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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두 파도 속에 삼키어진 천재 음악가 프로코피에프의 자화상 -‘피터와 늑대’(1936)를 들으며

2022년 3월호(149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2. 3. 26.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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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두 파도 속에 삼키어진 
천재 음악가 프로코피에프의 자화상
-‘피터와 늑대’(1936)를 들으며

 

혹시‘제 발로 찾아온 사슴’이라는 이솝우화를 읽어 본적이 있나요? 사냥꾼에게 쫓겨 다급해진 사슴이 자유롭게 숨을 수 있는 산이 아닌, 외양간으로 숨어들었다가 집주인에게 손쉽게 잡혀버린 이야기죠. 외양간의 황소가 빨리 산으로 도망가라고 주의를 주었음에도 여물까지 얻어먹다 시간을 놓쳐 버렸으니, 제 무덤을 판 어리석은 사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은 이 사슴과 같은 불쌍한 신세가 되어버린 한 천재적인 음악가의 작품 하나를 소개하려고 하는데, 바로 소련의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Sergei Prokofiev; 1891~1953)의 ‘피터와 늑대’입니다.


자유의 기회를 걷어 찬 프로코피예프
1917년, 기울어져 가던 러시아 제국을 끝장낸 볼셰비키 혁명은 소비에트 정권을 세웠습니다. 러시아 사회 전체를 휩쓴 혁명의 폭풍은 서양음악의 변두리에서 이제는 새로운 음악의 중심으로 자리 잡아 가던 러시아 음악에 있어 엄청난 재난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라흐마니노프와 스트라빈스키와 같이 눈치 빠르게 서방세계로 탈출한 음악가가 있는가 하면, 쇼스타코비치와 같이 소련 안에 남아 역사의 폭풍을 고스란히 온 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음악가도 있었죠. 프로코피예프의 경우는 조금 특이한데, 한마디로 주어진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사랑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란 프로코피예프는 5살 때 피아노곡을 작곡할 만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그 후 파격적인 음악형식으로 꾸준하게 명성을 쌓아갔던 프로코피예프는 자신 앞에 들이닥친 혁명의 결과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소련인민위원의 허락을 받고 미국으로의 연주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이러한 결정은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징집을 피하기 위해 음악원에 돌아와 오르간을 연구했던 그의 과거 행적을 비추어 볼 때, 다분히 격변하는 역사의 고통을 잠시 음악을 통해 도피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실패도 있었지만 미국을 거쳐 유럽에서 제법 성공적인 음악활동을 하던 그는 1936년 그리운 고향, 그러나 실상은 스탈린의 공포 정치로 인해 피로 물들어가는 고통의 땅, 소련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그 결정이 가져올 엄청난 대가를 알지 못한 채 말이죠.


대공황과 향수병이 일으킨 착각 속에 빠진 프로코피예프
지금의 우리 눈에는 중국 시민권을 따기 위해 국적을 포기하는 것만큼, 어리석게 보이는 결정이지만, 프로코피예프가 처한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작곡가라는 분명한 자기정체성을 갖고 있던 프로코피예프는 새로운 자신의 음악을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 싶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그리고 변덕스러운 관객들의 요구를 맞추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연주회를 가져야 했습니다. 피아노 연주에 뛰어난 그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작곡할 시간을 빼앗기는 것은 좀처럼 참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1930년대 초 미국과 유럽전체를 휩쓸었던 ‘경제대공황’의 여파로 모든 작품의 공연이 어렵게 되어 연주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대부분의 러시아 음악가들이 겪었던 고국을 향한 향수병 속에 그의 분노는 폭발하고 맙니다. 그리고 때마침 뻗쳐온 소련당국의 유혹, 새로운 음악의 기회를 주겠다는 거짓된 제안에 혹하고 넘어가지요. 영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극작가 버나드 쇼우(George Bernard Shaw, 1856~1950)가 순진한 눈빛으로 위장한 강철 냉혈인간 스탈린과 그가 연출한 show에 현혹된 나머지 공산주의를 찬미하고 스탈린을 살아있는 예수라고 까지 이야기 한 것을 생각하면, 프로코피예프의 결정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미 1929년, 볼쇼이 극장에 자신의 발레곡을 응시했다가 악명 높은 RAPM(The Russian Association of Proletarian Musicians; 러시아 사회주의 음악가 동맹)의 비평과 반대를 경험했던 프로코피예프였기에 그의 결정은 어리석다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프로코피예프


프로코피예프의 용기, 가장 사랑받는 어린이를 위한 음악이 되다
착각에 빠진 프로코피예프가 어리석게도 소련으로의 영구정착을 결정한 1936년에 쓴 작품 중의 하나가 바로‘피터와 늑대’입니다. 그러니까 이곡은 공산주의 사회의 무서운 실체를 아직 찐~하게 경험하지 않은, 어느 정도의 자유로움 속에서 창작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초기에 극장이 그에게 의뢰한 작품의 스토리는 우리가 가끔 북한의 어린이 만화에서 볼 수 있는 혁명정신에 투철한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도전하는 섬뜩한 것이었죠. 하지만 두 아이의 아버지인 동시에 아이들을 사랑했던 프로코피예프는 아이들에게 오케스트라의 악기의 특성을 소개하고 가르치는 목적을 가진 이 작품이 정치적으로 오용되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이지요. 두 주 만에 완성된 이 작품은 자연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인물과 동물의 모습에 맞춰 너무나 적절한 악기 배치와 음률을 담아내고 있는데,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벤자민 브리튼의 ‘청소년을 위한 관현악입문’과 더불어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사랑받는 클래식 곡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바꿔진 스토리 면에서도 마지막 부분에 늑대 뱃속에서 산채로 꿀꺽 삼켜진 오리의 희미한 외침이 들리는 반전까지 있어 더욱 매력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늑대에게 통째로 삼켜져 신음하고 있는 오리의 모습이 강철괴물의 소굴로 정신없이 뛰어 들어간 자신의 자화상이 될 거라는 사실을 그는 아직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자유롭지 못했던 프로코피예프
다행히 이곡은 소련당국의 매서운 검열을 피해 좋은 반응을 받았지만, 이후 가족을 볼모로 잡힌 채 소비에트 사회주의 정신에 맞는 주제와 형식을 강요받으며 작품 활동을 해야 했던 프로코피예프는 많은 다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평생을 불안과 고통가운데 작품 활동을 해야 했습니다. 소련예술계의 악당, 즈베로프의 탄압으로 동료들이 숙청되고 첫 아내가 감옥으로 끌려가는 고통스러운 장면을 목격하면서 말이죠. 러시아 혁명(1917)과 세계대공황(1930년대 초)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역사적 폭풍,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인간이 만든 욕망의 양극단 사이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도피에서 도피로 끝나버린 그의 선택은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를 괴롭혔습니다. 1953년 6월 5일, 프로코피예프가 죽은 그 날이 바로 스탈린의 사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시체는 스탈린을 애도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과 통제 때문에 뒷골목으로 조용히 옮겨져 초라한 장례식과 함께 쓸쓸하게 땅에 묻혔습니다. 스탈린의 죽음을 애도하며 울려 퍼지는 요란한 정교회의 종소리와 군대의 총포소리에 묻힌 채 말이죠.

 

어메이징 스페이스 대표 고종훈
dyl815@naver.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49>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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