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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 정권찬탈자들은 어떻게 종교(신도)를 정치에 이용하였나? (2)

2018년 2월호(제100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2. 2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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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슈를 통한 일본 사후여행으로서의 연구]

메이지유신 정권찬탈자들은 어떻게 종교(신도)를 정치에 이용하였나? (2)


  지난해 봄, 일본 큐슈를 돌아본 우리는 일본의 역사, 종교, 정신을 향한 상상에서의 여행을 계속하는 중입니다. 2018년 1월호에 일본이 가장 자랑하는 역사인 메이지유신에서 근원적 역할을 했던 종교, 즉 전형적 일본종교인 신도를 다음과 같은 주제로 다루었습니다. :

  A. 메이지유신 신도의 정의

  B. 일본 역사 속에서 형성된 정치와 종교의 다양한 관계들 

  C. 고대일본에 나타난 종교의 정치지배[외적]-정치의 종교지배[내적]의 모습


  이어 이번 2월호에서 다룰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

D. 중세와 근세에 신도가 다른 종교(불교)와의 만남 속에서 만들어간 자기 정체성

E. 메이지유신이 고대신도를 이용하여 새롭게 창조해낸 종교인 국가신도의 전개과정

  F. 절대종교적 성격을 지닌 국가신도와 절대종교 기독교와의 세 번의 대결

  G. 가장 현실적이고 중요한 질문 : 일본은 또 다시 아시아에 피의 광풍을 몰아치는 

  역사를 재현할까?(2018년 3월호)



D. 중세와 근세에 신도가 다른 종교(불교)와의 만남 속에서 만들어간 자기 정체성


  일본의 고대신도는 ‘정령숭배’(animism)와 같은 원시종교인데, 그 이후의 일본 신도는 그것을 극단적으로 몰아 물질 뿐 아니라 떨어지는 낙엽이나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도 신으로 숭배할 정도였습니다. 가장 극단적인 것은 천무(天武)천황을 ‘아마테라스오미가미’와 ‘현인신’으로서 숭배하는 종교-정치가 병합된 철저한 신정정치체제를 만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천황교를 수립함으로 의도했던 중앙집권체제는 천황이 철저히 정국을 통제하지 않는 이상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었고, 이런 사실은 하나의 과거의 체제로 남았을 뿐입니다. 오히려 천무천황 이전에 백제를 통하여 들어와서 쇼토구(聖德) 성덕태자가 강력하게 밀어붙여 불교의 숭배가 일반화되었습니다. 중세 초기인 헤이안(平安)시대에서 중세 기간 동안 중국에서 건너온 불교는 중국문화의 우월성과 함께 종교적 우월성을 일본에서 누렸습니다. 불교의 이런 막강한 문화적, 종교적 영향력 아래에서 원시적인 단계에 머물렀던 일본의 고대 신도는 자신의 정체성을 낮은 단계에서부터 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흘러가는 동안 신도는 불교에 대해 독립적으로 사고하면서 점차 불교와는 분리된 자신만의 정체성을 형성해 갔고, 드디어 메이지유신기에는 ‘국가신도로서의 천황교’라는 ‘조작한 절대종교’까지 창조해 내었습니다. 


1) 초기에 신도는 ‘막강한 불교의 권위 앞에 납작 엎드린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심지어 일본의 고대 문서를 보면 어떤 일본 천황은 자신이 ‘신실한 불자’라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먼 훗날에 이르러서 이런 기록들을 지우려하거나 모른척하려고 무척 노력하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대에 지어진 불교의 화려하고 장엄한 사찰들은 거의 불교가 득세한 중세에 지어진 것들입니다. 불교의 종교적 권위에 눌린 천황을 비롯한 황실이나 귀족들, 혹은 쇼군들의 적극적 지원 아래 세워진 것들이지요. 불교의 이런 막강한 영향력 때문에 일본의 전통적 종교인 신도의 신사 한쪽에 불교사당을 마련하는 경우가 많이 생겼습니다. 신사가 불사를 보호하며, 신사의 신들은 ‘부처의 종’으로서 자리매김이라도 하겠다는 의미에서이지요.


2) ‘신불습합’(神佛習合)이 서서히 일어났습니다.

