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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뚜벅

2022년 6월호(152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2. 8. 5.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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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뚜벅 

 

어릴 때는 유달리 잔병치례가 많던 나 때문에 어머니는 꽤나 애간장을 태우셨다. 천방지축 버릇없는 나를 보다 못한 오빠들이 계집애가 이렇게 버릇이 없어서 어떻게 할 거냐고 꾸짖기라도 하면 어머니는 그냥 놔둬라, 소가 되던 말이 되던 열 살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기만 해도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주문을 외우셨는데 이렇게 여든까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어머니에게는 기쁨을 드린 셈이다.


세 오빠에 이어 막내로 태어난 나를 고명딸이라고 남들은 다 부러워했지만 다 빚 좋은 개살구였다. 오빠들의 서슬에 눌려 기 한 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잔뜩 움츠리고 살았다. 아버지는 여자가 똑똑하면 오히려 시집살이가 어려울 것이니 바느질하고 살림하는 거나 배우라고 하시면서 더 이상 상급학교 진학하는 것을 막으셨다. 불타는 향학열은 고스란히 접어야 했다. 내 여섯 살 때부터 줄줄이 맞이한 올케들은 가족이면서 때로는 남보다 더 서먹서먹할 때가 많았다. 은근하게 흘리는 눈총이 억울하고 서러워 울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몸이 편치 않으신 어머니가 혹시 마음이라도 다치실까봐 내색도 못 하고 속으로 삭이면서 눈치만 키웠다. 이왕이면 맏이로 낳을 것이지 부모님은 나를 왜 막내로 낳으셨을까 부질없는 원망도 많이 했다. 조카들이 태어나고 내 자리는 점점 뒤로 밀려나기도 했다. 슬프고 외로울 때마다 일찍 떠나간 언니가 보고 싶었다. 내가 여덟 살 때 언니는 열두 살 어린 나이에도 날 극진하게 챙겨 주었다. 오빠들이 눈을 부릅뜨면 나를 뒤로 숨겨 놓고 내가 받을 지청구를 혼자서 도맡아주던 속 깊은 언니였다. 함께 있으면 얼마나 많은 힘이 되었을까? 자매지간에 마주 앉아 흉금을 털어 놓을 수도 있었을 것인데 오늘따라 언니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그러고 보니 내 주위엔 여자가 참 귀하다. 고모도 여자 동기도 없는데 딸마저 없다. 늙으면 딸이 있어야 외롭지 않다는데 그래서인가 내 마음 한구석에선 늘 차가운 바람이 일곤 한다.

여든 번의 여름과 겨울을 지나오면서 한때는 세상을 한 손에 거머쥘 것 같은 어줍은 희망으로 가슴 설레던 때도 있었지만 낭패란 걸 몇 번 거듭하고 나서야 그게 얼마나 맹랑한 꿈이라는 걸 알았다. 꿈은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기까지 여러 번의 좌절과 실망을 거듭해야 했다. 앞으로 어지간한 폭풍쯤은 거뜬하게 견뎌낼 것 같다. 살아오면서 겪은 아픔이라는 게 나를 더욱 굳세게 만들어 준 것 같다.


늙어간다는 것은 자신을 좀 더 깊이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미래의 희망, 오늘이라는 공간에 마음부터 내려놓고 입장부터 바꿔본다. 내 중심으로 바라보면 짜증나던 일상도 입장을 바꾸고 보니 세상이 한층 더 아름다워 보인다. 왜냐고 하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다 그런 거지 그럴 수도 있지 하면 모든 답이 술술 풀린다. 


노후대책도 없이 늙어가는 게 늘 마음에 걸렸는데 뒤집어 생각해 보니 가진 게 없으니 달라고 손 벌리는 이 없어 인심 잃을 염려 또한 없는 것 아니겠는가? 바로 내 마음을 어떻게 컨트롤 하느냐에 따라 속이 편해지더란 것이다. 나이가 가르쳐 준 교훈이다. 그 나이에 밥도 앉아서 받아먹지 못한다고 끌끌 혀를 차는 친구도 있으나 밥하고 살림하는 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특기이니 전문성을 살려 녹 쓸지 않게 하는 것 또한 즐겁지 않으랴? 직장 생활하는 며느리가 일하는 동안 내가 집안 살림을 거들어 주는 것도 아이를 돌보는 것도 건강에 도움이 되고 젊은이는 마음 놓고 제 일을 할 수 있으니 다 보람된 것이라 생각한다. 육아라면 쳇머리부터 흔드는 사람도 있지만 아이를 돌보는 게 그렇게 힘만 드는 게 아니다. 어려운 만큼 내게 돌아오는 것도 많다. 일찍 내 자식을 키울 때 맛보지 못한 재미가 쏠쏠하다. 보면 볼수록 새록새록 예쁜 모습을 보는 것도 나름대로 기쁘고 즐거운 일이다. 더 늙기 전에 실컷 사랑하면서 후회를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유례 시인


십 년만 젊었어도 하며 나이 먹는 것을 서러워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나이를 되돌릴 수도 없지만 다시 젊어지고 싶지도 않다. 산다는 게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는 걸 이미 몸으로 다 겪었으니 더 무슨 미련이 있으랴? 지금이 좋다. 늙어서 좋다. 남편 눈치 살피지 않아도 되고 아이들 학교 보낼 걱정 없는 것도 얼마나 큰 해방인가? 앞으로 남아 있는 날이 얼마나 될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글귀를 되새기며 흔들리지 않고 남은 길을 묵묵히 갈 것이다. 나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넉넉한 인품, 어디에 있든지 남에게 걸리적거리지 않는 깔끔한 성품도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모두를 위하여 기도하는 할머니, 작은 것이라도 베풀고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할머니로 남고 싶다. 여기저기 쑤시고 저리고 몸이 온갖 신호를 보내오고 있지만 맞서 싸우지 않으련다.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 갈 몸뚱이, 요란하지도 추하지도 않게 머물다 이슬처럼 조용히 사라지고 싶다. 이미 밤이 깊었으니 밝아오는 아침을 향하여 남은 길을 마저 걸어가야지 뚜벅뚜벅.

 

울산광역시 부선(扶宣) 김유례 시인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2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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