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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6, 그들이 말하는 정의란 무엇인가? (김은희, 2022)

2022년 4월호(150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2. 5. 2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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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양반사회》

586, 그들이 말하는 정의란 무엇인가? (김은희, 2022)

한 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도래하는 전환기에, 일단 과거를 정확하고, 정직하게 돌아보는 것이, 아직 윤곽이 드러나지 않은 미래를 조심스럽게 전망함에 있어 아주 중요합니다. 국외적으로 사방이 무시무시한 적들로 둘러싸인 한반도이기 때문에, 어느 민족보다도 국내적 정치 변화에 모든 백성들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완전히 무관심한 두 가지 극단을 벗어나, 매우 슬기롭게 대응해야 난관들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치변혁은 매 10년마다 일어난다는 공식같은 현상이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5년 만에 깨어졌는데, 이것을 어떻게 해석,판단하며 또 어떤 행동을 앞으로 해야 할지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못했으면 이렇게 되었을까 싶기도 하고, 또 정반대로 국민들이 성급한 변화를 요구했다고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판단을 내리는 일에 도움을 받을 디딤돌로, 위의 제목으로 갓 나온 따끈따끈한 책(2022년 3월 4일 출간)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먼저 이 책의 장점(A)을 소개합니다.

A.1. 좌파에 속했지만, 가끔 우파와 좌파의 균형추와 같은 발언을 했던 노무현의 말을 인용함으로 시작해 봅시다(118,117).
“5.16군사 쿠데타가 없었다면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이 민주당 체제 아래서 실행될 수 있었을지 궁금합니다. 이 점에 대해 저는 확신이 없습니다. … 문제는 독재가 발전국가와 경제개발과 분리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소기업과 경공업에 집중한 경제발전의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는데, 우리는 대만과는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이러한 질문의 답을 찾고 싶지만 너무 바쁘고 능력이 없어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 어떤 나라들은 한국의 경제와 민주주의를 일종의 존경심을 가지고 부러움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한 민족의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본인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일에, 우리는 순서에 있어 우선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한 후에 ‘민주적 정치체제를 이룸’으로써,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국가 사례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의 질문을 달리 말하면, 만약 이 순서를 거꾸로 했다면, 과연 격심한 경쟁 체제의 국제사회 속에서 한국은 이만큼의 성공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택한 길은, 매슬로우 심리학의 ‘인간 욕구 충족의 5단계’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난 뒤, 그 다음 단계로 나간, 매우 정상적 길을 택한 겁니다. 이런 가운데 자원 하나 제대로 없는 땅을 가진 나라가 치열한 세계 경쟁에서 이기는 길은 교육 밖에 없었습니다. 유럽과 미국의 교육을 열렬히 흡수한 새 세대는 자연스럽게 자연과학뿐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예술 분야에서 다양한 가치관도 흡수하여 여러 가치관이 공존하는 사회의 기초를 만들었으며, 드디어 정치적으로도 건강한 민주 정치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런 길의 기초를 잡았음에도 독재로 욕을 먹은 박정희는, 자신의 무덤에 침을 뱉으라고 과감히 선언했지만, 정치이데올로기를 만들고 그것을 따라서 정치체제화하지는 않았을 정도로 매우 ‘실용적’이었습니다. 1) 처참한 조선시대 후기역사와 2) 일제 36년의 억압과 3) 1/10의 인구가 죽어나가고 전 국토가 유린된 한국동란을 겪고 나서, 만약 이 순서를 뒤집었다면 과연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지금처럼 성공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민족 모두가 너무나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을까요? 노무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지금의 논지를 따른다면 그렇지 않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A.2. 좌파, 586운동권의 치명적 약점을 다음과 같이 정교하게 지적합니다(12,11) :

