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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268년 동안의 중국 통치를 가능하게 했던 만주족 청나라의 제도적 기초 : 팔기제도

2018년 9월호(제107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9. 8.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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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정치제도 연구]




무려 268년 동안의 중국 통치를 가능하게 했던

 만주족 청나라의 제도적 기초 : 팔기제도





 압록강 북쪽에 거주하던, 조선인보다 훨씬 숫자가 적었던 소수의 유목민족이 청나라를 이루어 조선의 조공을 받으며 거대한 인구의 중국을 268년 동안이나 통치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요? 3억의 인구 청나라에서 만주족이 차지했던 비율은 한족의 1/350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일당 삼백 이상을 감당해내며 한족의 청제국이 아닌‘만주족의 청제국’으로 만들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팔기(八旗)라는 정치사회군사가 일체화 된 시스템 때문입니다. 


 유목민족의 자연스러운 삶에서 탄생하여 가장 발전된 형태를 이룬 팔기제도


 중국 북방에 거주하던 유목민족들의 역사에서 군대는 정치조직이자 곧 사회, 생활조직이었습니다. 유목민들은 주로 목축이나 사냥, 약탈로 식량을 조달했기에, 부족 전체가 전투병력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후의 유목민족인 청나라가 이룬 팔기 뿐 아니라 이전 유목민족의 역사를 보면 여진족이 세웠던 금나라의 맹안모극제,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의 만호부 또한 그들 자신의 유목민족 전체를 군사화했던 총체적 조직입니다. 

 청나라 팔기 제도는 시조인 누르하치가 다양한 여진족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여진족 고유의 사회 조직을 기(旗)라는 명칭의 군사 집단으로 편성하여 만주족으로 재탄생시킨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누르하치가 이 제도를 창시했을 무렵(1601)에는 황(黃), 백(白), 홍(紅), 람(藍)의 4기였으나 나중에는 정황, 양황, 정백, 양백, 정홍, 양홍, 정람, 양람의 8기로 개편(1615)하였습니다.

 만주족이 중국을 제패한 이후(1644) 팔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기능 모두를 결합시킨 복합적 제도로 발전하였습니다. 하나의 기 안에는 병사, 관리, 노예 등 남녀노소 및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기인은 3년마다 호구조사를 하여 팔기호적에 등록되었고, 출생, 사망, 결혼, 입양 등 기인의 거주와 고용에 관한 변동사항은 모두 각 기와 중앙의 황제에게 보고되어야 했습니다. 


 만주족과 몽골족, 한족 모두로 확장된 팔기제도


 청의 전신인 후금이 요동으로 진입하여 팽창하면서(1621) 수많은 한인이 여진 칸의 직접 통치 아래 들어왔고, 토지와 가옥이 부족하진 누르하치는 만주족과 한인의 통합정책을 도입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만한일가(满汉一家)’의 이데올로기로 발전했습니다. 이것을 일본이 흉내낸 것이 ‘내선일체’입니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았습니다. 초기(1623)에는 한인의 극심한 반란이 일어나서 여진족의 물과 음식에 독을 풀어서 복수하려는 시도까지 있었습니다. 청의 통치자들은 과거 중국을 석권했던 유목제국인 금과 원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금은 여진족과 한족을 분리시키는 경계가 무너져 민족 정체성이 희석되어 멸망했고, 원은 만주족과 한족을 너무 구분하는 바람에 한인의 지지를 잃어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누르하치를 이은 홍타이지(청태종)는 만주족 통치하의 청나라 속에 생길 수 있는 다민족간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팔기제도를 몽골족과 한족에게도 확장하여 총 24기까지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다른 민족 간에 고도의 협동이 가능해졌고, 그러면서도 정치적인 이해관계에서 만주족의 우위가 성공적으로 유지되었습니다.


  청나라 초기의 ‘삼번의 난’과 같은 혼란의 시기가 지나가고, 안정적이고 효과적인 중국통치를 위해 팔기부대를 각 지방에 파송하여 거주하게 합니다. 이것이 소위 주방제도입니다. 각 지역의 핵심도시(주방)에는 민간행정을 담당하는 한인 총독과 군사조직인 팔기 병사를 거느린 만주족 기인 장군이 각자 분야를 책임지고 관할하였습니다. 장군은 실질적으로 총독보다 위에 군림하면서 만주족의 기인들이 한인을 다스리는 체계가 확립되었습니다. 이 주방제도를 효과적으로 가동하기 위해서 청나라 4대 황제인 강희제는 주접제도(奏摺制度)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주접은 비밀편지형식의 보고서로 황제가 장군들과 주고받았던 긴밀한 연락수단이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청나라 황제들은 그 이전의 유목민족 국가 황제들의 습관을 따라 중국 전역으로 순행을 다니면서 기인들과 주접을 주고받음으로 나라 곳곳을 상세히 알아가며 중앙과 지방을 하나로 통일하여 다스렸던 것입니다. 



