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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는 어떻게 중국에서 통합왕조의 꽃을 피웠을까?

역사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7. 11. 1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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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를 중심으로 본 유목민족과 정주민족의 역사]

당나라는 어떻게 중국에서 통합왕조의 꽃을 피웠을까?


“문화와 문화가 교차하는 가운데 창조가 발생합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요요마와 실크로드 앙상블’에 나온 이 대사는 세계적 첼리스트 요요마가 전세계의 음악가들을 찾아 다니면서, 사람들을 모으고 서로의 음악을 들으며 같이 연주하며 전혀 새로운 음악을 창조해 나가면서 했던 말입니다. 그래서 이 요요마의 앙상블은 중국의 비파나 스페인의 백파이프, 심지어는 한국의 장구와 같은 악기도 함께 연주하면서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음악을 창조합니다.


  이런 창조들은 음악적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정치, 경제, 문화 영역에서 다양하게 발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역사상에 가장 융성했던 중국의 당나라를 비롯한 당 이전의 호·한 통합왕조에서 끊임없이 발생하여, 다시 한국과 일본과 같은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에 널리 영향을 끼쳤습니다. 호병이나 호복, 각종 향료 등이 중국에 들어와 의식주뿐 아니라 예술과 정치체제, 사회구조 등에서도 널리 그 영향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예를 들면 ‘호풍(胡風)’이라는 이민족의 음악이 처음에는 중국에 유행했지만 나중에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당나라 음악인 ‘당풍(唐風)’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문화 교류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 실크로드 문화는 그 이전에도 어느 정도 있긴 했지만, 왜 유독 통합왕조의 가장 발전된 형태의 국가인 당나라에서 그 면모가 두드러질까요?

 



< 요요마와 실크로드 앙상블 >


‘정복왕조’와 ‘침투왕조’가 아닌 ‘통합왕조’로서의 당나라

  카를 아구스트 비트포겔(Karl August Wittfogel)은 중국의 유목민족 왕조 중에서 요(遼), 금(金), 원(元), 청(淸) 등의 왕조들은 한족을 정복, 지배한 ‘정복왕조’(Conquest Dynasty)로, 북위, 서위, 북주, 수나라로 대표되는 유목민족 국가들은 한족문화에 흡수된 ‘침투왕조’(Infiltration Dynasty)라고 구분합니다. 그는 ‘정복왕조’들은 유목민족으로서의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독자적 문자를 사용하거나, 이민족들과 한족을 구분한 이원적 체제를 가졌다고 보았습니다. 요나라의 경우 북면관(유목민족 통치), 남면관(농경민족 통치)으로 나누어 통치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북위 이후의 국가들(서위→북주→수→당 전기)이 침투왕조가 되어 한족문화에 흡수되었다고 보는 중국적 관점이 맞을까요? 저는 오히려 이 국가들은 본질적으로 ‘통합왕조’(Unified Dynasty)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통합왕조’란 유목민족 문화와 한족 문화의 통합을 시도한 왕조를 의미합니다. 즉, 유목민족 문화가 독자적 문화만 고집하거나 혹은 한족문화에 흡수되어 예속된 것이 아니라, 이 둘의 장점들을 합쳐 전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갔다는 겁니다. 흔히 한족 옷을 입고 한족 말을 쓰도록 하는 등의 한화정책을 펼친 북위의 효문제의 경우를 한족과 융합되는 과정에서 유목민적인 것을 버리고 단지 한화되어간 것만 잘못 부각시키곤 합니다. 하지만 유목민적인 요소들이 그 문화에는 이미 전제되어 있고 강하게 배어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북위 정책의 최종목적이 ‘호한의 구별이 없어지는 융합’이었기 때문에, 한화정책만을 고집한 침투 흡수된 정책이 아니라 호한의 ‘통합정책’을 추구했다고 여기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통합왕조’로서 중국을 통치한 북위 → 서위 → 북주 → 수나라 → 당나라

