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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옷은 한편의 시(詩)다!" - 패션디자이너 이림을 만나다

예술/디자이너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7. 7. 6.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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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김미경이 만난 사람]

 

    “이 옷은 한편의 시(詩)다!”

        - 패션디자이너 이림을 만나다

 

  청담동 패션디자이너 이림 의상실을 방문하는 날! 며칠 동안 계속되는 쾌청한 날씨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청담동 성당 쪽으로 올라가자, 유럽스타일의 독특한 분위기의 건물과 ‘이림’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죠. 조금 긴장된 가운데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나이 지긋한 한 분이 맑고 명료한 목소리로 저희를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대뜸 ‘저에게 장인, 장인하는데, 저는 그냥 바느질쟁이예요. 바느질쟁이!’ 라고 웃으며 말씀하시는데, 그 ‘쟁이’라는 말이 유난히 내 귀에 맴돌았습니다.

 

 

 

- 처음부터 ‘바느질쟁이’였나요?
  KBS가 남산에 있을 때 잠시 방송국 세트 미술을 했습니다. 밤에 퇴근하며 명동 대로변 고급의상실에 전시된 옷들을 볼 때마다 참 아름답다고 생각을 하던 중, 어느 순간 ‘나도 옷을 만들어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1967년 즈음 국제복장이라는 곳을 시작으로 패션에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옷을 배우며 이 길이 천직이라는 생각을 했다기보다 매일 매일 새롭게 디자인해야 하는 긴장감이 매력인 것 같아요. 대상에 따라, 시대에 따라, 옷감의 질감에 따라, 컨셉이 다르니 이 모든 새로움이 저에게는 아주 흥미롭고 재밌었죠. 이런 패션 세계의 매력에 50여년 지난 지금까지도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 디자이너의 덕목과 철학 
  평소 미술, 음악, 영화, 건축, 무용 등에 따라 풍부한 감성이 묻어난 철학으로 디자인 하려고 노력합니다. 디자이너는 옷에 대한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옷감의 종류마다 각기 다른 특징들을 잘 살려 사람들에게 맞추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디자이너니 내 옷이 빛나야 한다기보다 옷을 통해 사람들을 돋보이게 만들려고 하는 거죠. 그리고 옷에는 모던과 심플, 복고풍의 여러 트렌드가 있지만, 우아함과 기품이 꼭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1987년 이 의상실의 건물을 지었습니다. 건물을 지을 때 한 평이라도 더 이용해 내 건물만 돋보이게 하기보다, 옆에 있는 성당과 어우러지게 하려고 디자인했습니다. 그 당시 성당은 지금보다 작았죠. 뒤에 고즈넉한 청담공원이 있고, 제 건물 앞쪽에도 앞마당을 만들어 성당과 어우러진 가운데 사람들에게 ‘쉼’을 선물하는 마음으로 30년 전에 이 건물을 지은 거죠. 제가 자란 충남 공주 마을이 이랬어요. 어디든지 이웃들을 향한 여유와 배려가 있었죠. 특히 전나무가 빽빽하게 심겨져 있는 고등학교는 산의 능선을 따라가야만 갈 수 있었어요. 이런 환경들이 저를 감성적이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도록 만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물질이나 사람이 다 개성이 다른데 다른 면을 인정해주고 어우러져 살아야 하는 것이죠. 지금 우리나라는 배려하기보다는 각박하게 살아가는 것 같아 참 안타깝습니다. 

 

- 힘든 점
  지금까지 옷을 만드는 것 자체는 한 번도 지겹지 않았어요. 하지만 옷을 잘 만들고 예술성을 구현하려면 경제적인 것도 중요하고 마케팅도 잘해야 하는데, 이런 여러 복합적인 요소가 잘 조화되지 않을 때 힘이 듭니다. 시대에 따라 패션과 경제적인 것의 조화를 어떻게 맞추어 가느냐가 항상 관건이죠. 소비자들은 쉽고 빨리빨리 대응하는 것을 원하지만, 저는 스스로 가치를 어디에다 두느냐를 생각하며 제 스스로를 장인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힘들지만 천천히 욕심 없이 가고 있습니다.

