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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긴 나라 ‘칠레’(3)

2020년 3월호(125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4. 1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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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속의 한국인]

긴 긴 나라 ‘칠레’(3)

 바보 소릴 들어가며
 1년 9개월간 교민신문편집장 일을 하고 그만 나와야 했습니다. 교민회장을 새로 선출하는 과도기 때 재임을 하려던 회장단과 신임회장단 간에 알력이 있었는데 그 사이에 오해가 생겨 일종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800달러의 쥐꼬리 봉급이었지만 못 받게 되니 교민신문편집장이라는 그 일이 얼마나 커 보이던지요. 
 신임회장단은 사건에 휘말려 해체가 되고 다른 교민 한 분이 회장이 되셨는데 그 분이 나를 불러 조금만 기다리면 복직시켜주겠다 해서 무작정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직종의 일은 도무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아내는 아내대로 우리와 너무나 성격이 다른 칠레인 직원들을 다루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지 매일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는 그만 녹초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세 살 많은 교회 장로 형이 우리 식구들을 가엾이 여겨 자기 가게 분점을 경영해 보라고 맡겨 주었습니다. 당시엔 눈 뜨고 감시를 아무리 잘해도 기가 막히게 훔쳐가던 때라 일에 재미를 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직원들조차 자리를 비우면 표시가 뻔히 날게 분명한데도 캐시 박스에 손을 댔습니다. 내가 칠레 온지 얼마 안 된데다가 나를 만만히 보고 그런가 보다 했지만, 상심이 되는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도대체 이 나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막 행동을 하는가?’, ‘앞으로 이런 가게 일을 계속해야 한다면 제 명에 살다 가겠는가?’라며 수없이 번민했습니다. 바보가 바로 나라는 자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이 흘러가면 생활무능력자가 되고 말겠구나 싶은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귀인의 등장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겠습니다. 칠레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 이웃에 살던 선교사 한 분이 원단세일즈 일을 하였는데 친분이 생겨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습니다. 그러다가 원단가게에 취직을 알선해 주었지만, 3주를 못 버티고 나와 버렸습니다. 나온 이유를 밝히는 게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말씀드리자면, 
 첫째, 일꾼 중 가장 밑바닥 인생들이 일하는 곳이 원단가게라고 합니다. 무서워서 이들을 통치할 자신이 없었지요. 실제로 이들은 건들거리기 일쑤인데다가, 털실 뭉치들을 저울에 올려놓을 때마다 눈금이 덜 나오게 장난질을 쳤어요. 이런 비양심적인 행위들로 정말 괴로웠답니다. 
 둘째, 여차하면 독일로 돌아가 음악인의 못다한 꿈을 이루기 위해 시간을 잠시 때운다는 생각으로 일을 하다보니, 스페인어 공부에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하여 원단의 색깔들을 스페인어로 외우는 것조차 서툴렀지요.
 셋째, 원단가게 사장님이 손수 무거운 원단 한 롤, 심지어는 두 롤을 들고 옮기는 시범을 보여주어 나도 따라했는데, 치질이 있던 저는 몇 번 나르고 나서 너무 아파 소파에 엎어졌더랬습니다. 너무 죄송했지만 병이 하필 때를 딱 맞춰왔지요.
이런 저에게 사장님이 원단을 자르는 시범을 보여주셨어요. 쉬워 보여 멋지게 가위로 원단 한 롤을 빙빙 돌려가며 자른다는 것이 세로로 자를 것을 가로로 자르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답니다.
 보다 못한 원단가게 사장님은 대형 온냉방 겸용 히터기(?) 설치를 나에게 맡기셨어요.
 할 수 있겠다고 말은 했지만 연통을 설치하기 위해 벽에 대형 구멍을 뚫어야 했고… 장장 2주간에 걸친 대작업이었는데 여러 고충들이 있었습니다. 사장님이 “노부장이 설치하는데 2주간이나 걸린 이유가 가게 흘러가는 동태를 살피느라 일부러 그랬구먼!”이라고 하셨을 때는 뜨끔하면서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셨길 바랬습니다.
 이렇듯 너무나 부족했던 내 모습이 노출되었다는 자괴감이 들어 황급히 떠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원단가게 사장님은 나를 인텔리라 생각하고 ‘똑똑한 놈은 다를 거야’라는 환상을 가지셨는지 못 받아도 이의가 없을 3주간의 급료를 충분히 주셨지요.
 제가 여기까지 쓰고 아내에게 읽어 주었더니, “그 얘기를 들으니 내 인생이 참 비참하네. 그렇게 모자란 남편이 당신이었으니 내가 얼마나 고생이 심했겠어!” “지금 새로 뽑은 직원 마우리씨오가 빈 박스를 분해해서 가지런히 정리한 후 모아서 버리는 일조차 어리버리하게 해서 속상한데, 당신은 마우리씨오보다 더하네!” 

4월호에 네 번째 스토리가 연재 됩니다.

 

칠레에서 노익호 
melquisedec.puentealto@gmail.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5>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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