  북위에서 시작된 ‘통합왕조’의 정책들과 제도들이 후속 국가들인 서위 → 북주 → 수나라 → 당나라로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다음의 역사적 사실에서 선명히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새로운 토지제인 ‘균전제’는 북위의 효문제 대에 처음 시행되었습니다. 사실 언제든 이동할 수 있는 유목민족에게 토지는 농경민족만큼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족과 융합한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정된 토지제도가 있어야 했기에 균전제를 만든 겁니다. ‘균전제’란 정부가 직접 토지를 분배하고 회수하여 대지주의 토지 소유를 억제하고 농민들에 대한 직접 통치를 강화하려는 제도입니다. 이후 이 제도는 각 통합왕조에서 이어가며 시행되다가 수나라에 이르러서 조세제도인 ‘조용조’(토지세-조(組)와, 요역에 대한 세금-용(庸)과, 특산물에 대한 세금-조(調)를 걷는 제도)와 병제인 ‘부병제’(병농일치를 목적으로 3년마다 1번씩 징집되어 근무하는 제도)로 세부적으로 발전, 확장되었습니다. 이 세 가지 제도가 점차로 서로 상호 보완하면서 발전하다가 당나라에서도 이 제도들을 이어갔습니다. 특히 ‘부병제’는 서위의 ‘8주국과 12대장군 군사제도’가 모태가 되어 발전된 제도입니다. 이 군사제도의 우두머리로 있었던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이 ‘북주’를 세웠고, 수나라를 세운 양견의 부친인 양충과 당고조의 조부 이호 모두 북주 이전의 왕조인 ‘서위’에서 대장군으로 있었던 것을 보면 이런 군사체제가 호족 왕조가 이어지는 것과 함께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발전한 것이 분명합니다. 


  둘째로 호·한 사이의 ‘통혼정책’에서 ‘통합왕조’의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정책 역시 효문제 통치기에 장려되기 시작되면서 한족왕조로 잘못 알려진 당나라의 황실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선비족인 독고신의 딸이 당 고조의 이연의 모친이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한족과 유목민족의 피가 이리저리 뒤섞여지게 되면서 두 혈통의 명확한 구분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이런 점 때문에 당나라의 통치자는 한족국가의 ‘황제’라는 지위를 가지는 동시에, 유목국가의 최고통치자인 ‘천가한(하늘에서 내려온 칸)’이라고 한 주장에서 이런 통합왕조의 면이 잘 드러납니다. 


  셋째로 유목민 성(姓)을 ‘한족 성’으로 바꾸는 것도 효문제 시대에 시작됩니다. 그래서 북위의 황실이 유목민족적 성인 ‘탁발’씨(두 음)에서 한족의 정주민족적 성인‘원(元)’씨(한 음)로 성을 고칩니다. 이러한 정책이 얼핏 보면 유목국가에서 한족국가로의 일방적 전환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후대에 사실상 유목민들이 한족의 성을 가지고, 한족들도 유목민의 성을 가지는 쌍방이 융합되는 형태로 변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서위 말경에 한족의 성으로 고쳤던 수나라 양견의 부친 양충이 ‘보육여’라는 북방 유목민의 성을 하사받았고, 원래 한족인 이들에게도 유목민의 성을 주었고, 당나라 황실도 ‘대야성’을 가졌습니다. 즉 수, 당 양국은 유목민족과 북방민족의 두 가지 성을 모두 지닌 민족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통합왕조’로써 화려하게 꽃 피는 당나라의 기미정책과 실크로드

  이렇게 이어져 내려오게 되는 통합왕조들은 점점 더 발전하며 당나라 시대에 문화적으로 화려하게 꽃핍니다.

  특히 당나라가 시행한 ‘기미정책’은 호한이 융합한 가운데 그 밖의 이민족들을 향해 행해진 가장 발전적 정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미정책이란 ‘고삐는 느슨히 잡되 끈을 끊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각 지방에 도독부나 도호부를 두어 전체적으로 감독은 하지만, 각 변방지역의 왕과 추장 등의 지배자들에게 그 지역의 자치를 맡기는 정책입니다. 그 대신에 당 조정을 찾아가 알현하거나 세금을 납부할 경우와 때에 따라 군사적으로 동원되어야할 의무만 주어졌습니다. 이 정책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에는 그 지역 자치구라고 할 수 있는 기미부주가 무려 856개나 되었을 정도였고, 그 결과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사방의 나라들이 투항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이것으로 다양한 유목문화가 파괴되지 않는 결과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수도를 중심으로 이 문화들이 얼마든지 모이고 섞여서 새롭게 창조되어 또 다시 전파될 수 있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실크로드’는 바로 이런 기미정책을 통한 문화융합을 활성화시키는 촉매 역할과 더불어 서역의 수많은 문화까지 융합하는 통로였던 셈입니다. 실크로드는 한나라 이전 시절에도 있었던 물질의 교역통로였지만, 당 왕조는 확장된 개념인 물질에서 종교까지의 문화를 교류하는, ‘컬쳐로드’를 가장 잘 활용한 왕조가 되었습니다. 특히 장안과 낙양은 가장 큰 국제무역의 도시가 되면서 모든 문화가 모여드는 ‘융합의 중심축’이 되었습니다. 장안을 중심으로 한나라 시절부터 영향을 끼친 불교와 더불어 경교(시리아 기독교), 마니교(명), 요교(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 등의 종교들이 급속도로 전파되었으며 호병이나 호복, 향료, 약물, 각종 식물들, 과일, 보석, 염료 등에서 엄청난 교역량이 있었고 천문학이나 의학과 같은 학문들도 들어왔습니다.