  그러다가 역사가 서서히 흘러 중국과의 연관이 약해지면서 일본에서 불교의 영향력도 약해졌고 이어 종교계에서 일어난 것이 바로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는 경향입니다. ‘신(神)도’와 ‘불(佛)교’가 서로 배우면서 합쳐진다는 뜻이지요. 다시 말하면 신도의 신들이 불교의 (아미타)여래와 같다고 여긴 겁니다. 초기에는 ‘불주신종’(佛主神從) 즉 불교가 우선하고 신도가 따르는 형태를 가졌는데, 이것은 ‘타자(불교)경험을 통한 자기확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끼기’, 좋은 말로는 ‘편집’에 능한 일본인의 기질을 따라서 자신을 낮춘 가운데 ‘불교 베끼기’를 한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경향과 정반대편의 대척점에 선 것이 바로 시간이 더 많이 흘러 나중에 나타날 ‘반본지수적설’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나타난 ‘불주신종’이 아니라 그것을 뒤집은 ‘신주불종’(神主佛從)의 형태로 ‘타자(불교)부인을 통한 자기확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박규태). 신도가 이렇게 두 단계를 걸치면서 발전한 근거는 딱 하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사기]와 [천황정통기] 등의 고대 일본문서에 잘 나타난 ‘천황신화’입니다. 이 ‘천황신화야말로 일본의 신사와 신기신앙에서 불교사상에 대항하고 나름대로 자기주장을 전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이론적 근거’가 되는 겁니다. 먼 훗날 이 ‘타자부인을 통한 자기 확인’이라는 일본인 특유의 심리기전으로 타자를 향하여 끝까지 밀어붙인 것이 메이지유신의 천황교의 절대종교화이며, 이 제단에 바쳐질 제물이 바로 2천만 아시아인의 목숨이었습니다.

  

3) 나중에 ‘본지수적설’(本地垂迹設)로 더욱 발전하였습니다.

  헤이안(平安)시대 중기나 말기인 10~11세기에는 ‘본지’(本地,인도)에 있는 부처가 일본에 ‘수적’(垂迹)한, 즉 현현한 신이 바로 신도의 신이라는 이론이 유행합니다. 이것이 일본 특유의 한자 표현인 ‘본지수적설’(本地垂迹設)입니다. 그동안 부처 아래에서 섬기는 위치로 자리매김했던 신도의 신들은 사실상 일본에 현현한 부처나 여래라는 해석으로, 일종의 ‘종교적 해석 뒤집기’를 시도한 겁니다. 이런 해석 경향을 따라서 천황숭배의 본 거점인 이세신궁도 ‘내궁’(內宮)에서 섬기는 ‘아마테라스오미가미’를 불교 ‘태장계의 대일여래’(아미타여래, 관음보살, 여성)로, ‘외궁’(外宮)에서 섬기는 ‘도요우케’를 불교 ‘금강계 대일여래’(남성)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경향이 일본 전역의 모든 신사에 펴져나가 거기서 모시는 일본의 여러 신들에게 부처, 보살, 여래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기 시작하였습니다.


4) 뒤이어서 발달한 신도의 이론이 ‘반본지수적설’(反本地垂迹設)입니다.