“평생 (데모하면서) 의롭게 살아온 운동가들이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의를 위해서 살아온 사람들은 조그만 잘못이 있다고 해서 함부로 대해선 안된다. 또 운동가의 자손들은 자자손손 예우를 받아야 한다. … 박원순 전 시장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내몰았던 검찰개혁과 적폐청산, 한명숙 전 총리의 자서전 발간, 조국의 회고록 발간, 민주유공자 예우법 발의 등에서 … 문제의 인물들이 살아온 내력과 평판을 내세우면서, 그들의 도덕적 우월성과‘역사적 진실’을 강조했다. … (수사를 받아야 할 이들)은 검찰의 수사 결과를 기다리기보다,‘(인간)조국 수호’촛불시위를 통해 더 많은 지지자들을 동원하여 세를 과시하고자 했다. … 위안부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운동가들(윤미향)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 (도구화되어) 변조된다.” 
이어서 이런 현상을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13,10) : “근대시민사회는 도덕적으로 평등하다. 그 어느 집단도 다른 집단에 비하여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상정하지 않는다. … 그들에게(586)정의는 법 위에 존재하는 도덕적 심성의 문제이다.”

A.3. 서양 민주주의에 익숙한 외국인으로서 한국에 오래 살면서 소위 촛불 정권의 출발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영국 저널리스트 마이클 브린이 Foreign Policy에 기고한 내용을 소개합니다(217f.) :

“서구의 법치주의에 익숙한 브린이 받아들이기 힘든, 한국식 민주주의의 특징은, 바로 집단적 존재로서의 ‘국민’이 법 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일단‘국민들’이 분노하게 되면 공정한 법적 절차나 피의자의 혐의를 입증할 객관적인 증거, 피의자의 변호와 인권 따위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국민’은 ‘야수’로 변하고 법을 실행하는 사람들은 야수에 복종한다.‘국민정서법’이 법 위에 있는 한국은 국민을 신으로 모시는 사회이다.”
브린은 미국의 닉슨이 탄핵되고 하야하기까지 무려 2년이나 걸렸지만, 한국의 경우 촛불시위가 시작된 지 겨우 몇 주 후에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고, 그로부터 석 달 만에 헌법재판소가 만장일치로 탄핵을 인용하였다는 사실을 대조시킵니다. ‘국민을 신으로 모시는 사회’가 한국이라는, 섬뜩하고 무서운 브린의 지적에 대해 눈을 감는다면, 아무리 한국의 국력이 상승하는 지금이라 할지라도, 21세기 동안 우리는 재빨리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어서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덧붙입니다(216). “국내 주류 역사학계는 유림의 공론정치를 ‘(한국)민주주의의 기원’이라고 평가한다.” 이런 역사학계의 동향은 동양에서 잘 쓰는 ‘민심은 천심이다’는 개념을 이어받은 매우 위험한 경향임을 잘 지적했습니다. 유림 정치의 폐해가 얼마나 컸던가는, 개화기 조선을 너무나 무능하게 만들어 거의 100년 동안 고통에 빠지게 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소피스트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포퓨리즘이나 다수의 횡포로 무너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고 망해버린 아테네의 역사와 유사합니다.  
또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219). “조선시대의 간쟁처럼 어떤 견해에도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제도는 민주주의에 필요하다(필요조건). 그러나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 ‘충분조건’이란 다음과 같은 것일 겁니다. 즉 지배자가 입법하거나 다수당이 만들어내면 되는 인위적인 법(상대법)이면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결코 변개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 기준(절대법)에 대한 의식,전제 혹은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앞으로 말할 천부인권법, 4대자유법, 삼권분리법과 같은 좋은 관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신뢰,신념 말입니다.
이어서 미국의 한국학 학자 그레고리 핸더슨의 말을 소개합니다(219,221). “한국인들이 단순하게‘다수의 참여를 민주주의’라고 보는 것은 (서구의 민주주의라는 정치에 대한) 문화적 오해에 기인한다. … 한국의 운동권 문화에서는 법을 지키는 것이 정의라는 서구의 법치주의적 정의 개념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덕치를 강조했던 성리학적 통치 이데올로기가 법에 의존하지 않고 백성을 지배하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선명하게 설명하면서 바로 이 책의 단점(B)을 언급하는 것으로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즉 여기서 핸더슨이 말한‘법’은, 동양에서 매우 익숙한 ‘상대법’이 아니라 절대종교적 기초와 역사를 지닌 ‘절대법적 기초’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절대법적 역사를 매우 오랫동안 가진 서양의 ‘천부인권법’이나, 이제는 동양에서도 익숙하게 된 ‘4대자유법’같은 기초적인 법들은 동양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개념들입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는 ‘납치’에 대해 상대법적 전통을 가진 한국에서는 그저 3~5년의 형벌을 말하지만, 놀랍게도 성경은 사형을 언도합니다(출애굽기 21:16).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수여한 가장 중요한 권리가 자유인데, 인간이 다른 인간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그 자유를 준 하나님을 직접 대적하는 신성모독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사형을 선고한 겁니다. 

