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중국은 없다!(2)

2018년 11월호(제109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12. 9. 21:58

본문

[중국연구여행 2]



  중국은 없다!(2)



 


  우리 신문 지난 호(10월호)에 시작한 중국문화비평에 대한 글을, 중국남방으로의 9박10일간의 공동체여행을 마친 후에 이어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인 것 같습니다. 비록 제가 3회 정도 북방지역을 방문했지만, 여전히 드넓은 대륙 중국은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직접 관찰하고 경험하며 다시 생각을 정리해 가야 하는, 제대로 파악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새롭게 방문할 때마다 깜짝 놀랄만한 새로운 것들을 경험할 것이고, 사실 이번에도 그런 색다름을 어김없이 체험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중국을 직접 경험하기 전과 그 후를 비교하면서, 중국을 긍정적으로 판단하는 쪽으로 추가 옮겨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이구동성으로 말하곤 했습니다. 적어도 중국을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거나 무시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된 거지요. 그렇지만 중국의 모든 것을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흘러가고 아무리 경험이 계속 쌓여가도 인간이 사는 삶의 근본적 요소에 있어서 중국이 가지는 부정적이거나 헛되거나 혹은 무의미한 점들은 더 명확하게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저는 ‘중국은 없다!’라는 다소 선정적으로 표현했더랬지요. 그 첫째로 ‘종교는 없다’와 ‘지리가 없다’는 점을 먼저 다루었는데, 이번에는 다음의 요소가 중국에서 부족하거나 헛되거나 무의미하다는 점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4.민족, 5.사상, 철학, 6.정치 (7.역사, 8.문화는 다음 12월호).



4. 중국에는 민족이 없다!


 14억이라는 세계 최대의 인구를 자랑하는 나라인 중국에 민족이 없다는 말이 매우 의외로 들릴 겁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차분히 따지면 중국이 의외로 ‘민족’이라는 면에서 매우 취약하고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먼저 여기서 ‘민족’이란 1) ‘혈통적 기초’를 가지지만 동시에 그 혈통을 가진 육체가 땅에 기반을 둘 수 있는 2) ‘지리정치적 단위’를 형성하는 실체를 의미합니다. 가장 정상적인 형태는 특정한 혈통적 기초를 가진 사람들이 적당한 땅에 머물러 살 권리가 있으며, 다른 땅의 다른 사람들과 정상적 관계를 맺고 사는 경우입니다. 지난 호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우리나 일본과 같이 지리적 경계가 뚜렷한 경우는 민족적 실체도 아주 뚜렷하게 규정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그 경계를 넘어오려고 할 때에, 우리뿐 아니라 일본 자신에게 큰 고통을 주었습니다. 중국은 북쪽과 서쪽 지리의 모호한 경계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가운데, 흡수되기나 억누르기도 하고, 배타적이거나 친화적이기도 해서, 현재 50여개 이상의 민족의 집합체가 청나라 이후 더 넓어진 중국 영토 안에 머물고 살고 있습니다.

 현대중국은 만주족의 청나라가 이루어놓은 지리적 단위를 계승하였는데, 그것을 이어받고 정상적으로 운영할 체제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만주족의 청나라는 중국을 정복하였지만 자신들보다 먼저 중국 땅을 지배하였던 다른 유목민족들이 다시 발흥할 것에 늘 신경을 썼습니다. 눈을 늘 북쪽과 서쪽을 향하여 크게 뜨고 그 북쪽의 입구인 ‘열하’(청더)에 여름피서 궁전을 지어놓고 대규모 군사훈련을 하면서 침입을 대비하였지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 강희제는 아예 동진하는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놓인 초원세력을 정복하여 그 우두머리인 갈단을 사로잡아서 처리해 버리고, 그 지역을 신장(새로운 강토,영토)위구르라는 새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의 사람들은 민족적으로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무종교사회의 중국인과 다르게 일신교인 이슬람을 신봉하고 있습니다. 또 청나라는 서쪽으로 티벳까지 진격하여 복속시키며 호전적 몽골의 후손들이 티벳불교를 받아들이게 만들어서 현세의 삶에 무기력하도록 하는 전략을 썼습니다.

