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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화가 ‘리까르도’

2022년 4월호(150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2. 4. 27.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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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화가 ‘리까르도’

 

프롤로그
Ricardo Araya Assler. 아쓸러는 독일인 성. 리까르도의 할아버지가 독일 사람이라고 한다. 그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면 확실히 유럽 스타일이다. 수염이 길 땐, 이미 우리 눈에 길들여질 때로 길들여진 예수상을 닮아 보이기까지 하다.

Plaza de Armas 광장
칠레의 Santiago 시내 중심에는 대통령궁이 있고, 두 블럭 옆엔 Plaza de Armas라는 광장이 하나 있다. 이 곳은 술 취한 자, 외로운 자, 노숙자, 독신자, 여행자, 다리 아파 쉬는 자, 멀쩡한 자, 잡상인, 버스커들의 천국이기도 하다. 상설 체스판이 놓여 있으며, 바로 곁에 팔각정 닮은 구조물도 있다. 여기서 작은 공연이 자주 열린다. 가끔은 세계 정상급의 가수들이 날아와 공원뿐만 아니라 인근 주변까지 관중들로 꽉 채운 대공연도 열리는 광장이다. 또한 빼 놓을 수 없는 풍경 하나가 광장의 화가들.

그와의 만남
20년 전, 광장을 지나가다가 발길을 멈추었다. 그러니까 평상시엔 그냥 지나쳤다는 건데 그 이유는 광장의 화가들이 초상화를 그려준다거나 소위 이발소에나 걸려있을 만한 그림 따위를 그려 내게 별 자극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저마다의 예술성을 몰라본지도 모르겠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의 모습은 다소 남루한 옷차림에 수염이 길었다. 붓을 아주 천천히, 아니 나이프로 따분따분 화면을 채워나가는 모습이 광장의 떠들썩한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평온’ 그 자체였다. 이 때 내 안에서 이런 울림이 있었다. 
“야, 노익호! 그냥 가기 없기. 쟤 그림 사 줘!”

 

풍경, 33cmx55cm, 유화, 1991


진짜 그림을 사다
결국 네 점의 그림을 손에 넣었다. 상인의 감각이 아직 무딜 때였지만, 네 점을 사면 단가가 쌀 거라는 얄팍한 계산은 있었다. 내 안의 울림에 따른다 하더라도 싸게 사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 그리했다. 수중에 돈이 없던 시기였지만 사고 보니 아주 잘 산 셈이었다. 자꾸 쳐다볼 만큼 좋았다. 인쇄가 아닌 진짜 그림 작품을 사긴 난생 처음이었다. 독일 유학 시절, 친구 이홍기씨가 미술품 사 모으는 게 취미라는 말을 해서 그런 사람들이 진짜 있구나 싶었다. 물론 이홍기씨처럼 부자나 가능한 거라 생각했더랬는데 진짜 그림을 손에 넣었으니 얼마나 짜릿했겠는가. 어쨌거나 화가 리까르도와 난 이렇게 만났고 만남을 이어갔다.

쫌 많이 사게 된 이유
그와 얼마나 친하냐는걸 내가 얼마나 그의 작품을 많이 샀는가로 말할 수 있을까? 당시 우리 가족생활 형편상 무리가 따르는 수집이었다. 이건 내가 음악인으로서의 활동을 접었기에, 그래서라도 화가 리까르도가 맘 놓고 예술 활동을 이어가길 간절히 바랬기에 가능했던 일종의 자기연민이었다. ‘내 대신 니라도 예술혼을 불태워다오!’식이라고나 할까. 그에 대해 부러움 반 존경심 반이 뒤섞였었다.

그의 작품을 많이 산 또 다른 이유
내 필생의 꿈은 ‘60살 넘어 까페차리기’였다. 레코드판은 충분히 있고, 사진화보 책도 웬만큼 수집해 놓았는데 남은 건 벽을 장식할 그림 아니겠는가. 온 식구들을 설득했다. 신기하게도 식구들이 다 이해해주었다.


그의 복장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리까르도의 남루해 보이던 의복은 철저히 세팅된 그의 예술가적 품성이 듬뿍 담긴 복장이었다. ‘파스텔 색조’를‘타고 남은 연탄재’같이 밍밍하게 보던 내 시각이 문제였던 것이었다.