< 당나라 장회 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 654∼684)의 묘에 그려진 벽화 >

당나라 장회태자 묘에 그려진 벽화로 당나라에 왔던 사신들을 그린 것입니다.

가운데에 뾰족한 모자를 쓴 사람이 신라 사신일 것이라고 하는데 그 당시 당나라의 국제성이 드러나는 벽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합왕조’를 포기하며 자멸해가는 당나라

  이렇게 문화적으로 당나라는 화려하게 꽃을 피웠지만 결국 자멸의 길을 걸었습니다. 자멸의 원인으로 명확하게 드러난 가장 큰 사건은 안녹산의 난이지만, 그 근본적 원인은 당나라 사회의 문화적 안락함으로 생긴 자만과 도덕적 타락에 있었습니다. 이 타락이 당황실의 정치적, 군사적 무능을 야기했으며, 통합을 추구하였던 왕조의 당당한 외향적 모습 대신에 지금 당장의 안정을 추구하는 내향적 정책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을 상징으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통합왕조의 틀을 이어왔던 토지제도, 군사제도, 조세제도의 변화입니다.


  당나라 중기를 지나면서 토지제도는 ‘균전제’에서 ‘장원제’로 변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제도적 변화가 필요하긴 했습니다.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농민들에게 나누어줄 토지가 부족해졌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균전제의 유지가 불가능해지면서 새로운 제도로 ‘장원제’를 택하였고, 이로 인해 균전제와 맞물려 돌아가던 조세제인 ‘조용조’가 ‘양세법’으로, 군사제인 ‘부병제’가 ‘모병제’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들, 특히 부병제에서 모병제로의 변화는 문화융합을 이루었던 틀 자체를 깨버렸습니다. 또 기미정책의 핵심이었던 ‘6도호부 체제’를 ‘10절도사 체제’로 변화시키면서 자신의 문화를 지닌 채 당나라에 속했던 수많은 이민족들과의 연결을 스스로 끊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당의 황실 권력이 절도사들에게 옮겨가면서 장안의 문화 융합의 중심성이 붕괴되었고, 절도사였던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의 혼돈만이 남아 당나라는 명목상으로만 유지될 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당나라의 이런 변화는 ‘통합국가로의 정체성’은 버리고 단순히 국가와 황실만 유지하는 것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물론 당나라는 그 이후 약 150년 더 지속하게 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당나라 초기에서 중기까지 최고로 성취되었던 ‘문화융합 국가’라는 웅대한 기상과 자신감은 사라지고, 국가존립을 위협하던 반란과 진압이 반복되는 혼돈의 시기였기 때문에 이런 제도적 변화는 궁극적으로 실패한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21C 현재 우리는 비록 좁은 한반도에서 살아가지만 당나라 이상의 문화적 안락함과 풍성함, 교류가 넘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실크로드 이상으로 세계 각지로 교통이 연결이 되어있어 얼마든지 빠르고 쉽게 이동할 수 있으며, 인터넷의 발달은 세계의 문화를 클릭 하나로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당나라가 가지는 사회적 문제보다도 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노령화 사회와 취업난 등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야하지만 매일 같이 신문에는 엇갈린 정책들만 보여집니다. 후기 당나라의 퇴보가 주는 역사적 교훈이 있다면, 현대의 문화적인 안락함이 주는 욕망만을 갈망하는 문화를 극복하고 당장의 안정만을 유지하려는 정책을 버리라는 겁니다. 반면에 전기의 당나라가 주는 교훈이 있다면 북위를 이어받아 유목민문화와 한족문화를 통합하는 통합왕조로의 정체성을 가지고 당시에 최고의 문명을 이루어 가는 것일 것입니다. 즉 서양문화(미국, 유럽)와 동양문화(한국, 중국, 일본)가 아닌 우리 각자가 이제는 ‘세계인’이라는 정체성 속에서 창조적이고 융합적인 ‘세계문화’를 이루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기도 군포시 송바울

sbwtorah@naver.com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97호 >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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