 

- 패션 디자이너를 하면서 외국도 많이 다니셨을 텐데 우리나라와 많은 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점들을 배울 수 있을까요?
  프랑스는 젊었을 때 ‘프레타 포르테’, ‘쁘레비죵’ 등의 전시회에 많이 다녀왔습니다. 그러다 프랑스의 패션을 경영과 교육적인 차원에서 깊이 있게 본 것은 4년 전 ‘숄레’에 있는 ‘라세드 라모드’ 학교에서 강의할 때였습니다. 프랑스에서는 패션 장인들을 키우기 위해 청소년을 대상으로 정부가 전액 지원하는 시스템으로 고등학교 3년, 대학 2년, 총 5년을 교육하고 있었습니다. ‘루이비통’이나 ‘샤넬’등 세계적인 디자인을 하려면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죠. 바로 그 학교의 학장, 부학장, 교수가 저희 샵을 방문했는데, 장인 정신을 고집하며 운영하는 저에게 프랑스 학교에 와서 강의를 해달라고 제안을 하더군요. 특별한 커리큐럼도 없는데 무엇을 가지고 강의를 해야 할 지 난감해하는 저에게, 제가 그 동안 옷을 어떻게 만들어 왔는지 경험을 이야기해달라고 하더군요. 디자이너의 태도로서 천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등 1시간 30분정도 강의했는데, 저에게 아주 좋은 경험이자 추억이었고 한편으론 도전의 시간이었죠. ‘라세드 라모드’에서는 단순히 스킬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감성과 실질적인 교육을 같이 했습니다. 인연이 되어 저희 딸도 뉴욕에서 5년 공부하다 이 학교에서 3년 가죽 디자인을 공부했죠.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자기가 배워 헤쳐 나가야 하는데, 이런 교육시스템이 부럽더군요. 
  또, 놀라웠던 것은 그 사람들은 상대방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저와 아무리 친해져도 저의 사적인 것은 전혀 묻지 않습니다. 외모, 조건 등 외적인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저의 감정, 감성, 생각, 영감이 자기와 동질감이 있느냐를 중요하게 보더군요. 그래서 저는 도리어 외국을 다닐 때 스트레스가 없었습니다. 최근에 저의 아내가 다쳤다고 하니 이메일로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왔는데, 그 배려하는 마음이 고맙더군요. 이 ‘행복한 동네문화이야기’도 배려하는 문화를 추구하는 것 아닌가요? 전 신문의 타이틀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50여년 패션디자이너로 일하며 간직하고 있는 추억
  1979년 제가 처음으로 샵을 오픈 한 날, 손님 중에 한 분이 저녁 무렵 퇴근하고 오셔서 봉투 하나를 놓고 가셨죠. 그 안에는 구두티켓이 들어 있었는데 저에게 바쁜 것 같으니 내일 전화하겠노라고 하더군요. 다음날 전화를 하시더니 “내가 왜? 구두티켓을 주었는지 아느냐? 먼저 새 구두를 신으면 사람이 기분이 좋다. 그러니 항상 기분 좋게 일하고, 또 새 구두를 신으면 흠집이 생길까봐 조심하게 된다. 그리고 새 구두를 신으면 반짝반짝 닦으며 구두를 살피게 된다.”며 개업을 했으니 이 세 가지를 생각하라며 티켓을 준비했다고 하셨죠. 그 때 같은 사람이라도 감동과 깊은 여운을 주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떠들어도 사람만큼 큰 것도 작은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일을 하며 나 자신이 최고 디자이너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이 애쓴 것도 알아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직물을 만든 사람의 노고도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 최근 프리마돈나 여지원씨의 옷을 디자인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옷 속에 숨은 스토리가 있다고 하던데요?
  긴 시간을 하나를 향해 집중해서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게 특별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한마디로 무언가에서 우려내는 제 자신을 느꼈다고 할까요? 여지원 프리마돈나는 저희 손님의 딸입니다. 가정이 넉넉지 않았고 그리 유명한 음대를 다니지도 않았지만, 성악공부를 위해 이태리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마리아칼라스와 같이 공부한 아주 유명한 지휘자인 리카르도 무티(Riccardo Muti)의 부인 눈에 띄어, 이 부인의 추천으로 무티와 함께 공연까지 하게 되었어요. 