그의 부인
리까르도는 젊은 시절 스페인에서 유학을 했다. 그 곳 미술대학에서 스페인여자 까르멘을 만나 결혼하고 이 곳 산티아고에서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다. 까르멘의 그림은 주로 인체 드로잉이다. 작품성이 뛰어나 보이는 그녀의 그림 값은 내가 살 수 있는 한도를 훨씬 초과해 사지도 못했고 값을 물어보지도 못했다. 교수이자 화가라지만 작품의 실제 거래량은 밋밋해서 사는 형편은 그럭저럭이었다.(칠레는 예술가들이 존경은 받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찬밥신세) 

리까르도의 번민
까르멘이 고집불통인 성격 탓에 대작만 그리다보니 리까르도가 쉽게 팔리기를 바라며 당장의 생계를 이어가겠다고 ‘광장의 화가’로 눌러 앉았을 무렵이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쯤이었다. 리까르도가 대작을 못 그리는 게 아니었다. 한 포도주 농장주의 의뢰로 지하창고의 대형벽화를 2주간에 걸쳐 그리기도 했다. 어느 날 그의 작업실엘 가 보았는데 1m×2m짜리 대형 그림이 100개에서 조금 모자라게 그려져 있었다.


생계를 위하여
그의 20cm×30cm짜리 작품을 ‘광장의 화가’로 신분을 바꾸어 광장에서 팔 때는 3분의 1값으로 낮추어 팔고 안 팔릴 경우엔 아주 싸게도 팔았다. 그의 수중에 돈 한 푼이 없을 땐 외상으로 가져가라고 내게 앵길 때도 있었다. 한 번은 장당 백만 페소에도 안 팔겠다던 인디고 블루색의 등대 그림과 발빠라이소 항구 그림(25cm×25cm정도)을 돈이 필요하다며 내게 헐값에 팔았다. 나도 가난할 때라서 예술가에 대한 존경심 따위를 계산해줄 겨를 없이 신이 나서 샀더랬다.

그의 작풍
내가 광장에서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유화만 그렸다. 붓을 전혀 쓰지 않고 나이프로만 작품 활동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몇 년 전까지 수채화만 그리고 있었다.(요즘 무척 친해져서 자주 그의 화실을 방문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꼭 그렇지는 않았다. 광장에서만 수채화를 그렸지 집 또는 여행가서는 유화도 그렸다.) 그의 작풍은 그러니까… 애덜 그림 같았다… 최고의 명필은 어린 아이가 쓴 것 같은 글씨라고 하던가… 굳이 피카소를 들먹여 보자면, 피카소의 평생소원이 아이들이 그린 것 같은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었다고 한다. 화가 리까르도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님, 그림 보는 내 수준이 여전히 미달인 것일까. 그의 그림은 뭐라 할까 추상이나 어떤 사고의 추출물이 아닌 다소 거친 털실로 짠 보송보송한 스웨터라 표현하면 적당할는지. 그의 유화가 마음에 들었던 난 그가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할 때 못마땅했다. 유화에 비해 빨리 마르고 물감도 절약되니 예술이고 뭐고 상업미술로 전환하나 보다 했다. 어느 날 리까르도에게 진지하게 물어 보았다.

나 : “유화하고 수채화 중 어느 게 어렵나?”
리까르도 : “수채화! 유화는 덧칠도 수정도 가능한데 수채화는 수정이 안 되거든.”

그의 녹색시대
사실, 피카소가 주로 청색의 그림만 그렸다던 ‘청색시대’를 보고 나도 한번 멋지게 리까르도의 ‘녹색시대’를 파고 들어가 볼까 했는데 역부족이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음에 써보겠다. 리까르도의 녹색시대란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산티아고 근교인 Boldo라는 곳에서 살 때 그린 그림들을 말한다.(내가 괜히 녹색시대라고 붙여 본 말이다.) 그가 살던 집 주변이 숲이라 이때 그린 그림들의 색은 거지반 다 녹색이다. 

에필로그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무척 많이 있다. 그만큼 그가 좋았고 그의 작품이 집안에 걸려 있을 때 주는 아늑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관련된 무엇인가를 갖고 싶은 건 나만 그런 것일까? 아무튼지 간에 화가 리까르도의 그림 인생에 경탄의 박수를 보낸다.

 

칠레에서 노익호
melquisedec.puentealto@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0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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