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80대 농부가 사는 삶스마트폰의 장벽

2023년 6월호(164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4. 3. 19. 19:25

본문

80대 농부가 사는 삶
스마트폰의 장벽

 

가정환경조사서에 부모님 학력을 적어내라고 하던 학창 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빈칸을 채울 때, 국민학교 중퇴를 머뭇거리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다른 친구들과 비슷한 처지여서이기도 했겠지만, 학력이란 것이 부모님을 부모님으로 보는 데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감출 이유가 없어서겠구나 짐작해 본다. 


아버지는 4학년 때, 엄마는 2학년 때 전쟁이 났다. 엄마는 아직도 보청기를 보추기라고 쓰신다. 그렇게 자신만의 암호처럼 달력에 써놓고 건전지를 갈아주지만 아버지는 좀 다르시다. 시골에서도 빈틈없다는 소리를 들으신다. 70년대부터 하우스 농사를 잘 지어 동대문 청과시장에서 너도나도 아버지와 줄을 대려고 애썼다. 60이 다 된 연세에도 주민센터에서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해 86세가 된 지금도 가락시장 시세를 주시한다. 자동차 면허도 단박에 따서 엄마의 환심을 샀다. 그런 아버지께서 넘지 못하는 벽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스마트폰이다. 조카의 스마트폰을 빌려 영상통화를 시도하니 부모님의 귀만 보인다. 얼굴 보고 통화하는 일은 상상도 못 하시고 두 분이 번갈아 가며 전화기에 귀만 갖다 대신다. 처음으로 부모님의 귀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보청기를 낀 귀, 귀지도 살짝 보이는 검은 구멍.


“엄마, 전화기에 얼굴을 비춰 봐요. 귀는 떼고. 그치. 얼굴. 나 보여요?”
 “거기 있네. 우리 딸 희정이가.”
얼굴을 보자고 애걸복걸하여 통화가 끝나갈 무렵에 겨우 부모님 얼굴을 뵈었다. 엄마는 요술상자라도 본 듯 놀라워하신다.
 
한때 ‘이대 나온 여자야’란 우스갯소리가 유행하였지만, 흙먼지 마셔가면서 손이 발이 되도록 일하시는 부모님에게 학력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장신구에 불과하다. 논 팔고 밭 팔아 자식을 서울로 유학시킨 뒤 부모가 초라한 입성으로 서울에 왔더니 자식이 박대했다는 말은 그래서 믿을 수가 없다. 부모가 자식을 있는 그대로 굽어보는 것처럼 자식도 부모를 있는 그대로 우러러 보는 것은 가까이서 그 삶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이 누군가를 속여서 일확천금을 번 적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아무리 허술한 옷을 입고 더러운 신발을 신고 있어도 부모를 감추고 부끄러워 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토지》(박경리)에서 홍이는 혈육인 임이네의 탐욕에 몸서리친다. 대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무당의 딸 월선이가 엄마이길 갈망한다. 멀쩡한 엄마를 두고 다른 사람을 마음의 엄마로 삼는 것은 그녀의 선량한 마음 때문이다.  


맞춤법도 모르고 스마트폰도 사용할 줄 모르는 부모님, 지금도 비닐하우스 속에서 콩죽 같은 땀을 흘리며 부추를 깎고 계실 부모님. 그 근면함이 천하제일이기에 부모님의 학력을 부풀리거나 돋보이게 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세대가 달라 정치적인 견해가 다를 때는 팽팽하게 맞서지만 말이다^^) 대학이 아니라 대학원까지 나온 데다가 스마트폰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나이지만, 내가 자식에게 그만한 본을 보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주저된다. 자주 흔들리고 자주 어리석으며 자주 얽매인다. 오늘따라 얼굴에 모닥불을 피운 것처럼 화끈거린다. 

 

 

경기도 의정부 박희정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64호>에 실려 있습니다.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는 

  • '지역적 동네'뿐 아니라 '영역적 동네'로 확장하여 각각의 영역 속에 모여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스토리와 그 속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문명, 문화현상들을 동정적이고 창조적 비평과 함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국내 유일한 동네신문입니다.
  • 일체의 광고를 싣지 않으며, 이 신문을 읽는 분들의 구좌제와 후원을 통해 발행되는 여러분의 동네신문입니다.

정기구독을 신청하시면  매월 댁으로 발송해드립니다.
    연락처 : 편집장 김미경 010-8781-6874
    1 구좌 : 2만원(1년동안 신문을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예금주 : 김미경(동네신문)
    계   좌 : 국민은행 639001-01-509699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