B.1. 이 책은 절대법과 상대법을 그 기원과 역사에 있어서 구분하여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유명한 함무라비법전의 ‘서언’prologue만 해도, 태양신이자 법의 신인 샤먀쉬가 천하를 통일한 함무라비에게 법을 제정할 권세를 수여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동양은 이런 신 개념은 없고 단지 막연한 ‘하늘’ 개념만 명목상 있을 뿐이고, 결국 어떻게 해서든 정권을 잡은 자가 법 제정권을 절대적으로 장악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더더구나 민주주의 역사를 꽃피운 서양에서는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절대종교인 기독교의 영향을 가졌기 때문에, 서구는 그리스에서는 있지 아니한 위에서 말한 ‘천부인권법’이나 ‘4대자유’나 더 중요한 ‘삼권분립체제’ 등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몽테스키웨가 ‘법의 정신’(1748)에서 말한 이 체제는, 사실 구약성경에서 ‘왕’(행정부)이었던 다윗과 솔로몬이 ‘제사장’(입법부)과 ‘예언자’(사법부)와 함께 역사 속에서, 실제로 경영하였던 국가체제를 현대적으로 재활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즉 현대 서양의 삼권분립체제는 절대종교적 기초와 역사 위에 존재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지만 서양이 세속화되면서 인간의 악함에 대한 염려가 더해지는 가운데 각 부서의 독단성과 타 부서를 지배할 것을 우려하여 ‘상호견제’한다는 의미에서 ‘삼권분립’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원래 목적은 정반대로 ‘삼권협력’하여 하나의 이상적 국가경영을 이루는 것이었고, 실제로 다윗과 솔로몬 80년 치세 동안 이것이 이루어졌음을 역사는 증명합니다.
이렇다 보니 동양에서는 - 현대 한국사회도 그 전통 가운데 있는 - 정권을 먼저 장악하고, 법을 먼저 만들고, 이득을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뿌리 깊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사상과 문화를 포용하는 민주주의라기보다 (정권장악자들이 판단하는) ‘올바른’가치관과 사상만을 허용하는 조선의 정치문화에 가까워지고 있게”되는 겁니다(221). 그렇지만 정권 장악자가 만든 법 위에 어떤 신적 존재나 신적 법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말과 행동에 조심할 수밖에 없고, 자기의 판단에 대해 절대적 자신감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정치적 대적의 의견이라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종교는 역사 속에서의 행위에 대한 영원한 축복과 저주(심판)을 보장하기 때문에 더더욱 자신의 행위에 대해 조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B.2. ‘유사함’(similarity)이 바로 ‘동일함’(sameness)을 의미하거나 ‘역사적으로 직접 연관됨’(historical relatedness)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학의 기본명제에서 벗어났습니다. 
좌파, 586들의 원리와 행동이 조선의 양반사회인들의 그것들과 ‘유사하다’(similar)고 해서, 그것이 바로 이 둘이 ‘동일하다’(same)는 것이 아님은 자명합니다. 특히 그 ‘유사함’은 1)‘같은 공간’(한반도)에 있었고, 2)‘역사적’으로 한국인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동일함’으로 오해되기 매우 쉽습니다. 먼저 이들 좌파는 젊었을 때나 그 이후에라도 조선의 양반사회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배우며 재현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노력한 점은 없습니다. 오히려 한국사학계의 주류에서는 현상적으로 유사하게 보이는 점을 주목하여, ‘역사를 거슬러’anachronistically 민주주의의 모체가 조선에 있었다는 억지 논리를 펴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같은 공간에 또 역사적으로 연관된 한국인들이기 때문에 ‘심정적’으로는 그런 추론을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학문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사학계 주류와 그 주류를 비판할 때 동일한 사실을 사용하는 저자 모두, 같은 논리적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학자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형성되는 기간이 학부 때인데, 아마 저자가‘수학적으로 딱 떨어지는’자연과학의 일종인 의류학과를 졸업한 것과 연관되는 것 같습니다. 