 그런데 청나라의 방대한 영토를 계승한 공산국가 중국은 만주족의 청나라보다 취약한 기초를 가질 수밖에 없는 데 그것은 공산주의 자체가 가진 한계인, 원칙적으로 민족과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청나라는 현명하게도 민족과 종교 모두를 인정하는 가운데 이들을 정치외교적으로만 통치하는 정책으로 불필요한 갈등을 피해갔습니다. 물론 중국의 공산주의는 변형된 중국식 공산주의이며, 또 민족들의 자치구를 많이 허용한다는 명목을 내세우고 있긴 합니다. 그러나 각 민족이 각 지역에서 정치적 종교적 자주권을 가지고 살아갈 기본 권리를 부인하기 때문에, 티벳과 신장지구는 끝까지 중국의 골칫거리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더더구나 공산주의 자체가 하나의 종교이며, 이를 바탕으로 시진핑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종교적 갈등은 스탈린 치하와 같은 피의 광풍이 이는 정치를 한다고 하더라도 두 전통종교(이슬람,티벳불교)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할 것이 빤합니다.  

 그리고 한족 이외의 다른 구별된 큰 민족들이 동쪽과 남쪽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 독자적으로 자리를 잡고 사는 곳을 자치구라는 명목을 붙이고 있으나 사실상 중앙에서 통제하는, 중국의 또 하나의 지방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중국이 취하는 정책은 90% 이상을 차지하는 한족을 각 곳으로 이주시켜 이들이 그 지역을 통치하는 쪽으로 사실상의 한족지배를 늘리려는 것입니다. 이러니 앞으로 크고 작은 반발이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거대한 한족이라고 하더라도 이들 중에는 이전의 북방을 휘젓고 다니던 유목민족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정주화되어간 사람들이 많이 섞여 있습니다. 이들을 제외한다면 엄밀한 의미의 한족은, 사실상 언제 어떻게 힘센 말로 북쪽에서부터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가운데 북송에서 남송으로 전환한 이후로 지속적으로 남쪽으로 피난해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바로 우리가 여행한 지역에 눌러 앉아서 문화적 제품을 만지작거리며 살았던 사람들일 겁니다. 지금도 북경인과 상해를 중심으로 하는 남방인은 거의 모든 면에서 차이가 난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대단히 정치적이고 누구나 정치토론 하는 것을 좋아하며, 200년의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지만 집안의 내일 일을 도무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통 큰 북경인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한족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이전에 북쪽에서 밀고 들어온 유목민족들의 후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반면에 나긋나긋하며 실용적이고 서방에 대해서 개방적이며 북경을 돈 벌 것이 널린 황금시장으로 반기는 상하이인들은 전통적으로 그곳에 피난 와서 눌러 살던 남송인의 후예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렇게 서로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일 수 없는 민족들과 종교들이 공존하는 나라가 14억 인구의 중국입니다. 그러므로 민족과 종교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지난 세기의 실패한 유물인 공산주의/중국공산당이 중국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천지가 개벽하지 않는 한 어려울 것입니다. 중국은 고도의 정보처리능력과 AI기술로 국가통제의 소망을 걸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또 한 번 오래된, 늘 반복되는 중국의 전형적 비극의 역사, 황제통치로 인하여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역사가 재현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이런 기세를 몰아서 한반도와 일본사람과 지리도 그리고 먼 미래에는 세계인 전체를 중국인으로 편입시키려는 헛된 꿈까지도 꿀 수 있겠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에 민족은 없다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5. 중국에 사상, 철학이 없다!



 위에서 말씀드린 중국인이 황제통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심성 자체가 - 누군가 와서 다스려 주어야 하고 나는 통치 아래서 평안을 누려야 한다는 - 바로 중국에 사상, 철학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하나의 표징인 것 같습니다.