 팔기제의 몰락과 청나라의 붕괴 


 청태종 즉 청의 둘째 황제인 홍타이지는 중국을 통일하기 전부터 13세기에 망한 같은 여진족이 세웠던 금나라의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았습니다. 금 세종 울루칸은 여진족의 의복과 언어, 궁술과 마술(馬術)의 중요성을 계속 강조했음에도 금나라 후대의 칸들은 한인의 풍습에 빠져 여진족의 법도를 버리고, 금나라 왕조는 결국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청나라는 이전 역사에 찾아볼 수 없었던 팔기제로 국가기반을 다졌기에 중국 북쪽을 차지했던 금에 비해 중국 전반을 지배하였을 뿐 아니라 비교적 오랫동안(268년) 거대한 중국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청나라 역시 다음의 여러 가지 이유로 붕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첫째,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만주족의 법도인 만주어, 활쏘기, 말타기 등이 자취를 감추면서 만주족과 한족의 차이가 사라져 청나라와 만주족의 정체성이 상실되기 시작했습니다. 강력한 팽창정책을 시도한 강희제를 이은 옹정제는 모든 팔기 병사들에게 한어사용을 절대 금지하고 훈련시에는 만주어만을 사용하도록 의무화하며 만주어를 점점 더‘공식’언어로 만들려 노력하는 내실화을 기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통치기간이 짧았던 것 등의 원인으로 그러한 노력들은 크게 빛을 발하지 못했습니다. 청나라 초기의 만주족은 각 개인이 화살을 직접 만들어서 사용했으나 18세기에 이르러서는 활 제작은 커녕 수리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팔기가 무력화되었습니다. 말타기가 약화된 것은 만주족의 사치풍조와도 관련이 있었는데, 기인들이 말이 아닌 가마를 탔으며, 황제가 이를 금지시키자 가마금지령을 피해 마차를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만주족의 총체적 정체성 수준이 저하된 결과 멸망의 길이 시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기인에게 제공되는 무상복지제도와 그 결과로 발생한 청제국 전체의 재정압박이었습니다. 그 당시 기인들은 전혀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었으며, 황실은 그들에게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를 제공하였습니다. 세습제도였던 팔기는 시간이 갈수록 대규모로 발전했기 때문에 팔기 인구에게 상당수준의 지원을 유지하고 군사적 기반시설을 확충하기 위한 지출은 국가 수입의 상당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게다가 기인 가운데 팔기에 속할 자격이 없는 불법 침입자들이 많았다는 사실 또한 위기를 쌓아갔습니다. 후대(1863)에 이르러서야 팔기가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제한은 사라졌지만, 뒤늦은 이러한 대책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 셋째 요인으로는 만주족의 기본적인 특성인 건강한 육체와 막강한 군사력이 사치와 방탕, 부정부패로 처절하게 약화되어 더 이상 청나라를 지탱할 수 없었던 것을 들수 있습니다. 주변 제국들을 정복하던 전쟁이 끝난 후에 오랫동안 지속된 평화의 시대가 오히려 독이 되었던 것입니다. 부유한 관리들은 옷과 말에 사치를 부리며 음주가무로 방탕한 생활을 하고 오락과 도박, 경극을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팔기 장교 일부는 나라에서 지급받은 곡식을 이용해 현금이 당장 필요한 팔기 병사들에게 사들이고 몇 달 후 비싸게 다시 파는 고리대금을 일삼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청나라가 이렇게까지 타락한데에는 만주족이 18~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판도와 문명이 변화하는 것을 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는 이미 15세기부터 말을 타고 육지를 정복하던 시대에서 변화하여 배를 타고 바다를 정복하는 대항해시대로의 전환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된 세계 속에서 만주족도 마상궁술(馬上弓術)이 아닌 대양을 가로지르는 배를 조정하는 기술을 준비해야했지만, 만주족마저 정주민족인 한족의 헛된 이데올로기인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에 빠져 유럽과 무역을 하며 꾸준하게 교류가 있었음에도 전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청나라 전체에서 중심이 된 만주족의 이런 정신적(내적), 군사적(외적) 타락과 부패 때문에 중국은 아편전쟁(1840) 이후 무려 100년이 넘도록 고통스러운 역사적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지팜 연구원 이송아
ssongahlee@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07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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