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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만에 개봉한 이삿짐 속, 추억 공유

2023년 2월호(160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3. 9. 9.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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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만에 개봉한 이삿짐 속, 
추억 공유

 

결국은 스타벅스에 앉아 추억에 젖다
변두리에 있는 집에서 시내 쪽으로 전철로 30분 가면 ‘싼 호아낀’역이 있다. 중간에 갈아타기 때문이지 실제로는 전철로 20분거리다. ‘San Joaquin’ 역에서 내리면 동쪽으로 카톨릭대학교가 있다. 정계진출을 하려면 반드시 필수적으로 나와야 한다는 칠레대학교가 명실공히 칠레 최고의 공립대학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사립 카톨릭대학교가 칠레대학교를 앞지르고 있다.(칠레에도 명문대학교의 순위가 있다) 카톨릭대학교의 정문 바로 맞은편엔 스타벅스가 있다. 칠레라는 나라는 확신하건데 의외로 건전한 내가 재밌게 지낼만한 꺼리가 없다. 고작 우리 동네의 염소까페 아니면 던킨도넛츠점, 아님 30분 떨어져 있는 스타벅스…
스타벅스의 커피 Americano 작은 사이즈의 값은 3800페소다. 칠레의 시간당 최저임금은 한국의 최저임금의 3분의 1이기에 3800페소의 세배인 11400페소인 셈이다.(한국 돈으로 굳이 환산하자면 17100원) 이런 고급 커피숍이 카톨릭대학교 맞은편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카톨릭대학교의 위용, 그러니까 칠레의 빈부와 경제 전반에 걸친 사회구조를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 심지어 카톨릭대학교 안에 이미 스타벅스가 있지만 미어터지면서 바깥에 새로운 스타벅스점을 차린 것이 작년 9월이었다.
스타벅스 얘기를 길게 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5년 전까지 내가 살던 아파트가 스타벅스 바로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파트 뒤쪽 편에 경제사범 형무소가 있기에 다소 칙칙하던 차에 스타벅스의 입주는 대단한 희소식이 아니겠는가! 소위 쌤쌤효과가 있는 거지. 그렇다! 이 아파트의 주인이 나이기 때문에 기분이 너무 좋았다. 까페의 구석에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황홀할지를. 아무튼지간에 스타벅스의 입주 소식은 단독주택에서 다시 ‘싼 호아낀’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싶을 정도로 기뻤다. 고객의 대부분이 젊은 학생들일테니 그 분위기만으로도 내가 젊어질 것이기에. 
그래서 결국은!! 30% 할인이 되는 월요일, 1월의 임시공휴일 날 스타벅스에 앉아 추억에 젖는다.


추억 소환, 베를린필하모닉 홀에서 있었던 음악회 팸플릿!!
얼마 전 창고에서 베를린필하모닉 홀에서 있었던 음악회 팸플릿을 뭉텅이로 발견했다. 그러니까 24년 만에 개봉한 이삿짐이 있었다니… 난 게으른 사람인가 아님 보관형 인간인가. 독일 사람들은 버리지 않고 평생 모은다고 들었는데 나도 7년 반을 살았더래서인지 이 끔찍한 습성을 배웠다. 주말마다 학생 기숙사의 같은 방에서 생활을 같이 한 Jens는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다. 어느 날 버릴 거 버려주었더니 고맙다고 했다. 그럼, 게을러서 버릴 것조차 안 버리고 있었다는 얘긴데… 아무튼 편지 봉투며 추억이 묻어있는 어떤 것들은 절대 버리지 않더라. 
이 팸플릿 뭉텅이를 발견하면서 몸서리치게, 째지게, 우야당간에, 넘치는 쾌감에 젖었다. 왜 그랬겠는가. 팸플릿에 그때의 감흥을 깨알 같이 적어 놓은 글 때문이었다. 기억과 실제가 깜짝 놀랄 만큼 달랐다. 아니, 기억의 많은 부분이 소실된 것이지. 속기로 휘갈겨 쓴 글들을 읽으며 행복감에 젖었다.
1993년 1월 20일 저녁 8시, 베를린필하모닉 홀에서 지휘자 베르나르트 하이팅크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2번(부활)를 공연하는 연주회 팸플릿이었다.
“군중심리일까. 너도나도 표를 사는 바람에 가장 비싼 A석을 덜컥 사게 되었다. 56마르크였으나 그나마 어학학원 등록증이 학생증으로 인정되어 50%할인이 되었다. 28마르크가 절약본능에 쩔은 나에게는 대단히 큰 금액이지만 그래도 이게 웬 떡이냐! 하여튼 전에는 상상도 못할 28마르크나 주고 샀으니 본전을 뽑도록 하자!”라는 결의에 찬 각오도 쓰여 있었다. 