인류가 동진하는 가운데 중국에 이르러서는 무종교사회가 되었음을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종교가 없어지는 대신 다른 것이 (절대)종교적 위치를 차지하고 종교적 지배력을 형성하게 되는데, 그 전형이 유학-유가에서 종교로서의 유교로 변한 것도 보았습니다. 결국 무종교사회에서의 세속철학의 하나인 유학이 매우 역설적으로 하나의 종교로 승격하여 중국을 오랫동안 지배한 것이지요. 이런 가운데 중국인들은 또 하나의 세속철학이자 동시에 종교적 성격을 강하게 띤 공산주의가 중국을 지배하는 것을 민족 무의식 속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아주 클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지금은 거의 대부분의 세계인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음으로 무가치함이 드러난 중국철학사상사는 그 자체로 허망하기 짝이 없는 역사적 과정이었습니다. 춘추시대 말기에 주나라의 의례를 회복하려는 생각으로 출발한 복고적인 공자의 사상은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지나갔으며 전국시대에 접어들면서 맹자의 사상으로 이어졌지요.

 시간이 흘러 사회의 근본적 문제가 왕에게 있을 수 있다면서 전개한 사상이 맹자의 왕도사상입니다. 왕이 그 왕도를 따르지 않을 때에 심지어 그를 바꿀 수 있다고 혁신적이기까지 한 사상이지요. 그렇지만 맹자의 문제는 그의 왕도사상 자체와, 더 근본이 되는 인간의 선함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내는 성선설에 있었습니다. 즉 지배욕에 사로잡혀 다니는 왕들 중에 어느 누구도 왕도사상을 제대로 따르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또 절대자를 부인하는 세속적 인간은 결국 세 가지 욕망의 덧(물욕, 성욕, 지배욕)을 제어할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성선설 자체가 구멍이 뚫린 헛된 이론에 불과하였습니다. 실제로 중국의 긴 정치역사에서 일어난 많은 왕권이나 정권교체가 사실상 덕의 부족으로 선양하는 형식을 취한 것은 왕도사상을 따르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힘의 우위에 의해서 결정된 것을 위선적으로 표현한 절차에 불과하지요. 

 이어서 전국시대 말기에 유가 중에서 맹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등장한 것이 순자의 사회철학이론과 그 기초로 만든 성악설입니다. 맹자가 시대의 요청을 따라서 공자의 ‘예’를 발전시켰다면, 순자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살벌해지는 시대의 요청을 따라서 인간본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와 함께 사회이론으로서 공자의 ‘의’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순자의 이 ‘의’를 중심한 이론이 그의 두 제자인 한비자, 그리고 진시황 통치기에 승상이 된 이사의 ‘법’이론으로 계속 발전되었습니다. 이런 시기쯤이면 공자가 말하는 ‘예악’ 중에서 정서를 순화시키는 ‘(음)악’의 중요성은 이미 먼 나라 이야기가 되고 말았고, 모조리 칼을 들고 정복하려 들고 그 정복한 민족에게 법만 철저히 지킬 것을 요구하는 살벌한 중국사회가 되었습니다. 공자가 말하는 ‘충’은 휘몰아치는 폭군에게 복종할 것을 정당화시키는 도구로 변질되었지요. 진시황의 중국통일이 아주 짧은 기간만 유지되었다는 사실은 이렇게 ‘예’→ ‘의’→ ‘법’으로 사회철학의 중심성이 옮겨져서 마지막에는 황제가 정하는 법에 절대복종만 요구하는 동양식 법지상주의라는, 인간사회의 극단적으로 파멸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시간이 흘러서 진나라의 법가적 통치에 신물이 난 한나라의 고조-문제-경제는 공자의 정반대편의 노장의 무위사상을 따랐습니다. 즉 ‘무위가 유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어떤 것을 하는 것이다 라고 노자처럼 역설적으로 생각한 겁니다. 그렇지만 노장사상은 현실을 떠나 은둔, 초월하고, 좁고 개인적으로 적용한 생활철학에 불과하므로 하나의 정치사상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나라의 무제에 이르러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다시 뒤집어서 중국역사의 모든 정권의 황제들이 따라갔던 하나의 전범이 되었습니다. 첫째는 법가를 거의 대부분 가져와서 국가를 완전히 장악하고 백성들을 쥐어짜는 겁니다. 동쪽 한반도에 한사군을 설치하고, 북쪽에는 흉노와 끝나지 않는 싸움을 벌였으며, 서쪽으로는 서역과 교역에 나섰던 겁니다. 둘째는 승상이었던 동중서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황제를 절대적으로 보좌하고 충성하게 만드는 집단을 형성하는 기초로서 적합한 보수적 사상인 유학을 국가의 핵심 사회사상으로 삼았던 겁니다. 유학을 관학으로 만들고 유학의 기초인 사서오경으로 훈련하고 선별한 사람들을 관리로 채용하였던 겁니다. 이렇게 해서 한나라 이후의 거의 대부분의 정권들이 무제의 본을 따라서 통치를 이어간 것이 지난 2천년의 중국의 정치역사입니다.  

