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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삼국(한·중·일)의 맹자 왕도사상 수용/거부가 초래한 상이한 정치적 결과와 21세기 현재까지 미치는 영향

2018년 9월호(제107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9. 8.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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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사상 맹자연구]




동아시아 삼국(한·중·일)의 

맹자 왕도사상 수용/거부가 초래한 

상이한 정치적 결과와

 21세기 현재까지 미치는 영향





한중일의 정치권력 속에서 유가, 특히 맹자사상만큼 심대한 영향을 준 것이 있을까요. 중국 전국(戰國)시대에 맹자는 각국이 힘으로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패자(覇者)가 되려는 패도정치에서 떠나, 인덕(仁德)을 베푸는 왕도정치를 베풀어야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유가가 유교로 발전되며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에 동양의 표준적인 종교 내지 철학으로 퍼져나가면서 유가의 한 유파인 맹자도 수용되었습니다. 그런데 각국은 다른 방식으로 수용/거부하였고 그로인해 정치적 결과도 매우 상이하게 나타났으며 지금까지 각국에 그 영향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아주 특이합니다. 맹자사상을 수용하는 것은 통일의 가능성과 관련된 각국의 지정학적 상황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었다는 점은 놀랄만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동아시아 삼국의 맹자사상 수용과 관련된 세 가지 내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각국이 통일을 이루는데 어떤 지정학적 상황에 있었고 지금은 어떠한가? 

2. 그런 특이한 상황 속에서 각국은 맹자를 역사 속에서 어떻게 수용하였나?

3. 그 수용은 어떤 정치적 결과를 이루었으며 각국의 21세기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



  1. 중국


 1) 아주 거대하지만 쉽게 통일되고 통일의 욕구가 클 수밖에 없는 중국


 아시아의 정반대편에 있는 유럽은 지금까지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럽연합(EU)이 이루어지는 것 같더니, 지금은, 서쪽에선 영국이, 동쪽에선 헝가리와 폴란드가 떨어져 나가려 하면서 그 연합이 깨어질 위기에 처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중국은 진나라의 통일로 치자면 2천 년 전에, 주나라의 통일로 치면 무려 3천 년 전에 통일을 이룬 나라입니다. 이런 차이를 이룬 데에 흔히들 인적 요소(중국인과 서양인의 차이, 종교 철학 차이)에서 그 원인을 찾기 쉽지만 의외로 비인적 요소, 특히 지정학적 요소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유럽은 통일을 가로막은 수많은 산맥과 강들이 있어서 통일이 매우 힘들며 그 필요성과 욕구도 약하였기 때문에 로마의 시저는 일찍부터 그것을 알아차리고 라인강의 갈리아 지방만을 로마의 한계로 정하였습니다. 반면에 중국대륙은 아주 거대하지만, 산만하게 퍼지거나 중간에 산맥과 강이 가로막는 지형구조는 아닙니다. 산맥은 주로 서쪽에 집중적으로 몰려있거나 저 북쪽의 유목지역이나 동쪽의 수렵지역에 퍼져있습니다. 구불구불 흐르는 두 개의 큰 강(황하, 양자강)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 우리의 서해로 빠져나갈 정도로 단순한 구조입니다. 마치 한 덩이의 둥그스름하고 거대한 빵 덩어리처럼 된 땅이기 때문에, 통일이 비교적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지형구조이고, 통일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도 그만큼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땅에서 진나라가 통일하기 무려 천 년 전에, 주나라는 통일을 이루어 종법제도와 봉건제도라는 과거 지향적 제도로 통일을 유지해 본 겁니다. 춘추시대에도 주나라가 약화되었지만 각국은 주나라의 궁극적 통치를 인정하는 가운데 각국이 패권을 다투었습니다. 또 전국시대에 주나라는 더욱 더 쪼그라들었고 궁극적으로는 소멸되었지만, 통일에 대한 욕구가 더 강력해진 가운데 통일을 위한 이론들로 소위‘제자백가’가 나타난 겁니다.   


