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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이 치던 바다 

2020년 5월호(127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6. 30. 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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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문법 요트이야기 5]

 

비바람이 치던 바다 

 

 언젠가 요트 세계일주를 한 김승진 선장님의 항해기 속에서 일본 ‘이시가키’에서 필리핀 ‘수빅’으로 향하는 길이 상당히 터프하다고 읽은 적이 있습니다. 배헌종 선장님도 이 코스가 상당히 험해 몇 년 전 이 길을 건너올 때 강풍을 만나 버티고 버티다가 도저히 안 돼 대만으로 피항하셨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려주셨습니다. 이곳은 서태평양에서 불어오는 해풍이 루손 섬과 대만 섬 사이에서 병목 현상을 만들어 날씨를 알려주는 여러 사이트에서 바람이 항상 붉은 ‘위험’으로 표시되어 있는 곳으로 데이터상으로 기본 풍속이 25노트를 웃돕니다. 다행히 우리가 지나가는 길에는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이시가키를 건너는 바람이 그리 험하지는 않았습니다.

 

 

 6일간의 긴 항해를 시작하며 밤 근무를 설 때 요요마, 조성진, 시크릿 가든이 연주한 야상곡들을 들으며 고요하게 별이 빛나는 하늘을 버텼습니다. 바람이 강할 땐 한 번의 가격에 뱃머리를 20도 이상 틀어버리는 거친 파도 속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며 파도의 불규칙한 리듬에 몸을 맡겼습니다. 흉용한 바다, 날뛰는 바다, 고요한 바다, 일렁이는 바다, 고통의 바다, 기다림의 바다, 달과 별빛들을 반사해 한없이 일렁이는 빛의 바다, 바다는 여러 가지 얼굴들로 140시간이 넘는 그 긴 시간들을 지루하지 않게 채워주었습니다. 밤새 뱃전을 부딪치는 거센 파도는 두려움과 동시에 경이로움, 즉 경외의 감정으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며칠을 그 파도들과 함께 보내고 나니 날뛰는 파도는 무서운 형상만이 아니라 요트와 함께 바람의 격렬한 춤을 추는 덩치가 크고 표현이 서툰, 속내 여린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6일 간의 여정은 예기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바람이 조금 있을 거라 예상했던 곳들에선 아예 무풍을 만나 일출부터 일몰까지 태양과 한낮의 더위를 견뎌야 했고, 큰 바람이 지나고 적당한 바람이 불 것이라 예상했던 루손 섬 북쪽에선, 폭우와 함께 순간 풍속 45노트의 강풍이 불었습니다. 그날 밤 6시간을 추위에 떨며 비바람 속에서 콕핏(조종실, 운항 및 제어 장비가 들어 있는 칸)을 지켰습니다. 레이더 앞 쪽이 파도와 스콜의 영향으로 온통 노랗게 채워져 있습니다. 발이 젖어 추위에 떨다가 떨어져 있던 하얀 쓰레기 비닐봉지를 주워 젖은 발을 감싸니 비바람에 노출된 발이 한결 나아집니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매트가 물에 젖어 스펀지 틈에 베인 물이 왈칵 우비를 뚫고 바지를 다 젖게 만들어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바람의 사각지대에 몸을 숨기고 비바람을 견뎠습니다. 

 


 스피커에서는 김광석이 나즈막이 노래를 불러 주었고 저는 김광석의 마이너 음률들이 고통 속의 사람들에게 위로와 버틸 힘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람이 찰까 새벽에 따뜻한 스프를 끓여다 주고 ‘이것도 추억’이라며 그 밤을 함께 보낸 크루들이 고마웠습니다. 그렇게 또 하루의 깊은 밤과 요트에서 39번 째 나의 생일이 지나갔습니다.


 밤이 고될수록 어둠 속에서 서서히 동이 트고 구름 속에 다시 해가 떠오르는 광경은 장엄하고 놀라운 기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동이 터도 시야만 가려지지 않을 뿐 망망대해는 망망대해, 자연은 자연입니다. 6개 섬 사이를 지나는 데이터 상의 가장 붉은(강한) 바람 속, 아침이 되니 이번엔 5미터가 넘는 파도가 배를 맞이합니다.


 새벽까지 예정에 없던 큰 비바람을 맞은 뒤 날이 밝자 영화 <인터스텔라>의 ‘물의 행성’에서 보았던 큰 파도들이 눈앞에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파도가 높은 구간임을 미리 아신 선장님은 변크루에게 간단하게 해 먹을 수 있는 밥을 준비하라 하셨고, 우리는 간단한 누룽지와 김, 김치 볶음 등으로 허기를 달랬습니다. 비미니(요트의 그늘막) 밖의 시야를 통째로 가리는 5미터, 7미터의 파도들. 파워 보트들 같았으면 몇 분 버티지 못하고 침몰되고 말았을 바다를, 런 방향(뒷바람)에서 부는 바람을 타고 요트는 세일을 편 채 뒤뚱거리며 끝까지 건넙니다. 그 큰 파도들과 바람을 견디며 꾸준히 앞을 향해 전진하는 요트의 장점과 매력들이 새롭고 또 놀랍습니다. 아끼던 여름용 요트 세일링 모자는 그 밤을 견디지 못하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고, 다 젖어버린 바지를 벗어서 라이프 라인에 걸어두고 집게로 집어 바지를 말렸습니다.


 큰 파도 구간이 섬 사이를 통과하며 서서히 잦아듭니다. 여러 섬들 사이에서 물길이 만나고, 들물 날물 몸을 섞는 곳에서 물들이 부딪히며 소리 내어 웁니다. 삼각파도가 생겨났다가 너울이 큰 파도로 바뀌었다가 다시 또 잠잠해졌다가, 갑자기 날을 세우며 위로 솟는 끝이 날카로운 파도들이, 수 시간 동안 섬을 통과하며 여러 모양으로 배를 반깁니다. 밥을 먹고 밤샘 경계에 지친 나는 소파에 누워 모자란 잠을 청했습니다. 그렇게 3일이 위기와 고통 속에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임대균 (세일링서울요트클럽, 모아나호 선장) 

keaton7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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