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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날에

2021년 9월호(143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1. 9. 1.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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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날에

 

훌쩍 자란 딸아이가 아빠와 함께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게 된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부녀 사이로 오월의 훈풍이 날아들고, 벚꽃 잎이 눈부시게 흩날린다. 봄기운이 깃든 푸른 잔디 위를 사붓사붓 거닐며 나는 그의 환영을 따라간다. 생기 넘치던 젊은 날을 보내고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되어 있는 나의 아빠를…. 


아빠는 따뜻한 사람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아끼고, 가꿀 줄 아는 분이다. 시들시들하던 화초도 그의 손길이 닿으면 활력을 되찾고 푸른 잎을 틔웠다. 어린 시절 키우던 강아지가 하루가 다르게 살이 오르던 것과 이끼 하나 없는 깨끗한 어항에서 물고기가 힘차게 헤엄쳐 다니며 종족수를 늘려갈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의 보살핌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빠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강아지는 꼬리가 떨어져 나갈 듯 흔들며 자신이 받은 사랑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곤 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아빠에게 제대로 마음을 표현해 본 적이 없다. 식물도, 동물도 전심을 다 해 돌보는 아빠가 자식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극진했을지 지금에 와서야 헤아려 보게 된다. 
아빠는 두 딸이 자라는 내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무한한 애정을 쏟아 부어 주셨다. 여름이면 호기심 가득한 어린 딸을 위해 손바닥 위에 가재를 잡아 올려주었고, 플라스틱 상자에 흙을 채우고 모를 심어 벼가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 작은 상자 안에 아빠가 넣어 놓은 알이 올챙이가 되고 개구리로 커 가는 것을 보는 것이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밖에서 놀다 흙 묻은 손으로 집에 돌아오면 아빠는 작은 내 손을 자기 손으로 문질러 깨끗이 닦아주었다. 그때 그 손길은 참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중학생이 되고 체육복 가슴에 새겨진 반듯한 내 이름 석 자도 아빠의 솜씨였다. 섬세하고 자상한 아빠는 늘 어린 딸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다. 


아빠는 젊은 시절,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었다. 성격이 유하고 마음이 모질지 못해서인지 하던 사업은 잘되는 듯 보여도 큰 이문을 남기지 못했다. 사람을 잘 믿고, 불쌍한 이를 외면하지 못하는 천성을 타고난 탓에 금전적 손해를 보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철이 들고 나서는 그런 아빠가 못마땅해서 뿌루퉁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각자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바빠 남에게 눈길 한 번 돌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아빠의 그런 성품은 참 귀한 것이었다. 어릴 때 아빠와 함께한 추억들이 따뜻해서 어른이 된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마음이 부자가 된다. 내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그것이 돈으로 살 수 없는 얼마나 값진 경험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이 평안할 때도 자식에게 눈높이를 맞추고 그들의 필요와 정서적 욕구를 완전히 채워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빠는 고난으로 얼룩진 삶의 순간에도 나에 대한 관심과 보호를 미룬 적이 없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아빠는 날로 야위어 간다. 전화기 너머 화면 속 그는 여전히 나를 보고 웃고 있는데 그 모습은 세월의 흔적을 오롯이 담아 초췌해 보인다. 딸이 타국에서 고생이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인 그는 아빠가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며 언제나처럼 나를 다독인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멀리 있는 딸 생각에 목이 메고,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아이들만 봐도 손녀들 생각에 눈물을 찍어낸다는 우리 아빠. 그는 늙고 몸이 점점 쇠하여 가지만 자식과 가족에 대한 사랑만큼은 변함이 없다. 아니 점점 더 깊어져서 내 마음에 오래도록 남을 울림을 주고 있다. 아빠가 희생한 젊은 날의 꿈과 수고와 눈물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이를 먹고 시간이 흐를수록 아빠가 더 자주 생각나고 보고 싶다. 


이제는 더 늦기 전에 그에게 내 마음을 전해야 할 것 같다. 당신의 사랑이 나에게 빛이 되어 주었다고… 캄캄한 밤에도 꺼지지 않는 빛이었다고… 그래서 지금까지 길을 잃지 않고 먼 길을 올 수 있었으며 당신을 닮은 마음 따뜻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다고. 비록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어디에서나 아빠의 사랑은 나에게 가장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고 말해 주고 싶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아빠의 안식처가 되어 주고 싶다. 인생의 무거운 멍에를 내려놓고 잠시나마 쉬어 갈 수 있는 그런 날을 소망하며 나의 꿈을 봄바람에 실어 보낸다. 그 마음이 우리 아빠의 마음에 가 닿아 그리움이 슬픔이 아닌 기쁨과 보람이 되길 기도한다. 

어느 5월, 캐나다에서 권은경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43>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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