 물론 송나라 시절에 공자의 사상이 종교의 차원으로 발전하여 유교가 되어간 기초에는 주희 등이 정립하여 조선시대 내내 한반도를 지배하였던 ‘이’와 ‘기’를 핵심기초로 정립해 나간 주자학이 있습니다. 또 명나라 시절에는 그것을 뒤집어서 내 안에 있는 마음의 중요성을 말한 왕양명의 심학이 등장했지요. 이어서 청나라 시절에는 공자에 대한 후대가 만들어낸 엄청난 해석의 거품들을 다 걷어내고 공자가 한 말 자체만을 찾으려는 고증학/훈고학이 차례로 전개되었지요. 또 서세동점하는 격랑이 몰아치던 청나라 말기에는 강유위, 양계초와 같은 인물들이 모두 중체서용, 동도서기(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기술의 결합)라는 안이한 생각을 쏟아내었지요. 그러나 이런 모든 사상의 전개는 실제 사회와 역사의 현실을 처리하는 데는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근본적으로는 공자의 한계 안에 머물러서 해 보았던 헛된 몸부림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런 사상을 다시 끄집어내어 먼지를 탈탈 털어서 21세기의 현실에 적용하려는 사람이나 운동이나 역사가 없다는 사실은 바로 중국이 근본적으로 사상/철학이 부재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징이 되고 있습니다. 

 또 물론 중국이 혹시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사상을 자랑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사상들은 사실상 모조리 중국의 통일을 이루려는 정치사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더욱이 이 사상들은 세속사회 속에서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만물과 현상을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해 내려고 했기 때문에 종교적인 특징을 보였습니다. 고대에나 지금에나 이 사상들은 역사의 창고에서 먼지나 마시고 쌓여있는 퇴물로서 영구히 남을 것입니다. 가장 순수하며 거의 종교적 열정으로 실천하려고 했던 묵가의 사상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철학은 사회와 그 현상과 관계없이 일단 본질, 영원, 절대를 추구하는 종교와 관련하여야 하며 또 순수한 인간학에서 출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국의 인간학인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 자체가 사회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고안된 인간학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미 순수철학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습니다. 또 정반대로 종교와 순수인간학에서 출발한 철학이라면 당연히 사회와 역사에 기여하는 사상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주희의 주자학이나 왕양명의 심학이나 청나라 시대의 고증학은 모두 휘몰아치는 유목민족과 정주민족 간의 긴 역사투쟁의 현장에서 빛을 발휘할 수 있는 사상이 아니라 선비들의 조용한 뒷방에서 토론되던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에는 사상, 철학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6. 중국에 정치가 없다!