팸플릿 앞표지에 감격에 겨워 표딱지를 풀로 붙여놓음


잠깐 그 날의 사연을 소개하자면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년, 12월호(제110호)에 ‘가슴이 따뜻한 남자, 베르나르트 하이팅크’라는 제목으로 [칠레통신 노익호의 지휘자 이야기 7]이 소개되었었다.
“…여동생이 친구들을 초대했다고 오빠인 저더러 네 시간만 나갔다오면 안되겠냐고 해서 시간을 때우려고 ‘베를린필하모닉 홀’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날따라 가격이 저렴한 학생할인표가 매진되었고 S석만 남았는데 반값으로 준다고 해서 고민하다가 일단 샀습니다. 그리고 보았고 들었지요. 베르나르트 하이팅크가(왜 제 눈엔 미국사람 처럼 보였는지 모르겠네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당시 최고로 인기 있는 몇몇 성악가들과 무대 뒤를 꽉 채운 합창단원들과 연주한 곡이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이었던 겁니다.”
중략
“…그렇게 하이팅크는 격렬하고도 침착하게 말러의 교향곡 2번을 끝내고 무대 전면의 왼쪽 출구로 나갔습니다. 또한 저도 모르게 빨려들 듯이 뒤 따라 갔습니다. 그는 대기실로 들어가 잠깐이라도 숨을 돌리려는 듯 급히 걸어갔습니다. 저는 “하이팅크!”라고 불렀고, 그는 돌연한 저의 등장에 멈칫했으며 “라디오 인터뷰?”냐고 묻지를 않겠습니까.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그제사 깨닫고 손을 저으며 돌아 나왔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고, 손에 들고 있던 프로그램에 인쇄되어 있는 그의 얼굴 사진을 펼쳐 사인을 해달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그가 글쎄 품에서 만년필을 꺼내어 사인을 해주더군요. 따뜻한 가슴에 있던 만년필로 말입니다.”


다시 팸플릿으로 돌아와서
4쪽을 보니 “해도 해도 너무한다. 그동안 내가 경험한 것은 너무나 미약한 것인가? 아직도 멀었는가? 하이팅크의 지휘는 ‘혀를 내두른다’고 해야 할 지경이다. 1악장의 격정 속에서 엄격한 비트와 그러나 역시 거장답게 통제를 하면서, 이 통제는 바로 두 발바닥에서 나온다. 꾹 참고 폭발하려다 말듯할 듯 두 발바닥을 땅에(지휘대에) 꽉 붙여놓고, 상체를 휘저으면서 기가 막힌 박자를 끌어내는데, 이건 완전하고도 적확하게 -꼭 음하고 맞아 떨어지는 genau(정확히)- 격정을 표현하는 것이 그의 붉어지는 얼굴에서 통제와 절제를 또한 느낀다. 이제 더 못 참고 무릎을 주리주리하면서 몸을 웅크리고, 이제 곧 최고의 격정을 표현하기 바로 직전의 짧막한 pause(쉼, 감추인 약한 소리 말이다~)때 발을 떼고 다시 제대로 밟고 난 후,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온 몸을 휘젓는다.”
그 때의 감흥을 워낙 빨리 글로 썼기에 어법이 틀렸지만, 고치지 않고 썼다. 
팸플릿 14쪽에는 “세상에 알토 소리가 이렇게 아름답냐! 나는 뭐 세상에 태어나길 무조건 감격하라고 태어난 것 마냥 감격할 것이 너무나도 많이 남아 있음에 정말이지 하나님께 감사한다.”
“탄호이저(바그너의 오페라)를 느끼는 무반주 사성합창, 과연 이것이 오리지널 합창의 진수구나!! 합창 소리가 이렇게 아름답다니, 나 오늘 여러 번 뽕 갔다 온다!”

하이팅크의 자필 사인


맺음말
창고에, 서랍에, 혹은 책장에 넣어둔 물건들이나 책들을 못 버려서 고민된다 할 것도 아니다. 어느 날 날 잡아서 정리하다 보면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현장으로 데려갈 무언가를 만날 수 있기에 말이다. 한번 뒤집어 엎어보시라! 

 

칠레에서 노익호
melquisedecpuentealto@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60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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