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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세 착한치매 엄마와 딸이 함께한 두 번째 해외여행-발에 날개 단 엄마! 난징, 쑤저우, 우전, 상하이를 날다!

2018년 11월호(제109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12. 4.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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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녀 중국 공동체 여행기]



80세 착한치매 엄마와 

딸이 함께한 

두 번째 해외여행

발에 날개 단 엄마! 

난징, 쑤저우, 우전, 상하이를 날다! 



 

 먼저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독자여러분께 사과 말씀 올립니다.

왜냐구요? 그건 바로 작년 ‘엄마와 처음이자 마지막인 해외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일본 여행기를 제가 쓰지 않았겠습니까? 그땐 정말 엄마와의 해외여행이 처음이자 마지막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올해 그만 엄마와 추석연휴를 이용해 다녀온 두 번째 중국여행이 이어졌으니, 여러분을 본의 아니게 헷갈리게 만들었다는 거지요. 용서해주시는 거죠?(하하)

 작년 일본 여행보다 엄마는 더 역동적인 중국의 모습처럼, ‘엄마가 못 걷거나 힘들어하면 어떡하지?’하는 모든 우려를 한 번에 날려버렸습니다. 



 저희 엄마는 ‘착한 치매’입니다. 이런 엄마가 해외여행 중에 같이 간 공동체 식구들이 힘들어질 즈음 유쾌한 말을 던지시며 힘을 북돋우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번 중국여행에서 도리어 제가 엄마에게 힘을 얻기도 했습니다. 저희 남편말로는 원래 사회지능이 높으신 분이라는 군요. 여하튼, 착한 치매로 집에 혼자 계시는 시간이 많아 1년 내내 운동도 전혀 하지 않은 엄마! 걷기는커녕 조금만 빨리 걸으면 땀이 비 오듯 숨이 금세차서 바로 멈춰야하는 엄마! 최근 기억이 전혀 되지 않아 영원한 현재를 사는 것처럼 금방 물었던 질문을 수십 번 반복하는 엄마! 이런 엄마와 단순 관광여행이 아닌 중국 역사여행을 간다는 것이 딸인 저에게 어찌 부담이 안 되겠습니까? 작년 일본여행은 자동차로 전 구간을 이동했지만, 올해 중국은 매일매일 10km이상을 걸어야하는 여정이었으니 젊은 사람들도 힘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딸 : “엄마! 내일 중국 갑시다. 그런데 많이 걸어야 하는데 엄마가 잘 못 걸으면 어떡하지?”

 엄마 : “뭔 걱정여~ 내가 못 걸으면 너네들이 날 업고 가면 되지!”

 “내가 어디가~ 너나 갔다 와!”하지 않고 이상하리만치 따라나서려는 겁니다. 무엇보다 공동체여행에 함께하는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저에게 “이번에도 엄마 모시고 가요! 못 걸으시면 휠체어 빌리고, 업고도 가고 합시다”하는 말이 든든한 응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엄마를 위해 저와 남편이 합작해서 하루 전날 본격적인 여행준비에 돌입했습니다. 



엄마 발에 한 번도 신어보지 않은 트레킹화 장착, 중국 난징에 첫발을 내딛다. 




 아시다시피 연세 드신분들은 익숙하지 않은 트렉킹화를 선뜻 신지 않을 뿐 아니라, 더 까탈스러운 저희 엄마는 ‘호랑이 아구’같은 신발이라고 트렉킹화가 편해 10년째 신고 다니는 저를 구박했죠. 그런데 바로 이 신발을 남편이 제일 먼저 구입해 엄마에게 신겨드렸습니다. 신발색이 ‘늙은이 색’(약간 노란색)이라고 처음에 싫은 기색을 하셨지만, 이 신발을 신어야 중국에 갈수 있다고 설득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트레킹화가 중국여행에서 일등공신이었죠. 적어도 발의 불편함을 말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중국 난징에 도착해 첫날 12km, 둘째 날 14km... 매일매일 계속 걸어야했으니까요. 

