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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소중한 시인

2018년 12월호(제110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12. 16.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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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단혜 에세이]



내가 만난

소중한 시인



 



 물 위인들 걷지 못할 게 없다며 시퍼런 청춘을 소비했던 겁 없던 20대. 그때 만난 여자는 불꽃처럼 살다가 전설처럼 사라진 전혜린이었다. 그리고 이십 년 후 40대에 다시 한 번 살아있는 전혜린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치열하지도 않았고 열정적이지도 못했다. 단지 선택된 자아의식 속에서 사랑과 이별을 이야기했다. 한 해의 끝자락 즈음엔 관념적인 단어로 감정의 부스러기 같은 문장을 툭툭 던졌다. 가끔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고 시가 되지 못한 시를 끄적이며 시처럼 산다고 자부했다.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큰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살만한 것으로 생각했다. 모든 것은 자명한 것 같아도 나에 의해서가 아니면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던 때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가 귀로 들렸다. 나이를 먹는 것은 두렵지 않았지만 한 시기에 달성하지 못하고 지나가 버리는 것이 두려웠다. 그녀를 만나고 머리가 쭈뼛하고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도시의 화려한 불빛이 너무 잘 어울리는 A 시인. 그녀는 혜성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 목마른 계절을 그리워하던 나의 갈증에 목을 축였다.


 신춘문예 등단 시인이라는 화사한 이름도 좋았다. 시인은 밥을 굶어도 배가 고프지 않고 시가 고플 거라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80년대 시인들처럼 가난을 무기로 시를 쓰지도 않았고, 낭만에 기대어 촉촉한 시어로 문학을 기만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시는 말랑말랑하지 않고 보석처럼 가슴에 박혔다. 내게 시는 일종의 푸념이었고, 못다 이룬 꿈의 조각이었으며, 떠나보낸 첫사랑이었다. 산다는 것이 얼마만큼 시시해지고 고단할 때 손바닥에 꺼내 놓고 허망하게 들여다보고 싶은 마지막 보루였다.  


 시인이 되고 싶어 하는 내게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다. 목숨처럼 하고 싶은 일이 있었나? 그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한 적은 있었던가.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 생각을 하며 그녀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직장도 놓고, 차도 팔고, 십년을 도서관에 오르며 읽고 싶은 책을 읽었다고 고백했다. 문자 중독이었다. 글자로 된 것이면 무엇이든 읽기 시작했다. 그전에 읽던 방식이 아니었다. 밥을 먹듯 책을 읽어 내려갔다. 다이어리에 그날 읽은 책 제목과 작가, 읽은 동기며, 읽으면서 드는 느낌을 빼곡하게 쓰기 시작했다.


 첫 해는 바람의 딸 ‘한비야’처럼 일 년에 100권을 목표로 삼았다. 한비야는 그렇게 바쁘게 세계를 여행하면서도 100권을 읽는다고 했다. 잠을 안자거나 이틀에 한 번 자면서 읽었다. 첫해부터 목표 초과달성이었다. 200권이 훨씬 넘었으니까 다음 해에는 목표를 365권으로 그러니까 하루에 한 권을 목표로 삼았다. 물론 거뜬하게 읽어 내려갔다. 다음 해도 또 그다음 해도 책 읽기는 이어졌다. 그림으로, 시로, 영화로 끝없이 이어지는 카테고리식 책 읽기로 배가 불렀다. 책 읽는 장소도 변화를 주었다. 집이나 도서관에서뿐 아니라 산과 바다, 공원, 벤치로 옮겨졌다. 연휴나 방학이면 어디로 놀러 갈 것인가를 정하기에 앞서 무슨 책을 읽을 것 인가를 먼저 정했다. 월급의 10분의 1을 책을 사는 데 썼다. 지갑이 얇아져도 서점에 갔고, 외로워도 책을 들었다. 기분이 좋아도 도서관을 찾았고 약속이 있는 날은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읽은 후 약속 장소로 갔다. 오전에 도서관을 못 가는 날이면 퇴근 후에라도 들렀다. 곧장 집으로 가는 날이면 책을 읽은 후, 저녁 준비를 했다. 목표는 A 시인처럼 십년이 목표였다. 책을 읽다가 이 길이 내가 가고 싶은 길이 맞나 싶을 때는 그녀가 사는 아파트 놀이터에 앉아 있다 오곤 했다. 15층 꼭대기에서 그녀가 읽고 있을 책의 페이지를 함께 넘기다 가로등 불빛을 뒤에 두고 걸었다.




수필가 김단혜
blog.naver.com/vipapple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10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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