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이 되면 봉숭아꽃이 지천에 깔렸다. 누가 심어 놨는지 몰랐지만 동네 아이들이 꽃부터 잎사귀까지 뜯어가도 혼을 내지 않았던 여름날이었다. 꽃잎이 진초록으로 변할 즈음 꽃은 하얗게, 붉게, 때로는 아이의 불그스름한 뺨처럼 연분홍으로 대롱대롱 핀다. 봉숭아꽃이 줄기에 간신히 붙어 있으면 여름날 세찬 소나기가 보드랍고 여린 꽃잎을 후드득 떨어뜨린다. 비가 그치고 나면 나와 친구들은 봉지 하나를 가지고 꽃잎을 쓸어 담았다. 가끔씩 꽃과 잎사귀에 딸려오는 작은 개미들을 종종 만나기도 하지만 그때는 그러거나 말거나 둥둥 떠 있는 꽃과 잎사귀만 헹구고 물을 버렸기에 지금 생각하면 작은 개미들에게 미안해진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제대로 보지 않고 다른 곳을 보며 꽃을, 잎을 뚝뚝 따내기도 했다. 아마도 내심 꽃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어서였을 거다.
동네 한 친구가 봉숭아꽃 물들이기를 시작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아이들의 손톱은 붉게 물들어 간다. 저녁노을 같은 주홍빛으로 살짝 물들인 친구가 있는가 하면 손톱 테두리가 새까맣게 탈 정도로 빨갛게 물들이는 친구도 있었다. 봉숭아꽃 물들이기 준비는 당연히 꽃과 잎사귀가 기본이다. 꽃보다는 잎사귀를 더 많이 넣고 찧어야 붉게 물들여진다며 잎사귀를 더 넣는 친구도 있었고, 백반을 많이 넣어야 한다는 둥, 그것도 아니면 괭이밥도 같이 넣어서 찧어야 효과를 본다며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온갖 방법들이 여름철에 나돌았다. 귀가 얇은 나는 잎사귀도 더 추가하고, 괭이밥도 뜯어다가 넣고, 백반도 한 알 넣는 것 두 알 넣고 절구에 찧었다. 찧어 놓은 봉숭아꽃을 냉장고에 넣어 두고 식당으로 일 나가신 엄마를 목 빼고 기다렸다. 일 나갔다 돌아오신 엄마는 툇마루에 나를 앉혀 놓고 검은 봉지를 직사각형 여러 개로 잘라 놓았다. 냉장고에 넣어 둔 봉숭아꽃은 그 이전의 모습과는 다른 향을 내며 붉은 즙을 뱉어냈다. 짓이겨진 꽃을 손톱 크기만큼 덜어내어 손톱 위에 올려놓고 잘라 진 비닐로 손가락을 조심히 감싼 후 두꺼운 무명실로 동여맸다. 그렇게 손가락 열 개를 꽁꽁 싸매고 봉숭아꽃 물이 이불에 물들까봐 팔을 만세 자세하며 잠을 잤다. 하지만 잠들기 전의 자세는 어디까지나 깨어 있을 때의 내 마음이었지 아침이면 도루묵이었다. 옷에, 이불에 물들었던 적이 많았다. 봉숭아꽃 물들이기는 아침 기상을 앞당겼다. 재빨리 일어나 손가락에 묶었던 실을 풀어내거나, 아예 비닐 통째로 벗겼다. 세수 대아에 물을 받고 밤새 쭈글쭈글해진 손가락을 쫙 편다. 손톱만 물들인 게 아니라 손가락까지 물들어 버린 열 손가락이 참 어여뻤다.
해마다 치러지는 여름날의 행사는 시간이 갈수록 요령이 생기기도 했다. 봉숭아꽃 물들이기 전에 손톱을 제외하고 손가락에 매니큐어를 미리 발라 놓으면 손톱만 예쁘게 물들일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엄마는 손가락에 매니큐어를 발라주기도 했다. 하지만 꽃물이 매니큐어가 덜 발라진 곳에 지나는 걸 예상하지 못한 터라 결국 손가락이 얼룩덜룩해지는 날도 있었다. 다행히 살에 물들여진 봉숭아물이 지워진 다음은 정말 예뻤다. 가끔은 엄마 화장대 위에 투명 매니큐어를 가져와 손톱에 칠하면 반짝반짝하니 윤이 났다. 나는 봉숭아물을 들이고서는 손톱을 잘 깎지 않는 버릇이 생기기도 했다. 봉숭아물이 첫눈 올 때까지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거나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말들을 맹신했다. 내겐 첫사랑은 아직 찾아오지도 않았을 테지만. 엄마의 잔소리에 못 이겨 다른 손톱들은 잘랐어도 마지막 새끼손가락의 손톱은 사수했었다. 그해 겨울까지 간신히 남아 있는 빛바랜 봉숭아꽃물은 지나간 여름의 증거로만 남아 있었을 뿐 첫눈과 함께 무언가를 이루어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런 여름날의 행사도 나이 먹어감에 따라 점점 잊혀졌다. 산동네에서 아랫동네로 이사를 온 이후 봉숭아꽃이 잘 보이지도 않았고 수고를 들여 물들이는 것보다는 화장품 가게에서 쉽게 살 수 있는 형형색색의 매니큐어들이 사시사철 있으니 굳이 봉숭아물을 들일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문구점에 손쉽게 봉숭아꽃 물들이기 키트가 있지만 해 본 적은 없다. 3년 전 문득 생각나 아파트 화단에 떨어진 봉숭아 꽃잎을 주워와 딸과 함께 봉숭아꽃 물들이기를 해봤다. 아이는 신기했는지 나를 따라다니며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어린 날의 그때처럼. 나는 아파트 화단에 떨어진 봉숭아꽃과 잎사귀를 봉지에 담아 와서 물에 씻었다. 그리고 약국에서 백반 하나를 급히 사와 절구에 봉숭아꽃과 잎사귀, 백반을 조금 넣고 콩콩 찧었다. 열 손가락에 모두 물들이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워 양손에 두 개씩만 물을 들였다. 아이는 실로 손가락을 묶는 것이 불편한지 언제 푸느냐고 연신 물어댔지만 다음날 달라진 손가락을 보고 예쁘다며 친구에게 자랑하기도 했다. 친구 역시 아이의 손가락을 보고 봉숭아꽃을 물들였단다.
두 손가락에 물든 노을 닮은 주홍빛이 내려앉은 그해 여름 가을 동안 나는 조금 더 행복했다. 봉숭아꽃 흐드러지던 어린 시절 동네 생각에, 그 시절 함께 꽃물 들이며 놀던 친구들 생각이 손톱을 볼 때마다 떠오르곤 했다. 그때 사용했던 백반은 다시 서랍에 넣고 2년째 그대로이다. 그리고 나는 화단에 봉숭아꽃이 있던 아파트에서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왔다. 이곳에도 7월이 되면 봉숭아꽃이 보일까. 그리고 나는 다시 백반을 꺼내 꽃물을 들일까. 봉숭아꽃 피는 7월이 다가오고 있다.
충남 천안시 이행순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64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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