 2) 맹자의 왕도사상을 근본적으로 거부한 중국역사 


 춘추전국시대 당시에 중국의 사상-철학과 정치의 근본적 고민은 다음과 같습니다. 공자의 근본취지는 주나라 때 이룬 통일을 종법제도와 봉건제도로 유지하였으니 그것을 그대로 하면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문제는 주나라 이후 천년이 지나면서 중국은 인구도, 통치범위도 엄청나게 많아지고 커졌으며 심지어 청동기문화를 지나 철기문화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이전의 사상과 구조로는 새 시대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중국이 전통적 중국철학인 유가를 수용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한나라 무제의 재상이었던‘동중서’가 주장한, 전통을 존중하고, 보수적이며 특히 권위(왕)에 복종하는 유가를 받아들이도록 한 것입니다. 그 이후에 중국은 하나의 종교 차원까지 유가가 승격되도록 모든 정권이 보조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충’(忠) 에 대한 강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바로 유가의 일파인 맹자의 왕도사상입니다. 유가의 시조인 공자는 아직 점잖은 예식이 많이 남아있는 춘추시대에 살아서 그런지, 군군신신(君君臣臣) 군주는 군주다워야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고 애매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살벌한 전국시대 초기를 살았던 맹자는 아주 명확하게 군주가 군주답지 않을 때 신하는 언제든 그 곁을 떠날 수 있다는 왕도사상을 말한 겁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혁명적인 말을 한 겁니다. 즉 정권교체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역성혁명의 원리적 기초를 제공한 것이지요. 이 사상은 중국에 2천년동안 나타난 전제군주의 입장에서는 눈에 가시와 같은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일례로 명 태조 주원장은 맹자와 제자들의 저작인「맹자」에서 관련 부분을 읽고 대노하여 문묘에서 맹자의 사당을 퇴출시켰고, 신하에게「맹자」원전에서 해당 구절을 삭제하라는 명령까지 했습니다. 맹자의 왕도사상과 중국 전제정치는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3) 맹자의 왕도사상이 현대중국인의 정치의식에 미친 영향


 중국이 서양의 도전을 극복하지 못하고 총체적으로 무너진 이후 아직까지 중국의 과거의 역사와 그 의미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가운데 다시 이전의 전제적 상태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적극적 원조를 받았던 장개석과 국민당 정권은 그 내적 부패로 인해 모택동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1949년 이후, 중국대륙은 또 다른 독재-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하지만 실제는 공산당 독재-체제 가운데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맹자의 왕도사상은 왕이 아닌 다른 즉, 백성의 측면에서 보면 민본(정치)사상이 되고, 이것은 어떤 면에서 서구의 민주주의와 맥을 같이 합니다.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공자를 빌려서 중국의 전통과 역사가 얼마나 깊은가를 세계에 선전하지만, 민본사상으로 공산당 독재 자체를 뒤집을 가능성까지 열어놓을 수 있는 맹자의 사상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할 게 뻔합니다. 그렇다면 중국이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사로잡혔다기보다 밖에서 들어온 공산주의는 중국적이 되기에 안성맞춤인 정치체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주선을 태양계 밖으로 보내는 21세기에도 중국인들은 여전히 과거를 건설적으로 정리하지 못하고, 2천 년 전에 통일된 체제 아래서 살았던 사람과 동일하게 정치적으로는 신음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조선


 1)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쉽게 통일되는 작은 나라 


 현대 중국의 하나의 성(城)정도 사이즈 밖에 안 되는 작은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였기 때문에 통일이 쉬워서 1400여 년 전에 신라가 통일한 이후 나라가 나누어진 경우는 세계강대국이 38도선으로 가로놓았던 최근의 역사 이외에는 없었습니다. 중국이나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 정권이 200~300년 기능 것에 비하면 통일된 한반도를 지배했던 신라-고려-조선이 거의 두 배의 통치기간을 가진 것은 이런 점을 잘 반영합니다. 이런 지정학적 구조를 가진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통일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도 상당수의 한국인들 속에는 통일에 대한 의지가 확고합니다. 