 9월 24일 오전 ‘난징대학살기념관’을 가는 전철 안에서 중국인 초등학교 교사와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엄마는 전철 안에서 중국인들에게 당연한듯이 한국말로 말을 걸고, 중국 아이들에게 예쁘다고 자꾸 하시니 저는 구글 번역기를 이용해 중국어로 중국 사람들에게 답을 해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엄마 옆에 앉은 중국인 초등학교 교사가 한국말을 알아듣고 조금은 말하는 겁니다. 언제 배웠느냐고 하니 대학 때 배웠노라고 하더군요. 때마침 ‘난징대학살기념관’을 찾아가는터라 중국인으로서 ‘난징대학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통역하는 분을 통해 먼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참으로 교과서적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역사는 기억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고요. 물론 초등학교 교사인 점을 감안하면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저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일본이 먼저 잘못을 명확히 시인한 가운데 그렇게 되어야하지 않느냐 했더니, 사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국가에서 그렇게 해주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주제를 바꾸어서 중국인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하며 중국역사를 볼 때 정주민족과 유목민족의 역사라 볼 수 있는데, 어찌보면 유목민족인 수, 당, 원, 청이 정주민족을 더 많이 지배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중국인의 정체성에 혼동이 있을 같은 생각이 드는데 보통 중국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냐 물었지요. 당연 중국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뭉뚱그려 말하며, 약간 뒤로 물러서는 모습으로 같이 찍은 본인의 사진을 SNS상에 올리지 말아 달라고 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겠노라 약속 했죠. (약속은 약속이니 당연 지켜야죠.) 짧은 대화속에서 중국인들 속에 겉으로는 자유롭게 말하고 또 예전에 비해 경제적으로 풍요해져서 많이 누리는 것 같지만, 밑바닥에 흐르는 뭔지 모를 두려움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난징대학살기념관에 도착하니, 중국은 어디에서나 사람이 많고, 시끄러운 분위기인데 그래도 여긴 좀 달랐습니다. 캄캄한 실내에 천정에는 불빛이 조용히 비추며 희생당한 사람들의 이름들이 쭉 전시되어 숙연한 분위기였죠. ‘난징대학살’은 일제가 우리를 대한 것과 좀 차이가 있어 보였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 때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들이 저지른 대규모 학살사건입니다. 6주 만에 20~30만 명이 넘은 중국인을 잔인하게 죽였고, 2~8만에 이르는 중국여성을 강간하였습니다. 이렇게 단시간에 악을 행한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나라는 1910년‘경술국치’로 이미 일제 손에 넘어가 그 이후는 마음껏 수탈하는 대상이었지만, 중국은 철저히 ‘대적’으로 인식해 닥치는대로 죽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저도 모르게 난징대학살 기념관을 둘러보는 중국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들은 진짜 무슨 생각을 할까하고 살펴보게 되더군요. 그런데 ‘난징대학살기념관’거의 마지막 전시를 보고 나오는 끝에, 과연 ‘Remember history, but not with hatred’라고 전철에서 만난 중국인 초등학교 교사가 한 말이 그대로 적혀있었습니다. 


 엄마는 난징에서의 마지막 밤에 주무시면서 끙끙 신음소리를 내시며 무척 앓았습니다. 순간 제 안에도 두려움이 밀려들었죠. 타국에서 혹시 어떻게 되시는가 해서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다음날 바로 일어나 일정을 잘 소화하셔서 무척 다행이었습니다.



 엄마를 업고 뛰며 난징에서 쑤저우가는 기차 출발 30초전, 헥헥 승차성공!



