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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 대오서점 이야기

2018년 10월호(제108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10. 7.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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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단혜 에세이]



서촌 대오서점 이야기




햇살을 벗삼아 서촌을 걷습니다. 서촌은 경복궁의 서쪽입니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골목에 들어서면 아주 작은 것들이 말을 걸어옵니다. 무심코 내놓은 화분에서는 오래된 시간의 향기가 납니다. 어릴 적 어른들의 신을 거꾸로 신은 어린아이가 되어 신발을 끌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아니 뒷걸음으로 걷는 것 같습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과의 약속이 있는 오후처럼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기다리듯 천천히 걸을수록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곳입니다. 상점들은 도도하리만치 사람을 유혹하지 않습니다. 물건을 파는 게 목적이 아니라 마치 구경만 시켜주는 것 같습니다. 

양파 파는 인디언 노인이 생각납니다. 망에 걸린 양파 자루를 몽땅 사겠다고 하자 그렇게 팔 수 없다며 양파를 팔러 온 게 아니라 내 인생을 팔러 왔다던 노인의 이야기 말입니다. 종일 이 일을 천천히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한꺼번에 사가면 할 일이 없어지지 않느냐고 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서촌을 걸으며 ‘느림의 미학’을 배웁니다. 지금 하는 일을 천천히 오래 깊이 사랑하고 싶어집니다.


서촌의 터줏대감 ‘대오서점’을 소개합니다. 600년 서울 역사에서 67년 된 가장 오래된 서점입니다. 스물셋 이던 새신랑과 열아홉이던 신부가 지켜온 시간의 세례를 받은 곳입니다. ‘대오’는 ‘조대식’ 할아버지와 ‘권오남’ 할머니의 이름에서 한 자씩 가져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하나씩 떼어 내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던 아날로그식 사랑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이름입니다. 서점을 자식처럼 지켜온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혼자가 된 할머니는 이곳을 정리할까도 생각했지만 오래된 서점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문을 닫을 수가 없었답니다. 너무 사소해서 보잘것없는 공간은 우리에게 추억을 선물합니다. 서점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대오서점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1,000원짜리 엽서를 사면 서점방문기념 도장을 찍어줍니다. 다른 한 가지는 대오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 집안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하루에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거리를 지납니다. 

한옥이 좋아서 혹은, 헌책이 좋아서 영화촬영지라서 아이유의 앨범 재켓 사진을 찍어서가 아닙니다. 옛날이 그리워서 엄마 아빠의 추억의 장소를 찾는 젊은이와 삼삼오오 손잡고 오는 중년들로 카페는 살아납니다. 카페는 할머니의 막내딸인 ‘조정원’씨가 운영합니다. 얼마 전에는 음악을 전공하는 손자 ‘장재훈’에 의해 마당에서 작은 음악회도 열렸습니다. 할머니는 음악회의 특별게스트로 다듬이소리를 들려줍니다. 추억의 책장을 넘기듯 오래된 한옥에서 울려 퍼지는 다듬이소리가 들려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제대로 된 추억여행을 시켜줍니다. 툇마루에서부터 시렁까지 온 집안을 가득 메운 수천 권의 책과의 데이트에 가슴이 설렙니다. 

차를 시키려 카운터에 가면 숙제를 내준 공책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숙제는 ‘비슷한말, 반대말 10개씩 써오기, 구구단 5, 6, 7단 5번씩 써오기, 혼식 도시락 가져오기, 준비물은 왁스와 손걸레 그리고 오재미 만들어오기.’ 입니다. 레몬차를 한 잔 시키면 책상 서랍처럼 생긴 쟁반에 달고나가 함께 나옵니다. 아이들이 사용하던 작은 방에는 족자에 붓글씨로 수분지족(守分知足)이라고 쓴 가훈을 볼 수 있습니다. 분수를 지키며 만족하라는 말에 오래도록 눈길을 줍니다. 마루에는 태엽을 감아야 겨우 가는 시계가 3시 반에서 멎었습니다. 

할머니가 시집올 때 해 온 오동나무 장롱이 있는 안방을 둘러봅니다. 마루 밑에는 할아버지가 쓰시던 연장통에 오래된 녹슨 못에서부터 시간이 쌓아놓은 먼지마저 소품이 되어 줍니다. 가장 인상 깊은 곳은 바로 다락입니다. 마당에서 다락의 천장이 올려 다 보이는 다락방에는 할머니와 손자가 얼굴을 내민 사진이 붙어있습니다. 

옛날을 추억하는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할머니 시집오던 날 사진부터 이곳을 방문한 한 학생이 할머니께 드리는 편지도 있습니다. ‘할머니 지난번에 사진 찍게 허락해주셔서 감사해요. 이 사진은 제가 좋아하는 사진이라 이렇게 놓고 갑니다. 다음번에 맛있는 거 사서 할머니 또 뵈러 올게요. 건강하세요.’ 마치 손녀딸이 할머니에게 보내는 것처럼 정겨운 글귀에 웃음을 붙여 놓습니다. 헌책을 살 수 없는 오래된 서점에는 이렇게 이야기가 쌓여갑니다. 달고나 같이 달달한 시간이 천천히 흐릅니다.




수필가 김단혜, blog.naver.com/vipapple 
시집<괜찮아요, 당신>
 책리뷰집<들여다본다는 것에 대하여> 
       수필집<빨간 사과를 베끼다>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08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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