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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간도 땅에 청산리는 없었다

2019년 11월호(121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9. 12. 22.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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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항일역사탐방 후기]

중국 간도 땅에 청산리는 없었다

 2019년 9월 26일부터 30일까지 닷새간 ‘두만강 항일역사탐방’을 다녀왔습니다. 올해 5월 펴낸 항일역사 실록《두만강은 말한다》(박남권 원저/ 신완섭 편저; 고다출판사)의 후속 조치로 결성된 탐방단은 총 6명, 장도에 오른 첫날 연길에서부터 강행군에 들어갔지요. 
 첫 목적지인 두만강 하류, 3국 접경지로 가는 길목의 훈춘 시내에서 그곳 문인협회 관계자들과 담소를 나눈 뒤 중국 최동단 방천 풍경구(防川 風景区)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3시 무렵, 용호석각 전망대에 오르니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 사이로 북·러 간 철교가 놓여있고 아스라이 동해 바다가 보입니다. 시선을 약간 돌리면 러시아령 늪지의 하산 마을 뒤편, 조선 시대 최전선이던 녹둔도(鹿屯島)도 보이지요. 지금은 잃어버린 땅, 한참 바라보다 보니 이곳에서 여진족과 맞서 싸우던 이순신 장군의 호령이 들리는 듯합니다. 

 다시 두만강을 거슬러 도문 근처의 봉오동 전투지. 이곳은 1920년 6월 7일 홍범도 장군이 이끈 북로군정 연합부대가 일본토벌대 중대를 골짜기로 유인하여 120명 이상을 섬멸한 곳입니다. 무장 전투로는 간도 지역 최초의 승리이자, 넉 달 뒤 벌어진 청산리대첩의 승기(勝機)를 잡은 중대한 일전이었지요. 아쉽게도 진입로에 들어서니 봉오 저수지의 문이 굳게 닫혀있어서 그 앞을 기웃거려볼 뿐이었습니다.

 이튿날, 3·13 만세 운동지 및 13열사릉, 용두레 우물, 15만원 탈취유적지, 간도총영사관, 명동학교, 윤동주 생가, 일송정, 해란강 등 용정의 항일유적들을 두루 살펴보고, 백두산 아랫마을 이도백하로 가는 길에 화룡현 청산리대첩 전투지들을 둘러보았답니다. 완루구, 어랑촌, 천수평은 외진 곳들이라 비포장길을 따라 시간이 지체되기도 했지만 현장을 밟아보는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하였어요.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 말인가
          단장의 아픈 마음 쓸어버릴 길 없구나.” 

 김좌진 장군의 시구가 떠오르는데, 어딜 봐도 대첩의 흔적은 없습니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엿새 동안 2천여 명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5천여 명의 일본 병력을 무찌른 대전투였건만 안내문은 고사하고 팻말 하나 없습니다. 중국의 동북공정 정책이 조선 독립군의 발자취를 깡그리 없앤 탓일까요. 

 사흘째 민족의 영산(靈山) 백두산 천지에 올라 결기를 다졌습니다. 푸르디푸른 저 물줄기가 하나는 두만으로 흘러 동해와 손잡고, 하나는 압록으로 흘러 서해와 손잡아 한반도 전역을 평화로 물들이기를 진심으로 기원했습니다. 

 나흘째인 29일 아침 일찍 청산리대첩기념탑과 첫 전투지 백운평이 소재한 화룡현 청산촌으로 향했습니다. 산길을 한참 오르자 송월댐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발파작업이 한창이라 길바닥은 굴러 내린 돌들로 수북합니다. 30여 분을 기다린 끝에 길을 빠져나가자, 이번엔 탑을 코앞에 둔 길목에서 중국 공안이 막아섭니다. 이유 없이 한국인 출입을 통제하는 것이었어요. 가이드 강씨의 귀뜸에 의하면 국경절(10/1) 전후로 경비가 삼엄해진다고는 했지만 참으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진입로 입구에 안내판을 세워두던가, 변명 같은 이유라도 밝히던가 했으면 기분이라도 상하지 않았을 텐데, 30여 분간 억류가 계속되면서 드디어 불만이 폭발했습니다. 탐방단 일원인 K씨가 억류 장면을 사진에 담아 정식으로 항의하겠다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 것입니다. 사색이 된 가이드 강씨가 만류했지만, 이미 분출된 화를 식히기에는 역부족, 삿대질과 고성이 오갔습니다. 
 마침내 억류가 풀려 되돌아가는 차 안까지 고성이 이어지자, 갑자기 차를 세우더니 강씨가 K씨 더러 차에서 내리라고 했답니다. 가이드로서도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어요. 겨우 사태를 무마하고 이동하면서 탐방대장으로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지금부터 마을로 내려가기 전까진 누구도 입을 열지 마시라. 탐방출발 열흘 전 느닷없이 단체비자 발급을 거부해 버린 중국의 처사로 볼 때, 이번 출입통제도 상부의 명령이라서 현장에서 아귀다툼을 벌여본들 우리만 손해다. 특히 현지 여행사로서는 심각한 제제를 입을 수도 있으므로 가이드의 입장을 헤아려 경거망동하지 말자.”
돌아 나오며 엊그제 들렀던 ‘봉오동’과 오늘 ‘청산리’로 운을 띄워 아쉬운 마음을 시조로 달랬습니다.

봉우리에 울려 퍼진 총성 소리 간데없고
5리도 못 간 곳에 물길이 막아서네
동녘에 해 뜰 때까지 혁명가나 불러볼까
청산은 어드메뇨, 북망산 가듯 했네
산길을 돌고 돌아 승전탑(勝戰塔) 미처 못 가
리피트(repeat) 문전박대로 뒤집어쓴 흙먼지

 이렇게 탐방의 대미가 흐지부지 끝나다 보니 연길로 돌아가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하지만 항일역사의 현장을 직접 밟아본 지난 며칠간은 속살을 들여다보고 숨결을 느껴본 무척 뜻 깊은 발걸음이었지요. 그날 저녁 연변역사학회 관계자들과 환담 중 “한때 70% 이상이었던 연변자치주 조선족 수가 지금은 38%에도 못 미쳐서 갈수록 영향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안타까운 말을 들었습니다. 한족을 지배했던 몽골(원), 만주족(청)들이 죄다 한족에 동화되어 버린 것처럼 조선족의 붕괴도 초읽기에 들어간 걸까요. 중국 정부로선 서두를 게 없을 것입니다. 가만히 놔두면 다 사라질 판이니… 

 

봉오저수지



 우리의 역사는 우리가 지켜야 합니다. 점에서 선으로, 안에서 밖으로, 기성세대에서 젊은 세대로 끊임없이 이어가며 지켜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탐방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야 하지요. 35세 젊은이에서부터 85세 어르신이 함께 했던 이번 탐방은 그런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닙니다. 시작의 첫걸음을 내디뎠으니 더욱 알찬 일정으로 매년 항일역사탐방을 꾸려가고자 합니다. 뜻있는 많은 분들의 동참을 기대해 봅니다.

 

두만강 항일역사탐방대장 신완섭 
golgoda9988@naver.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1>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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