 이렇게 사상, 철학 자체가 사회를 통일하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독립적 사상,철학이 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사회현상에 적용된 사회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도 시대가 지나면 바뀌어져야 할 것에 불과했으니 허망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이 진정한 사상, 철학이 부재하다는 것과 관련된 사실이 바로 중국에 정치가 없다는 겁니다. 물론 중국사상이 대부분 적용된 정치사상이라고 하는 말이 중국에 정치가 부재하다는 것과 서로 반대된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여기서 ‘정치’란 1) 한 인간이 가치있는 삶을 추구하고, 2) 그런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들이 모여서 이룬 사회가 가치있는 문화를 추구하도록 허용하고 도우는 제도/체제라고 정의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 가치 중에서도 되도록 오래 가는 가치, 영속적 가치가 되려면 반드시 정치는 절대적 질문에 답을 하는 절대종교와 연관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 호에서 보았듯이 인류가 동진하면서 점차로 절대종교성을 잃어버렸으며, 중국은 무종교사회, 세속사회가 아주 오래 전에 되어버린 겁니다. 인간이 절대종교성을 가져야 자신이 가진 삼대 욕망(물질욕, 성욕, 지배욕)에 노예가 되지 않고, 자기가 받은 절대종교적 사명감을 성취하기 위한 것으로 그 욕망들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이 욕망들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추구할 수밖에 없으며, 정치적 욕망추구는 나머지 두 욕망(물질욕, 성욕) 추구로 타락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와 중국 자체에서 유래한 도교는 근본적으로 역사와 사회현실을 떠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욕망제어에 성공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정치에 절대적인 정언명령을 내릴 인간을 초월할 절대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주나라 이후 지금까지의 3천여년 동안 이루어진 정치역사는 아무도 황제의 절대권력을 제어할 고삐나 장치가 없는 가운데 그야말로 인간의 사악한 지배욕의 발휘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황제는 엄청난 재산의 소유자로 마음대로 그것을 허비하였습니다. 또 수천수만의 궁녀들을 거느리면서 성욕을 만족시키는 공간으로 궁궐을 사용하였습니다. 정치 하나만 장악하기만 하면 다른 두 욕망도 충족시킬 수 있으니, 평평하고 아주 넓은 중국 땅에서 정치적 장악력을 높이려고 혈안이 되어 날뛰는 사내들의 역사가 중국의 정치사가 아닐까요? 중국역사 속에서 가장 음란하고 탐욕스럽고 파괴적 정권이 제갈량과 싸웠던 사마의의 후손들이 세운 진나라라고 합니다. 이런 한족들이야 위선적이나마 정치사상을 만들면서 형식적으로는 백성을 위한다는 정치를 했을 것이지만, 결과는 유목민족 정권의 지배와 동일할 것입니다. 추운지방에 겨우 목축에 의지하면서 생존을 유지해가던 유목민족들은 정치철학이라고는 아무 관심도 없었고, 단순히 생존 그 자체를 위해서 물자가 풍부한 황하와 양자강의 풍성한 자원과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말 타고 한 번에 중국을 정복할 수는 있지만 장기로 통치할 수 없다는 현실 때문에, 말에서 내려와 피지배민족인 한족에게서 통치술을 익히며 정치철학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이 한족화되는 동시에 무인의 기상은 잃어버리는 역설이 일어났으며 풍부한 물자와 여자를 탐닉하는 일에 그 어떤 제갈을 물릴 절대종교나 사상이 없는, 철저한 세속사회가 된 중국이라는 늪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전형을 우리는 청나라 말기의 서태후가 이룬 비참한 역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시진핑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가 모택동의 문화혁명의 희생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또 최고의 권좌에 올라 제2의 모택동이 되려고 몸부림치는 모순은 중국의 정치역사에 늘 반복되던 일이었습니다. 공산주의라는 허울을 뒤집어 썼으나 실상은 중국의 전통적인 황제통치를 반복하는 일이며, 이런 사실은 여전히 중국이 그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정치부재의 나라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010-6844-0609/ segensong@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09호>에 실려 있습니다.



지난 중국연구여행 바로가기



<중국은 없다 시리즈>


 


 제 108호 중국은 없다(1)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는 

  • '지역적 동네'뿐 아니라 '영역적 동네'로 확장하여 각각의 영역 속에 모여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스토리와 그 속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문명, 문화현상들을 동정적이고 창조적 비평과 함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국내 유일한 동네신문입니다.
  • 일체의 광고를 싣지 않으며, 이 신문을 읽는 분들의 구좌제와 후원을 통해 발행되는 여러분의 동네신문입니다.
  • 정기구독을 신청하시면 매월 댁으로 발송해드립니다. 

    연락처 : 편집장 김미경 010-8781-6874

    1 구좌 : 2만원(1년동안 신문을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예금주 : 김미경(동네신문)

    계   좌 : 국민은행 639001-01-509699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