  중세 기간인 13세기경에 일본 신도에서 본격적인 정신적 자각이 일어나며 이것은 불교와 신도 간의 지위의 역전현상이라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난 핵심 공간이 바로 아마테라스오미가미를 섬기는 ‘이세신궁’입니다. 이런 종교현상은 일본이 겪은 역사적 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몽골이 4만 대군으로 1차로 침입한 사건(1274.10)과 14만 대군으로 2차로 침입한 사건(1281.5)은 바로 일본인이 눈을 번쩍 떠서 깨어나는 정신적 정체성을 자각하도록 자극한 겁니다. 그 결과 몽골을 비롯한 외부에서 온 모든 것을 거부하려는 섬사람 기질이 강력하게 발동하였습니다. 몽골을 ‘가미가제’(神風)로 이겨냈다는 신화로 외부적인 것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신도에서 새로운 종교적 정체성을 자각하면서 나타난 종교적 현상이 바로 ‘반본지수적설’(反本地垂迹設)입니다. 이것은 정신에서 물질이 나온다는 헤겔의 이론을 완전히 뒤집어 물질에서 정신이 나온다는 포이에르바흐(Freuerbach)의 주장과 같은 뒤집기인 셈입니다. 즉 ‘본지’(本地)는 신도의 아마테라스오미가미가 있는 일본이며, 인도라는 역사의 현실 속에 실제로 수적(垂迹)한(현현한) 것이 바로 부처라는 겁니다. 이것을 ‘신본불적설’(神本佛迹設)-신도가 본질이며 불교는 그것이 나타난 현상이라는 이론-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불교와 신도의 지위를 완전히 뒤집어 놓은 주장입니다. 이런‘반본지수적설’이 일어나기에 가장 적합한 공간이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천무천황 때부터 만들었던 천황숭배의 기원을 간직한 ‘이세신궁’임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시작한 것이 ‘반본지수적설’ 바로 ‘이세신도’입니다. 물론 ‘이세신도’ 는 이전에 불교계의 천태종에서 변형된 ‘산왕일실(山王一實)신도’와 불교계의 진언종의 별종인 ‘료부(兩部)신도’에 출발점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타자를 거부하는 일본사회의 경향이 종교계에도 옮겨져 ‘신불격리’, 즉 불교를 기피하는 전통이 만들어지고 불교의 중들이 신사를 떠나며 불상들을 신사에서 제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도에 대한 이런 새로운 신학적 해석은 ‘이세신도’의 외궁을 지키는 신관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이세신도의 전통을 중세 후기에 ‘요시다 가네토모’(1435~1511)가 시작한 ‘요시다(吉田)신도’도 공유하면서 본격적으로 일본에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불교가 발생한 인도, 그것을 받아들인 중국, 그 본질을 철저히 찾아들어가는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종교가 이렇게까지 변질되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으며 자폐아적 해석으로 여길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인 해석이 극단적으로 발현된 것이 바로 ‘근본지엽화실’(根本枝葉花實론)이라는 매우 자의적 해석입니다. 일본이 해뜨는 동쪽에 있기 때문에 일본이 ‘만국의 뿌리’(근본)이고 중국은 ‘잎사귀’(지엽)이며 부처가 있는 인도는 ‘꽃과 열매’(화실)라는 거지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뒤집기 해석 경향은 단지 불교뿐 아니라 그 이후 외부에서 들어온 다른 종교들(유교. 도교, 기독교)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근세 후반의 ‘국학’(國學)의 정점에 섰던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한마디로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 ‘유교도 불교도 노장도 모두 크게 말하자면 그때그때의 신도다.’ 상대윤리적 종교이지만 보편적 종교로 여겨지는 ‘유교’조차도 조선의 성리학을 통해서 일본에 들어간 이후 도쿠가와 막부의 지원을 받아 ‘하야시 라잔’에 의해 ‘유교적 관학’으로 변형되었습니다. 그 핵심은 ‘일본이 바로 신국’(神國)이라는 이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자가 폭군일 경우 신하나 백성들이 그를 몰아낼 수 있다는 ‘선양방벌’(禪讓放伐)을 주장한 맹자의 이론은 일본에서는 알레르기적 거부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맹자]를 싣고 일본으로 오는 모든 배들을 폭풍우가 가로막았다는 전설까지 조작해 내었습니다.


  이렇게 외부에서 들어온 모든 종교들은 신도의 신들이 그 곳에 현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정말 엉뚱한 이론이 일본에 나타납니다. 일본인들이 종교를 이렇게까지 엉뚱하게 혹은 뒤집어서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외부의 침입을 받지 않은 고립된 상태로 수천 년을 살면서 그 어떤 엉뚱한 생각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도전하거나 혼내주거나 없애버릴 존재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가라타니 고진). 이렇게 해서 일반서민들은 신도, 불교, 유교가 이렇게 저렇게 합일된 신도를 받아들여서 21세기인 지금도 일본 가정에 신사와 불사를 동시에 모신 경우를 가끔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무사 등의 지배계층은 불교를 배제하고 신도와 유교의 일치를 주장한 신도를 지지했습니다. 그것은 현세초월적 불교보다는 세속의 윤리를 말하는 유교가 지배계층의 현세적 신도의 입맛에 맞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21세기 현재도 보통 일본인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신사에 가서 복을 빌고, 결혼은 기독교식으로 하며, 죽을 때에 불교에 몸을 맡기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5) 이런 경향에 ‘고증학’의 영향이 덧붙여졌습니다. 

  이런 ‘반본지수적설’을 근세에 일본 사회에서 더욱 부추기게 된 것은 유래한 고문서를 직접 살펴서 고증하자는 청나라의 ‘고증학’이 유입되면서부터입니다. 신무(神武)천황이 최초로 일본에 통치자로 등극했다고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주장하는 BC 660년은 부처가 인도에 탄생하기 이전이라는 사실에 일본인들이 주목한 겁니다. 물론 이 두 책, 특히 [일본서기] 권3 ‘신무(神武)천황조’의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전혀 무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 메이지유신의 정권찬탈자들이 앞서 말씀드린대로 ‘종교의 정치지배[외적]-정치의 종교지배[내적]’를 강화하기 위해서 이 신화에 철저하게 근거해서 근대 일본에 적용한 것입니다. 메이지유신이 시작된 직후인 1872년 2월 11일(현대력 3월 7일)이 초대천황인 신무(神武)천황의 즉위년인 일본력 ‘황기’(皇記)의 원년으로 삼고, 그 즉위일을 ‘기원절’(紀元節)로 결정해 버린 겁니다. 그 당시부터 1945년까지의 일본인들은 이 결정이 실제적 역사 위에 기초했는지 아닌지도 따지지 않고 위에서 결정하니 그저 따랐을 뿐입니다.