나중에 전공을 바꾸어, ‘가능함’(possibility, 약60%) →‘유사함’(probability, 약80%) →‘확정함’(convinced, 약100%)에 이르는, 매우 고통스러운 연구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인문,사회과학으로 방향을 돌린 것이, 이렇게 기본 논리 구성에서의 한계를 드러낸 이유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좌파, 586들은, 오히려, 심정적이 아니라 매우 ‘의식적’으로 마르크스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학습했으며, 그것의 북한판인 주사파의 이론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임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사회구성원을 계급 혹은 계층을 따라 분리하고 나누며 투쟁하게 만들어 격파해서 승리하는 전형적 좌파 전략,전술을 쓰는 겁니다(9). “조국과 윤미향의 지지자들은 현 한국사회의 구성원을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눈다. 한쪽에는 ‘양반’, 즉 ‘사회정의’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며 살아온 사회운동가들이다. 다른 한쪽에는 ‘소인’, 즉 자신의 이익을 쫓는 사람들이 있다. 운동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며, ‘기득권’과 ‘적폐세력’을 모두 포함한다. 이들은 운동가들에게 빚을 졌으며 고로 부채의식을 가져야 한다 라고 지지자들은 말한다.”
그런데 이들이 한국인들을 이렇게 둘로 나누는 것은 현상적으로는 조선시대의 ‘양반과 상놈’, ‘대인과 소인’의 구조와 동일하게 보이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한 사회에서 어떤 공로를 이룬 후에 이런 구분과 대접을 받지 않았던 사회가 역사적으로, 전지구적으로 과연 있었던가요? 오히려 이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심정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한국인으로서 조선시대의 것을 이어 받았기 때문이라기보다, 이들이 젊은 시절부터 ‘의식적으로’ 꾸준히 학습하여 자신의 신앙이 되어버린 마르크스-레닌의 이론에서 연원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저자가 자신의 책에서, 이들 좌파와 마르크스-레닌-주사파와의 관련성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 너무 이상하고 어색합니다. 좌파라는 단어 자체를 아예 쓰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자신의 단 하나의 목표점인 조선의 양반사회와의 연관성으로 논지를 억지로 몰아가는 것은, 심지어 앞에서 언급한 이 책의 중요한 장점까지 훼손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 좌파가 사회를 두 부류로 나누는 것은, 전통적 종교가 가지는 사회통합의 기능과는 정반대로, 계급,계층으로 나누어 영구적 상호투쟁하게 만드는, 이들이 영향을 받았던 좌파의 전형적인 길인 사회분열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들 좌파,586들이 근거한 마르크스주의는, 물질에 대한 정신우위를 주장한 헤겔의 변증법을 뒤집어 물질의 정신에 대한 우위를 말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런 뒤집어진 이론을 마르크스가 만들어낸 것은, 안달복달하면서 재빨리 새로운 것을 제시해 인정 받으려는 유대인 심성이 그대로 드러난 하나의 사례이기도 합니다. 그 뿐 아니라 모든 전통적 종교를 아편으로 규정하면서, 대신 변증법적 유물론을 하나의 절대종교로 삼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들 586들은 대부분 본능적으로 종교에 대적적이고 종교는 아편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심지어 이들이 도덕적으로 실제 잘못한 것을 외부가 지적해도, 자신들은 일종의 종교적 선민이 되었으니(왜곡된 선민사상), 그런 잘못쯤이야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항변하는 모습을 우리는 지난 5년간 보아왔습니다. 정신을 물질보다 우위에 놓는 전통적 종교는 도덕을 고양시키고 사회를 밝히는 기능을 하지만, 뒤집어진 종교로서의 마르크스 철학은, 그 자체의 모든 행위가 종교이자 도덕이자 과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에서의 교정이 불가능하고, 완전히 닫힌 폐쇄된 체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 절대종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인 윤리나 도덕이 불가능한 집단이 점점 되어가는 겁니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반드시 유토피아를 설정하게 되어있는데,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으로 종교이기 때문입니다(K. Mannheim, Ideologie und Utopia 1929). 전통적 종교는 미래의 유토피아를 제시하지만, 그것은 극단적일 정도로 자기 죄의 고백과 돌이킴, 자기희생이나 자기헌신이라는 고통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또 그 노력의 대가는 이 세상 후에 받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정반대로 이 세상의 물질적 성취만 욕구하는 마르크스주의와 그 아류 이데올로기와 같은 유사종교를 주장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확정한 정의만을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은 그 대가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이기적 정치만 할 뿐입니다.    
 