 2) 맹자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조선


 새롭게 시작한 나라 조선이 유교를 거의 국교로 받아들인 것은 한반도의 이후 정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려까지만 해도 한반도는 유목민족의 기질을 따라 북방을 경영하려는 의지를 가졌으나, 조선에 이르러서는 전통적·보수적이며 정주민족적 종교인 유학을 하나의 종교로 극단적으로 숭상하기까지 한 것이 근대사에서 경험한 정치적 패착의 근본원인이었습니다. 유학 중에서도 정주민족 정권인 송나라의 주자학을 조선의 국교로 이성계의 책사였던 정도전이 받아들일 때에는 폭력적인 왕권을 제어 할 수단으로 고려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태종 이방원의 거사에서 제거되어야 할 가장 못마땅한 핵심인물이 정도전이었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정도전은 맹자의 왕도사상에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태종 이후에 조선 역사에서 두 번의 왕(연산군, 광해군)을 폐한 것을 비롯한 여러번의 반정과 특히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졸렬한 당쟁을 일으키는 붕당정치를 이루었습니다. 왕들은 그 중에 한 편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 왕권을 유지하려한, 조선 중기-말기의 역사는 이런 맹자의 영향을 잘 보여줍니다. 수많은 토론들이 이루진 것은 좋은 영향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건강한 정치문화 발전에 기여하기보다 궁극적으로는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전락하였습니다. 더 나쁜 것은 내부끼리 싸우는데 온 힘을 다하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국가의 힘을 결집하지 못하고, 늘 새롭게 다가오는 외부의 충격(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강점)에 맥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계속 보인 겁니다. 그런 가운데 진정으로 맹자가 말하는 민본사상은 제대로 성취되지도 못하고 탐관오리들의 학정에 대부분의 백성들이 정권말기까지도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3) 이런 역사가 한국인의 정치의식에 미친 영향


 한국은 동양에서 최초로 여자대통령을 뽑았으며, 잘못한 대통령 여럿을 하야시키거나 감옥으로 보낼 정도로 정의에 대한 욕구가 강하며 민주주의 지수가 높은 나라입니다. 맹자의 영향이라고 보아야 할까요? 그러나 다른 면으로 생각해 보면 중국보다 더 중국적인, 특히 정주민족의 철학, 사상, 문화 등을 절대적 가치로 받아들인 조선 역사의 흔적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외부에서 온 큰 세력을 의지하는 사대적 태도는 현대에 한반도를 나누어놓은 두 세력인 소련과 미국에 대하여서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망해버린 소련에서 수입한 공산주의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극단적으로 발전시킨 북한, 공산주의 패망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이틀만 ‘공산주의’에서 ‘진보’로 바꾼 남한의 좌파, 미국으로부터 배운 서구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가지지만 그동안 한반도를 거점으로 이룬 부를 나라를 위해서 나눌 생각보다 손에 꼭꼭 움켜쥔, 미국 물 잔뜩 먹은 똑똑하고 성공한 우파 말입니다. 이 모두가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모습은 사실 조선시대 당쟁의 모습과 다를 바 있을까요? 그러는 사이에 조용히 잠자던 강력한 네 가지 외부세력은 새로운 힘으로 한반도를 주위로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왕의 인과 덕에 의한 정치적 역할을 말하는 맹자의 왕도사상이 아니라, 왕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누구나 왕이 될 자질이 있는, 어떤 일에 종사하던 관계없이, 국민 전체가 제대로 된 지도자가 되는 혁명이 없으면, 또 다시 불행한 전철을 반복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3. 일본 