▲ 메이지천황의 도쿄순행


6) 일본민중들의 이세신궁을 향한 기이한 참배(‘이세마이리’) 열풍과 지리적 폐쇄성에서 비롯된 자기도취적 성향의 일본인

  이런 학문적 형식을 띈 주장들을 할 수 있는 현실적, 역사적 기초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몇 십 년마다 민중들이 엄청난 숫자로 이세신궁을 향하여 자연발생적인 참배(‘이세마이리’)를 행한 사건입니다. 당시 18세기 일본의 총인구 2천5백만 정도였는데 어떤 경우는 거의 1/5인 5백만이 ‘이세오도리’라는 종교적 춤을 추면서 이세신궁을 향한 순례길에 올랐을 정도입니다. 이 점은 섬사람 일본인의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대중의 갈구가 얼마나 대단했던 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상대종교적 문화 속에서 이렇게 절대종교인 이슬람의 메카를 향한 순례에 버금가는 ‘절대종교적 순례행위’가 일어난 사실은 다른 문화와 종교에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이런 현상을 접하면 ‘얼마나 기이한 현상인가’ 혹은 ‘일종의 광적인 붐’으로 감탄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런 섬뜩한 민족과 나라 바로 옆에 오랫동안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우리는 이런 기괴한 현상 뒤에 있는 일본의 본질을 더욱 더 파고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이런 현상은 메이지 시대 이전까지 지리정치적으로 철저히 폐쇄된 가운데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왕래도 오직 일본 편에서 외부로 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외부에서 일본을 향해서 벌였던 유일한 공세적 접근은 성공하지 못하고 반항심만 불러일으킨 13세기의 원나라의 일본침투와, 그와 반대로 성공했던 미국의 흑선의 위협(1853) 외에는 없었습니다. 이런 철저한 폐쇄성 속에서 일본인들이 몇 천 년을 절대적으로 자기 망상에 빠진 가운데 살아가면서 자폐적 자기 정체성을 조작해내는 몸부림이 이렇게 특이한 종교적 방식으로 표출된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자기정체성을 이렇게 몽환적으로 자각한다면 외부를 향해서도 그렇게 몽상적으로 자각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들 중에서 거대한 나라 중국뿐 아니라 심지어 인도와 미국도 정복하여 지배하자는 가당치도 않은 주장들이 막부 말기와 메이지 시대에 분출하곤 했던 겁니다. 심지어 아무리 외국에서 오래 유학하고 일본으로 돌아온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외부의 좋은 것을 겪고, 보고, 배운다 하더라도 결코 그 본질은 절대로 건드리거나 배우지 않고 단지 그 껍질만 취하고 속에는 일본적인 것을 절대적으로 고집하는 경향 때문입니다. 지리정치-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지리정치적 폐쇄성’에서 나온 ‘자기도취적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고 매우 균형 잡히고, 넓고, 깊은 관점에서 사물과 역사를 바라보는 분들을 개인적으로는 많이 만나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특히 메이지-다이쇼-쇼와 시대(1868~1945)를 살아갔던 대부분의 일본인의 성향이었고, 그 결과 일본 전체의 역사는 그렇게 자기파괴적, 타자파괴적으로 흘러가 버리고 말았으며 일본이 타자를 향해서 나올 때에는 항상 이런 모습일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7)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는 ‘국학’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런 외부배척적이며 일본국수적인 경향들은 학문적으로 근세인 도쿠가와 막부 후기에 접어들면서 일기 시작한 ‘국학’(國學)열풍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를 질문한 후에 내린 결론은 바로 ‘아마테라스오미가미와 천황의 유일성의 숭배’에 돌아가는 것 밖에 없다는 겁니다. 국학을 일으킨 가장 중요한 인물은 [고사기]를 자신의 일생을 관통해 연구하여 국학의 근본을 찾아나간 ‘모토오리 노리나가’(1730~1801)나 일본이 유일한 ‘신국’(神國)이라고 주장한 ‘히라타 아쓰타네’(1778~1843)입니다. 특히 ‘노리나가’는 고사기에 주장된 현인신인 천황에게 제사지내며 일본에 복종한 천하의 모든 신하들이 각자의 신분에 맞게 그의 명을 받들어 섬기는 것을 ‘스카에마쓰루’(奉仕)봉사라고 정의했습니다. 그야말로 천황을 섬기는 정치가 종교의 전부를 지배해버리는 ‘천황교’를 절대적으로 섬기는 ‘국가신도’의 기초를 놓은 겁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segensong@gmail.com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100호 >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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