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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망고호 서태평양 일주, 일본 오키나와 ~ 필리핀 마닐라 1,900km 구간 종주

2020년 3월호(125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4. 1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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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문법이야기 3]

타망고호 서태평양 일주
일본 오키나와 ~ 필리핀 마닐라 1,900km 구간 종주

 

 타망고호 선장님께서 겨울 동남아 일주를 위한 크루를 모집한다기에, 여러 연말 일정들을 제쳐두고 약 보름간의 요트 트립에 참가했다. 이 글은 15일간 바다 항해에서 배운 지식의 편린들을 주워 담은 이야기들이다.

 

 항해 일정을 맞추기 위해 육지에서의 여러 일들을 긴급히 정리하느라 온갖 무리를 견디던 몸이 결국에는 탈이 나 감기를 달고 배에 올랐다. ‘어떻게든 견디면 되겠지’ 하고 항해를 떠난 첫 날, 오키나와에서 이시가키를 향해 출발했다. 저녁 무렵 바다 위로 해가 지는 노을과 붉은 여명이 매우 인상 깊다. 그리고 그날 밤 인간에게 직관적 경이,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자연은 인간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눈물이 솟게 한다는 것을 처음 배우게 되었다. 
 수평선 위로 둥글고 붉고 반듯하게 지는 해와 노을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코끝이 찡해지며 눈시울에 눈물이 맺힌다. 해가 지고 반대편 콕핏(조종실, 운항 및 제어 장비가 들어 있는 칸)쪽 수면 위로 둥근 달이 떠오른다. 완벽한 보름달(full moon)이다. 잔잔히 일렁이는 물결 위의 물비늘들을 반사시켜 환하게 부서지며 빛나는 달이 세상 아름다운 것들을 다 그 발아래 굴복시키려는 듯하다. 


 압도되는 여명과 보름달을 한 참 탐닉하고 있자니, 몸이 갑자기 추워지며 위장 아래가 갑갑해져 온다. 선장님이 몸이 추우면 멀미가 심해지고 그렇게 자꾸 사진을 찍으면 달팽이관이 많이 흔들리니 얼른 선내로 들어가라 말씀하셨지만, 선장님의 말씀을 지키기엔 달이 너무 예뻤다. 넋을 놓고 셔터를 누르며 그 아름다움을 탐닉할 수밖에 없었던 밤.
 환한 달과 빛나는 바다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자니 시큼한 침이 입에 한가득 고인다. 멀미다. 곧 위장이 뒤집어지고 토할 것 같다는 느낌에 급히 콕핏 왼쪽으로 몸을 틀어 라이프 라인으로 갔지만, 가던 길에 그만 토가 쏟아지고 말았다. 갑판 끝 쪽에 토사물이 묻어 급하게 물티슈로 토를 닦아낸다. 기온이 섭씨 17~20도라는 예보에 솜옷까지 싸 들고 갔지만 24시간 불어오는 강한 바닷바람은 바람을 웅크리고 막은 온몸의 빈틈들을 모조리 찾아내 공격하듯 치고 들어와 체온을 앗아간다. 


 더는 견딜 수 없어 배 안에 들어와 소파에 누워 온몸에 힘을 풀었다. 조금이라도 고개를 들면 그 틈으로 다시 달팽이관이 흥분한 위장을 쥐어짜 남은 토를 다 하게 만들 것 같다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두 번의 토끝에 위장을 다 비워내고 그대로 선저에 시체처럼 누웠다. 이태백이 노래하고 시를 짓던 그 달, 탐닉의 대가로 항해 내내 체력이 달려 고통스러웠지만 아름다운 장면들을 뇌리에 가득 새겨 그 고통이 아깝지만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그 값을 매길 수 없어, 하나님이 값없이 이 세상에 누구나 누리고 보게 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항해를 할 땐 이기적이어야 한다. 큰 룰 안에서는 선장의 일정 및 지시에 따라야 하지만 피곤하면 어디든 기대서 자고, 배가 고프면 눈치 볼 것 없이 꺼내 먹어야 한다. 그래야 몸의 불편함이 멀미 등으로 크게 번지지 않는다. 멀미 중에 있는 사람을 우스갯소리로 ‘물건’이라 불렀다. 한 번 지독하게 멀미가 오고 나면 먹는 것뿐만 아니라 밤 경계를 서는 일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멀미가 나아질 때까지 버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키나와를 떠난 첫날 밤, 심하게 구토를 한 뒤, 흔들리는 배에 누워있는 것밖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이시가키를 향해 가는 밤에 나는 심각하게 하선을 고민했다. 몸이야 회복이 될 테니 어떻게 망가지든 정한 목표를 완수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지만, 떨어진 체력에 육지에서 달고 온 감기에 멀미까지, 이대로 가면 진짜 ‘물건’이 되어 선장님과 크루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식사를 담당한 변크루가 누워있는 내게 식사를 못할 것 같냐고 물어 혹시 저녁에 먹다 남은 누룽지가 남으면 버리지 말고 냄비에 두라 했다. 멀미로 모두 토하고 초콜렛 몇 개로 이틀을 연명하고 있자니 도저히 체력이 올라오지 않아 밤 근무를 서면서 그나마 소화가 잘 되는 불어터진 찬 누룽지를 가지고 마지막 시도를 해보았다. 근무를 서는 밤 내내 기력 없는 몸을 배에 기대고, 식은 누룽지를 오물오물 씹어 몸속으로 넘긴다. 먹는다는 개념보다 몸에 에너지를 밀어 넣어준다는 느낌이 맞겠다. 그렇게 오물오물 누룽지를 씹어 넘기기를 두 시간쯤 하고서야 신기하게 몸에 반응이 생긴다. 맛이 없어 많이 먹지 못했지만 에너지가 올라오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내친김에 사탕, 초콜렛 등 위에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당들을 모두 몸에 ‘넣었다.’ 몸이 음식을 거부하지 않고 차도가 생기니 처져있던 마음까지 살아나 밤 근무를 함께 서고 있는 크루들에게도 농담을 건넬 수 있게 되었다.


 항해 전에 누룽지를 준비하라 하셨던 선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어르신이 연세가 있으셔서 소화가 잘 안되시나 보다’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류였다. 쉬지 않고 흔들리는 배 안에서 부드럽게 끓인 따뜻한 누룽지는 이후에도 우리 모두에게 소화 잘되는 최고의 식재료가 되어주었다. 항해에서의 몸은 육지 환경에서보다 훨씬 더 열악한 환경에 놓여진다. 하루 종일 흔들리는 배, 큰 바람으로 바람이 바뀌면 뒤뚱거리며 로데오 경기를 만드는 파도, 강한 햇살과 24시간 내내 불어오는 차가운 중위도의 겨울바람과 저위도의 뜨거운 바람 등 작은 변수가 큰 변화를 만들기에 몸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렇게 누룽지와 김치 하나만으로 강한 바람에 흔들리는 배 안에서 어느 정도의 식사가 해결되었다. 작년 여름 완도~제주 100km 항해 시 학생들은 흔들리는 배 안에서 비스킷으로 배고픔과 멀미 사이를 버텼지만, 그것은 1일이라는 짧은 항해 시간이라 가능한 일이다. 긴 항해 시 배고픔과 과식, 더위와 추위는 모두 멀미의 소재가 된다. 우리는 부드러운 음식을 적게 자주 먹어 위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더위와 추위, 멀미를 피하며 ‘몸의 항존’이라는 항해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고통스러운 경험 속에서 하나씩 배워갔다.

 

임대균 (세일링서울요트클럽, 모아나호 선장)
keaton70@naver.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5>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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