이런 인연으로 여지원씨와 무티는 올해 4월경에 두 번의 공연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죠. 그때 여지원씨 어머님이 저를 찾아와 자기 딸이 한국에 오는데, 꼭 선생님 드레스를 입히고 싶다고 하더군요. 선생님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게 나올 것 같다고 하면서요. 저는 이 드레스를 만들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돈도 많이 받을 수 없고... 고민하던 차에 지휘자 무티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옷을 짓게 되었습니다. 무티가 수원 ‘행복한 대극장’에서 공연을 할 때, 여지원씨를 세우지 않으면 오지 않겠다고 했다더군요. 그분이 지휘료를 포기하면서까지 우리에겐 무명인 성악가를 고집하며 그녀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을 보면서, 무티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저도 돈을 떠나 드레스를 만들어 보자고 작정했지요. 그러면서 무대에서 잘 입는 반짝이 소재는 처음부터 배제하고, 지휘자 무티, 소프라노 여지원, 베르디 오페라와 맞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기 시작했죠. 주제는 베르디의 열정을 담은 ‘장미꽃’으로 정하고 거기에 맞는 패브릭을 찾고, 가슴의 라인과 소매를 블랙으로 대담함과 절제미를 강조하면 되겠다는 영감이 들자 순식간에 디자인이 완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졌어도 지휘자인 무티의 눈에 차지 않는다면 이미 이태리에서 준비해온 의상을 입어야하고,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확신을 가지고 만들었죠. 여지원씨가 떨리는 마음으로 그 드레스를 입고 공연당일 지휘자 무티에게 가니 무티는 “놀랍구나 이 옷은 한편의 시 같구나. 이 옷을 입고 공연하자” 라고 했다더군요. 저의 열정이 무티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큰 힘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롯데 콘서트홀에서 하는, 또 한 번의 공연에 때마침 제가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이날은 ‘제 스스로’를 확인하는 날이었습니다. 제 자신의 창작의 흥분감 이랄까요? 이런 건 50여 년 동안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콘서트홀의 우드 공간의 여백과 오케스트라와 무티, 장미꽃의 프리마돈나가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와 범접할 수 없는 도도함, 당당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또 다시 그때의 감동에 젖은 듯 했습니다) 여지원씨는 현재 이태리에 머물고 있는데, 8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열리는 베르디 축제에 이 옷을 다시 입고 공연하겠다고 했답니다.

   이림 (LEE LIM)
        1968년 국제 복장학원
        1973년 이림 스타일 부티크 오픈
        1982년 독립기념관 건립을 위한 하얏트 패션쇼
        1986년 F.I.T (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 이수
        1995년 유럽 대사 친선과 장애자 자선을 위한 패션쇼
        1997년 청담 문화 행사 자선 패션쇼
        2013년 프랑스 라세드 라모드 (lycee de la Mode)
                   패션 국립 학교에서 강연
        2016년 현 이림 스타일 대표로 디자이너 활동중


  옷 만드는 사람은 무엇보다 옷에 애정이 있어야 한다며 우리말에 적당히, 대충 대충해! 하는 말이 있는데 이런 말이 제일 싫다고 하시는 패션디자이너 이림! 카피를 하거나 중간 정도만 하면 어떤 경우라도 만족감은 없다고 하시며, 옷 속에 섬세한 감정을 집어넣을 때마다 아직도 긴장감을 느끼신다고 하시더군요. 대화 시간 내내 절제된 삶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순수한 열정과 장인정신 바로 이것이 이림을 더욱 빛나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서울 특별시 강남구 삼성로 716
02-540-3376
leelim1973@gmail.com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93호 >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