대 위에 있었고, 어릴 적부터 화강암에서 부서져 내린 회갈색, 황갈색 마사토 위에서 뛰놀며 그 위에 그림도 그렸을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생명력 넘치는 단순함
그의 작품에 대부분 원근법도 없고 사물의 형태도 아주 희미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배경을 빼고 스케치만 놓고 본다면 아주 단순하고 재미없는 그림일 수 있지요. 당연히 인물의 얼굴에 눈, 코, 입만 간신히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마저 생략되어 있는 작품들이 수두룩하죠. 그런데도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인물의 표정뿐 아니라, 감정의 흐름까지 읽을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화면의 질감과 색깔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마치 오래전 암각화를 보는 것처럼,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자취를 고스란히 느끼는 것이죠. 그래서 그림을 보는 순간 해방 이후 6.25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살아가는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의 힘들지만 성실했던 삶의 역사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치 빨래 빠는 어머니의 터진 손등과 실직자들의 허망한 눈빛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모든 풍파를 뚫고 나아가는 거칠고 투박한 사람들의 모습은 감상하는 이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기까지 했으니, 밀레의 만종과 같은 작품을 그리고 싶어 했던 작가의 어릴 적 꿈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겠지요. 박수근 화가는 이 모두를 어둡지만 따스한 대지를 품은 화면의 색조와 삶의 모든 풍파를 모질게 이겨낸 듯한 질감의 화면 속에 깊이 담아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1962년, 캔버스에 유채 130x89cm 나무와 두여인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작가의 눈길
소박하고 거칠지만 따뜻하고 부드럽기까지 한 작품들의 특징은 박수근 화가가 가진 성품과도 관련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서양기독교가 퍼져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양구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정신적 유산을 따라 기독교적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려내려고 했습니다. 그와 친하게 지냈던 소설가 박완서는 박수근에 대해 ‘어리석지 않게 선량한 눈을 하고 상심이 짙게 밴 음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그의 그림에서 나무들은 잎새 하나 없이 벌거벗은 채로 서 있지만, 그 아래서 묵묵히 아이를 키우고 일터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언제가 찾아올 따뜻한 봄을 기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50~60년대 격변의 시대를 살아갔던 모든 사람의 힘겨운 삶에 따뜻한 소망을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그 속에는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못한 가운데 늘 미술계의 주류가 아닌 변두리에 서 있었기에 힘들었던, 그래서 말년에는 술에 의지하여 살아가야 했던 작가 자신도 놓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전시회가 중장년의 사람들뿐 아니라,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시대적 혼란 속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도 깊은 공감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기다리던 따뜻한 봄은 어디에 있는가?
그 따스함을 발견하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핑 도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과연 우리는 작가가 바라던 그런 봄을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 만들고 있는지 생각할 때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으로 놀랍게 성장했지만, 점점 더 이기적이고 분열과 대립이 첨예화되는 이 사회와 제대로 된 준비 없이 맞이하는 AI와 우주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새롭게 할 수 있을까요? 

 

어메이징 스페이스 대표 고종훈
010-6378-1349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46>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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