B.3. 가장 근본적으로 저자는 한 사회에 있어서의 종교와 법과 정치의 상관관계에 대해 깊이 고려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국민정서법’이 법 위에 있는 한국은 국민을 신으로 모시는 사회다”라는 브린의 지적은 한국인의 가슴에 오금이 저리도록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된 이유를 저자는 조선의 양반사회 이외의 것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브린이 말한 국민정서법 위에 있어야 할 이 ‘법’이 도대체 무엇인지 밝혀야 합니다. 물론 매우 긴 역사를 지닌 한국도 ‘법’이란 단어와 개념은 진작부터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법은 모조리 창조주이며 영구히 존재하고 모든 법을 주관하는 절대자라는 개념이 없는 가운데 만들어져서, 언제든지 누구든지 변개가 가능한, 일종의 행동규범과 같은 ‘상대법’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법을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가 만든 법에 순종해야 할 존재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일 때에야, ‘절대법’ 개념이 가능합니다. 절대종교의 사회에서 세속사회로 변모해간 영국에서 자란 브린에게 그러면 그‘법’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는 아마 애매하게 ‘천부인권법’, ’4대자유법‘, ’삼권분리법’과 같은 것으로 답할 겁니다. 그렇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이 세 가지라 할지라도 모두 절대종교에서 흘러나온 절대법적 기원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법을 인간 사회에 구현하려면, 매우 다양한 의견을 듣고 토론하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입법(제사장-입법부)하며 집행(왕-행정부)해야 하고, 집행한 후에라도 장단 기간의 결과와 효력에 대한 비판(예언자-사법부)을 듣고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겁니다. 이번 정권교체기는 이렇게 종교-법-정치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자기의 학위논문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부분 사용하였고, 아주 조금만 그것을 한국 사회 가운데, 그것도 논리적 연관성이 떨어진 가운데, 적용한 점이 아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2022년 현재 한국과 세계의 두 사례로 이 점들을 고려해 봅시다. 첫째,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이 추미애 법무부 장관에게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의 부하가 아닙니다.”라고 한 말은, ‘사법부(검찰총장)는 행정부(법무부)에서 독립된 부서다.’라는 주장이기 때문에,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이 원리가 구약성경의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것임은 거의 지적되지 않습니다. 둘째, 러시아 뿌띤의 우크라이나 침공(정치)을, 러시아 민족의 통합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모스끄바 총대주교(종교)는 얼마나 절대종교 기독교가 비잔틴 제국부터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왜곡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다윗(왕-행정부)이 잘못했을 때에 비유를 들면서 “이놈아, 네가 바로 그 악당이라고”라고 지적한 나단(예언자-사법부)의 사례와는 정반대입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segensong@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0>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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