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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랑 유치원 가실래요?”

2021년 9월호(143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1. 9. 1.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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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저랑 유치원 가실래요?”

 

 

유명한 소설 ‘걸리버 여행기’를 쓴 조너던 스위프트는 늙으면 이렇게 하리라 작심한 10계명 중 하나가 있습니다. “(늙으면) 손주(녀)들하고 놀지 말라!” 저는 이 말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가 이 말을 한 이유는 만약 자신을 늙었다고 단순히 다음 세대가 아닌 그 다음 세대를 보살피는 존재로 자신을 간주하면, 이미 스스로의 생애는 끝날 때가 되었다고 여기는 꼴이 되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큰 일이 아니라면 손주(녀)들을 돌보는 할아버지(할머니)가 되지 않아야 하며, 자식은 역시 그 다음 세대인 아버지와 엄마의 손에 의해서 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장엄한 작정을 하고 사는 나에게 심상치 않은 변화가 생겼지 뭡니까. 아파트 같은 동에 살면서 엘리베이터를 타다 우연히 그 엄마와 함께 타거나 내리는, 유치원생이었지만 지금은 벌써 초등생이 된 가연이를 만나면, 저에게 이런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옵니다. “오늘도 내가 횡재 했네, 가연이를 다 보다니!” 이건 도무지 나의 신념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살짝 걱정까지 드는 것에는 다음의 사연이 있습니다. 

 

몇 년 전, 개그맨 남희석은 지나가는 개도 웃기려고 피나는 연습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적어도 아주 짧게 타고 내리는 엘리베이터에서라도 유럽인들이 하듯 짧은 인사라도 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더더구나 자주 마주치는 같은 아파트에 오래 사는 사람끼리는 그 짧은 시간이라도 맨숭맨숭하게 무언의 침묵으로 지나가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귀게 된 꼬마친구가 바로 ‘가연이’입니다. 

 

먼저, 있는 그대로의 가연이의 모습은, 여자애들 중에서 복스럽고(악간 통통하며^^) 예쁘게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가연이가 가진 큰 장점 두 가지에 끌렸습니다. 첫째는 자신이 예쁘다는 말을 듣는 것에 만족해 뽐내는 표정을 하는 여느 아이들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자신의 예쁨은 자신의 얼굴이나 예쁜 치장에 있지 않고, 어떤 칭찬받을 행동을 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알고 행동하는 것이 신통할 따름입니다. 둘째는 누가 어떤 말을 걸어오면, 그 다음의 대화를 이을 말이 자연스럽게 가연이 입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가연이 엄마! 이번에 이러이러한 음악회가 있는데, 가연이와 함께 가실래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가연이는 이내 “언제 하는데요?”라며 대화에 적극 끼어드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히 대화는 엄마와 하는 것이 아니라 가연이와 이어지니, 대화가 재미있고 발전적이 될 수밖에 없지요. 집에 돌아와서도 미소 지으며 아내와 가연이의 이런 반응 있는 대화에 대해 서로주고 받았습니다. 부모들의 말에 어른을 무조건 의심하고 두려워하도록 키워져 냉정하고, 심지어는 의심의 눈초리로 꼬나보는 여느 한국의 꼬마들과는 다르게 이렇게 맞장구치는 반응을 한다는 것이 정말 신통하다고 말입니다.     

 

잘 차려입고 유치원 가는 가연이를 만난 그 어느 날은 제가 날아갈 듯한 기쁨을 누린 날이었지요. “가연아, 오늘 예쁘게 입었구나. 지금 엄마와 함께 유치원 가는구나?” 그러자 짧은 생각에 잠긴 가연이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온 지 아세요? “오늘, 저랑 유치원 가실래요?” 이 환상적인 초대를 받은 나이든 저의 입은 자동적으로 귀에 걸리면서, 거짓말을 보태지 않고,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 지는 것 같은 기쁨을 누렸습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며 아내와 몇 번 씩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때의 환상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2016년도 7월호)에 기고를 했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라는 시를 쓸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바로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시였습니다.

 

“  
엘리베이터에서
무릎 쪼그리고 몸 낮추면
꼬마애와 눈높이로 말하며
걔의 눈 속에서 
그렇게 떠나기 싫었던 동심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지
 ”

 

요즈음 코로나19로 집콕해서 어려움을 겪을 가연이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생각하다 번쩍 떠오른 것이 있었습니다. 벌써 오래 전에 아이들을 키울 때에 사용했던 꼬마들과 사귀는 전략입니다. 엄마와 함께 넓고 큰 책방에 가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책들의 배열을 소개해 준 다음, 혼자 내버려두고 스스로 고른 책과 문방구를 사주는 겁니다. 저에게나 우리 자녀들에게 소소한 행복을 주는 경험의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원하는 음식을 선택해 마음대로 먹도록 해주면 좋았겠지만, 지금은 시국이 시국인지라 그런 식도락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지요. 이렇게 책방에서 가연이가 원하는 책도 찾고, 저도 책을 사며 책속에서 가연이가 전혀 만나본 적이 없는 색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저의 관심도 같이 나눌 수 있었습니다. 초등생이 된 가연이가 하는 의외의 말에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저는 사람들 앞에 서서 말하는 것이 하나도 겁나지 않아요.” 엄마와 아빠가 만들어준 정서적으로 안정된 가정 속에서 어릴 적부터 스스로 자신의 길을 발견해 가는 모습이 여간 대견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집에서 외동인 가연이가 이미 있는 학용품보다 더 화려하고 좋게 보이는 것으로 기어이 사고 싶어 했습니다. 이럴 때 이미 가지고 있는 학용품에 대해서는 가지고 있지 않는 친구들에게 나누어줄 것을 약속받고 사도록 유도하는, 순간적 지혜를 발휘해야 하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누구와도 함께 할 줄 알며, 또 긍휼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을 어릴 적부터 가지도록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다면 저로서도 큰 행복이겠지요. 

 

가연이에게 정말 마련해 주고 싶었지만 코로나19 때문에 아직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즈음 주위의 많은 도시들에서 열리는 클래식 음악 실황 연주회에 엄마와 함께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드디어 올해 8월, 초대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 제가 소개하는 것을 듣는 가연이의 또랑또랑한 눈망울을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그 입에서 튀어나올 예상치 못한 자신만의 반응을 통해 행복한 대화를 계속 이어나갈 것이 더욱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경기도 군포시 서윤기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43>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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