 3박4일 난징 일정을 마치고, 9월24일 난징기차역에서 쑤저우로 향하는 날,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이미 기차 티켓을 예약했었지만, 막상 티켓을 받는 상황이 행정적으로 자꾸 지연이 되었습니다. 기차시간은 다 되어 가고, 한국에서라면 어찌된 거냐고 바로 묻겠는데... 일단 티켓 발행을 초초하게 기다리는 가운데 기차 시간 5분 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3분전 겨우 개찰구에 들어가자 기차 타는 플랫폼까지 사력을 다해 뛰어야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중국은 어디든지 넓고 크지 않습니까? 도저히 엄마가 따라올 수 없다 생각했는지 같이 간 남자분이 엄마를 들쳐 업고 뛰기 시작하며 “빨리 빨리”를 외쳤죠. 한국 사람인줄 알았는지 중국 승무원들도 어여 타라고 손짓을 합니다. 땀범벅으로 쑤저우 기차에 몸을 싣는데 성공! 엄마의 거친 숨소리가 잦아드는데 시간이 좀 걸렸죠. 그런데 엄마는 생각보다 다시 쌩쌩해졌습니다.

쑤저우에서 ‘우전 동책과 서책’을 거닐며 몇 천 년 중국남방의 자연과 문화에 잠시 빠져들기도 했지요. 엄마의 질문은 또 시작됩니다. “여기가 어디여?”“엄마! 여긴 중국”“일본보다 참 좋다”금새 기억이 리셋 되어 다시 물으실것은 뻔했지만, 대답도 항상 처음 질문 받은 것처럼 합니다. 그만큼 익숙해져가는 거지요. 우전의 동책과 서책의 돌로 된 긴거리를 걷다, 쉬다 반복하며 서책의 황홀한 경치 속에서 밤늦게 배를 타니 엄마도 기분이 업(up)되었는지 이런 고백을 합니다.“정말 고맙다. 중국 귀경도 시켜주고, 내가 언제 와 보겠냐? 니 신랑한테 고맙다고 혀!”

 여기가 어딘지 바로 모르실거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엄마의 이야기를 잠시 뒤로하고 나 혼자의 시간과 생각에 빠져봅니다. 중국의 남방은 모든 사람을 시인으로 만드는 마술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행객이나 중국인이나 누구나 할 것 없이 자연을 노래하고픈 마음과 여유가 생깁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가운데 한 평생 안주하며 살겠다라는 생각도 동시에 가졌습니다. 이곳에 수 천 년을 지나며 드나들고 사라져갔을 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밤에 서책의 아름다운 풍경과 직접 손으로 젓는 나룻배를 타고 조용히 물에 수없이 반짝이는 가게들의 불빛을 보면서 인생이 저 불빛처럼 한번 비추고 그냥 사라져버리는 삶이 되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도 스멀스멀 올라오더군요. 



휠체어에 엄마를 태워 ‘상하이박물관’ 돌고 돌고 또 돌고!


 ‘상하이박물관’에 들어가는 절차가 마치 비행기를 탈 때와 같이 짐과 몸을 다 검사받아야 했습니다. 입장하자마자 엄마를 휠체어에 태운 후, 같이 간 사람들과 흩어져 엄마와 저, 오롯이 박물관을 돌아보았습니다. ‘난징박물관’관람 후, 실망한 터라 상하이박물관도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둘러보기 시작했죠. 그런데 말입니다. 처음 보는 청동기 시대 유물부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제 큰 눈은 점점 더 커졌습니다. 청동기시대 유적이 모양이나 무늬가 요즘에 사용한다 해도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세련되었고 대부분의 유물들이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특히 작년에 우리나라 선조 ‘이삼평’에 의해 전수되고 발전된 일본의 도자기를 보며 아쉬움이 컸었는데 일본의 도자기와도 많이 달랐죠. 중국 도자기의 깊은 멋과 세련됨은 일본 도자기와 비교도 되지 않았습니다. ‘비단이 장수 왕서방’, ‘뙤놈’그리고 중국을 단편적으로 인식했던 제가 중국 고대 유적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아니 우리나라와 바로 비교해서는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음에 눈이 휘둥그레진 것이죠. 또 중국 역대 문인들 작품인 서예와 그림들을 둘러보며 저희 엄마가 하는 한마디. “격이 다르네”라고요. 적어도 엄마 눈에도 뭔가 달라보였는지 “우리나라 것과 똑같은 글과 그림인데 중국이 훨씬 세련 됐네”라면서요. 


