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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의 컬쳐 로드

2023년 6월호(164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4. 3. 23.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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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의 컬쳐 로드

 

살다 보면 때로는 서글퍼질 때가 있다. 내가 전엔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씁쓸한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그때는 바로 스스로 감정이 메말랐다고 느낄 때이다. 꿈 많던 학창 시절을 지나 사회인으로 살아간 세월이 길수록, 일상이 너무 바빠서 멍 때릴 시간도 없이 나를 마주할 시간도 없이 지낸 시간이 많을수록 그런 기분을 느낀다.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문득 돌아보면 나 자신을 잃고 살았다고 느낄 때, 분명히 어떤 상황에서 기쁘거나 슬프거나 확실한 감정을 느꼈으면 하는데… 심드렁한 나를 발견할 때, 그때는 잠시 나를 돌봐야 하는 때다. 모든 일정을 멈추고 내 감정이 말랑말랑하게 살아나도록 자신을 보살펴야 하는 때다. 
모처럼 약속이 없는 주말, 평상시와는 다르게 약간의 늦잠을 자고 일어나 창밖을 보니 나뭇가지가 가볍게 흔들리고 하늘은 파랗다. 조금은 바삭해진 나의 감성을 촉촉하게 해줄 수 있는 공연 <스노우 맨>을 보러 마곡에 있는 LG아트센터 서울에 가려고 한다. 공연 시작까지 시간이 남아 있다면 바로 옆에 있는 서울식물원에 들러서 도심의 여유를 느껴도 좋다. 아직은 나무들이 아름드리까지 자라진 않았지만 계획적으로 조성된 신도시에서 이만한 공원을 찾아보긴 어렵다. 이곳은 마치 뉴욕 한가운데 있는 센트럴파크 같다. 휴일을 맞아 가족 단위로 많은 사람들이 식물원을 찾는다. 아이들은 초록 잔디 위를 뛰어다니고, 자전거를 타고 공원을 달리는 연인들, 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놓고 모처럼 여유를 만끽하는 아빠와 엄마… 이 풍경은 마치 쇠라의 <그랑 자뜨 섬의 일요일 오후>라는 그림을 떠올린다. 아마도 점심을 위해 싸온 도시락은 김밥이지 않을까? 

공연장에서 준비되고 있는 공연은 막스 밀러, 찰리 채플린, 마르셀 마루소에 이어 21세기 광대 예술의 계보를 잇는다고 평가받는 러시아 최고의 광대 슬라바 폴루닌의 <스노우 맨>이다. 이 작품은 꽤 여러 차례 한국에서 공연되었던 작품인데 1993년 러시아에서 초연된 후 20여 년간 전 세계 100여 개 도시 관객들을 만나 왔다. 영국 로렌스 올리비에상과 러시아 골든 마스크 등 세계 각국의 권위 있는 연극 상들을 휩쓸었다. 현란한 언어와 첨단 기술 없이 따뜻한 아날로그 감성으로 가득 찬 이 작품을 관통하는 정서는 추억과 향수. 폴루닌은 눈 덮인 러시아 고향과 유년 시절을 떠올리며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마치 무성영화 속 찰리 채플린을 연상시키는 광대들은 아무 대사 없이 인생의 희노애락을 담은 짧은 에피소드들을 펼쳐 보인다. 재치 있는 소품들, 음악과 조명으로 채워지는 아름다운 장면들이 정교하게 연출되어 디지털로는 구현할 수 없는 감동의 스펙터클을 펼쳐낸다. 이 공연의 특징은 공연을 보는 관객들 각자 자기 나이에 맞는 감동을 한 공간에서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특히, 엔딩 장면에서 객석으로 몰아치는 거대한 눈보라는 관객들에게 잊을 수 없는 장관을 선사한다.
공연의 감동을 안고 천천히 극장을 걸어 나오며 건축적인 아름다움도 느껴보았다. 이 공연장은 일본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해 4년 6개월 공사기간 동안 약 2500억 원의 공사비를 들여 완성한 극장이다. 특히 길이 80M, 높이 10M에 달하는 ‘튜브(TUBE)’라는 공간은 LG아트센터 서울의 지상을 관통하는 타원형 통로다. 지하철을 이용하거나 지하 주차장을 이용하여 극장에 들어오는 관객은 이 통로를 지나면서 현실에서 벗어나 공연장이 주는 환상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 같은 경험을 느끼게 될 것이다. 

건축이 주는 영감에 감동받았다면 자연스럽게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일컬어지는 ‘프리커츠 상’을 수상한 안도 다다오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 그의 자서전을 통해 그가 정규 건축 공부를 하지 않았고 젊은 시절 복싱 선수였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무엇이 그를 건축의 세계로 이끌었으며 그 창의적인 아이디어의 원천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마침 지금 원주의 ‘뮤지엄 산’에서 그의 개인전 <안도 다다오-청춘>전이 열리고 있으니 공연의 감동이 가시기 전에 원주를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주에 위치한 <뮤지엄 산>은 생각보다 관람객이 많아 놀랐지만 나는 스노우 맨-LG아트센터-뮤지엄 산으로 이어지는 컬쳐 로드를 따라 감상 중이라서인지 많은 인파도 작품의 일부분처럼 느껴졌다. 안도 다다오는 이번 전시를 위해 미술관 곳곳에 푸른 사과 조형물을 설치해 놓았다. 전시장 입구에 높이 3M 규모의 사과 겉면에는 ‘영원한 청춘’이라고 일어로 쓰여진 안도의 글씨가 있다. “청춘이란 ‘인생의 시기가 아니라 어떠한 마음가짐’이라고 한 새뮤얼 울먼의 시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입니다. 10대, 20대가 아니라도 살아 있는 동안은 모두 청춘이에요”라고 안도 다다오가 어느 잡지의 인터뷰에서 답했었다. 이번 개인전을 천천히 둘러보고 나니 암에 걸려 담낭, 십이지장 등 내부 장기를 5개나 떼어내고도 현역에서 활발히 작업을 하고 있는 그의 창의력의 근원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100세 시대를 맞이하여 지적 체력과 신체적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끝없이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다니고 있다고…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지금은 70이 넘은 나이지만 어린 시절 아름다웠던 추억을 간직하고 그것을 멋진 공연에 녹여내어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슬라바 폴루닌과 나이 앞에 굴하지 않고 영원한 현역으로서 계속 창의적인 건축물을 선보이는 안도 다다오는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어른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주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감성이 메마르기 전에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길 잘 한 것 같다. 며칠 동안 노력하니 작은 일에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자주 들고 나를 둘러싼 것들 중 눈에 띄지 않지만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다고 느끼게 된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고속도로는 조금 막혔지만 대신 천천히 움직이는 차 안에서 지는 해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서쪽 하늘의 노을이 참 곱다. 

서울 예술의전당 손미정
mirha2000@naver.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64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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