 1) 지정학적으로 통일이 어려운 북동-남서로 길게 뻗은 일본


 일본은 인구, 크기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에 있어서 한반도의 두 배 정도 됩니다. 그런데 섬나라이지만 지리적으로 삼각형의 빗변처럼 길게 누워있기 때문에 규슈에서 홋카이도까지의 통일은 매우 더딘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메이지유신 이후에야 비로소 홋카이도 경영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을 정도니까요. 이런 가운데 최초의 통일은 천황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당나라에서 수입한 중국식 율령제도를 통해서 유지되긴 했지만, 이런 지리적 산발성 때문에 실질적인 통일은 늘 칼을 쥔 세 막부(가마쿠라, 무로마치, 도쿠가와)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막부들 사이에 있는 전국(戰國)시대나 막부시대를 끝낸 메이지유신도 역시 무력에 의한 통일의 형태를 띠었고, 그 이후 일본의 세계를 향한 팽창도 무역을 통한 상업적인 형태가 아니라 무력을 통한 것이었다는 점은 이런 일본의 지리정치적 성향을 반증합니다.


 2) 맹자의 왕도사상을 극렬하게 거부한 일본


  일본은 초기부터 맹자의 왕도사상이 자신들에게 본질적으로 거부감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직감하였습니다. 천황의 가계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고 자랑할 정도로 보수적인 일본인에게 왕이 신하에 의해서 바뀔 수 있다는 주장은 경기를 일으킬 만한 것이었기에 맹자라는 책이 일본에 올 때에 일본을 지키는 신이 태풍이 일어나게 해서 배가 뒤집어졌다는 이야기를 만들 정도였습니다. 물론 요시다 쇼인이 도쿠가와 막부를 뒤집기 위해서 영악하게 맹자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쇼군은 오랑캐를 정벌하라고 조정으로부터 임명을 받은 직책인데, (서양 오랑캐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무력(無力)한 쇼군과 막부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역설한 겁니다. 그는 막부를 타도하는 동력을 초망(草莽), 즉 민초(民草)들로 규정했습니다. 쇼군이나 다이묘(大名·제후), 상급 사무라이들은 믿을 만한 존재가 못되니, 민중을 각성시켜서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메이지유신을 완성시키고 정권을 오랫동안 장악한 사람들은 죠슈번이나 사쓰마번 출신의 하급사무라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결코 자신들이 장악한 정권을 빼앗기지 않을 구조를 일본 제국헌법 내에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힘으로 모든 것을 장악하고 천황을 꼭두각시로 만든 또 하나의 사실상의 막부이며 전형적인 일본식의 정치형태를 구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맹자의 왕도사상과 관련한 현대일본의 정치의식


 일본에서의 맹자 왕도사상의 거부는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것은 조선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첫째, 그 거부는 왕에 대한-실제는 막부에 대한-절대적 충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기에 나라는 일치단결할 수 있었고, 외부로 힘을 팽창시켜서 외부에 강력한 충격을 준 두 번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는 임진왜란이며 다른 하나는 청일전쟁 이후의 동아시아 전역에 대한 지배권의 확대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나라가 완전히 일치단결할 때에 얼마나 강력해질 수 있는 지를 보이는 것이지요.

  둘째, 맹자의 왕도사상과 민본사상의 장점을 제대로 흡수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일본은 지정학적구조가 중국과는 매우 다르지만, 통일이 아주 빠르게 된 중국과 흡사한 정치의식적 결과를 가진다는 사실은 매우 기이할 정도입니다. 우리는 일본의 민주주의와 그 근간이 되는 평화헌법이 거의 미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일본의 우익은 어떻게 하든지 평화헌법 9조를 바꾸어서 전쟁가능한 나라로 만들려고 합니다. 과연 일본인 개개인의 의식 자체가 맹자의 민본사상이나 미국에서 수입된 민주주의적 이념을 투철하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맹자의 사상이 일본에 거부되었던 역사를 보면 부정적인 답변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근심스러운 눈으로 일본을 계속 지켜보아야 할 이유입니다. 






서울산업진흥원 추광재 수석
caleb.kj.choo@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07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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