<명나라 가구>


<청나라 가구>


 명·청 시대 가구 전시관에 들어서니 두 나라의 가구가 명확하게 선과 면으로 구분되었습니다. 명나라 가구는 선으로 표현을 했다면 청나라 가구는 면으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제 눈에 명나라 가구는 현대가구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세련되고 기품이 있어 보였습니다. 중국이 이룬 문화적업적의 깊이와 폭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으로 전시관을 둘러보며 중국은 굳이 ‘중화사상’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하나로 만들려하지 않아도 선조들이 남겨놓은 깊은 문화유산들만으로 얼마든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나라라는 생각까지 들었지요. 도리어 근대, 현대의 중국이 이런 역사적인 것을 간과하며 서양문화 껍데기로 뒤범벅 해놓는 게 아닌가하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중국 고대 문화의 찬란함을 보면서 우리나라가 중국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던 점을 눈으로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상하이박물관은 또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 되었습니다. 하나하나 자세하게 공부하고도 싶은 마음이 들었지요. 반면에 상하이의 명동이라고 할수 있는 거대한 건물들과 네온사인의 번쩍거리는 야경, 엄청난 사람들이 모이는 와이탄 거리를 보며 한창 팽창해가는 역동적인 힘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문명의 가벼움으로 치장해 놓은 것 같아 더 씁쓸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저를 깨우는 엄마의 여행을 결론짓는 한마디가 압권이었습니다. 

 “야~ 중국이 이렇게 크고 무엇보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다른 나라에서 중국 무시 못하겄다.”


 중국에 있는 동안 “여기가 어디여?”라는 지속적인 질문으로 나를 간혹 지치게 한 엄마와 9박 10일 모든 중국 역사여행을 마치고 9월30일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한국에 오니 무척 쌀쌀 했습니다. 엄마를 바로 집에 모셔다 드리긴 했는데 제 속에 ‘엄마가 여행을 마치고 아프면 어떡하나’하는 두려움이 계속 있었습니다. 보통 어르신들이 무리한 여행을 하고 난후, 아프거나 심지어 돌아가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공동체여행에서 중국어 통역을 맡은 40세 올드미스는 “와~ 이건 기적이예요. 저도 힘든데 80세 엄마가 해냈으니, 대단하다고요. 평소 운동도 잘 안하신다는 분이”며칠 간격으로 계속 전화하며 엄마의 동정을 살펴도 여전히 쌩쌩한 목소리로 “내년에는 어딜 가냐?” “엄마 내년에는 안가요!” “왜?” “내 후년에 유럽공동체여행 갈 거야” “그래? 그럼 그때까지 잘 살아있어야겄네! 유럽 가려면!”... 전화기 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런데 더 웃긴 건 넷째 여동생이 전해주는 말“엄마는 어떻게 중국에서 그렇게 걸을 수 있었어? 집 앞에도 잘 못 걸으시는 분이”라고 하니 엄마 왈 “야! 중국에서 나를 데리고 계속 걷는데 그럼 걸어야지 어떻게 안 걷냐?”라고 해서 엄청 웃었다고 전해주더군요! 순간 저는 “우리 엄마 치매 맞나?”(하하) 어쨌든 지금도 생각하면 감사할 따름이죠. 아마도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11월호가 발행될 쯤엔 엄마 머리맡에 중국 사진첩이 놓여 있을 겁니다. 중국에서 찍은 사진을 인화해 엄마 기억하시라고 앨범을 만들거라며 남편은 3,000장도 넘게 찍은 중국 사진 중 엄마 사진을 열심히 골랐답니다.


 끝으로 이번 중국공동체여행에서 난징, 쑤저우, 우전, 상해를 발에 날개 달 듯 걷고, 타고, 뛰며 끝까지 완주한 엄마에게 딸인 제가 박수를 쳐드리고 싶습니다.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편집장 김미경
hasun2001@hanmail.net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09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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