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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저 달을 움직였다' 박진호 사진가를 만나다

2020년 8월호(130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11. 1.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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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김미경이 만난 사람]

‘내가 저 달을 움직였다!’
‘박진호’ 사진가를 만나다

 

내가 저 달을 움직였다 #S11 54x80cm, 2017
내가 저 달을 움직였다 #1 60x60cm, 2016

 

 꼬인 내 인생, 사진으로 풀다
 새내기 상경계열 입학 대학생의 첫 경제원론 시간, 저는 곧바로 ‘아~ 인생 꼬였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수학을 잘 하지 못해서 어려울 것이라고는 짐작했지만 정말 그렇게 힘들 줄은 몰랐지요. 형과 누나들 모두 철학, 사회학, 영문학을 전공한, 이른바 문과 집안이었고 저 역시 마찬가지로 인문학 쪽에 관심이 많았는데, 막상 대학 입학을 앞두고는 제 의지와는 다르게 주위의 권유에 휩쓸려갔거든요. 적성에 맞지 않아 4년 내내 방황했습니다. (왜 바로 휴학을 하거나, 그만두지 않았나요?) 다른 길을 모색할 용기가 없었던 거죠. 결국 무사히 졸업하는 게 목표가 되었는데, 한 가지 다행이었던 점은 1학년 말 즈음에 사진에 관심이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4학년 1학기 때 동아일보 문화센터에 잡지에서만 보던 ‘홍순태’선생님의 사진 강좌가 개설되어 있는 것을 알고 곧바로 수강신청을 했어요. 12회 과정이 끝날 무렵 ‘아! 이게 내가 갈 길이다’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서울예술대학 사진과에 들어갔습니다. 

 

 

 네팔에서 내 인생을 결정하다
 29세, 1990년 절친한 후배와 단둘이 네팔에 갔었습니다. ‘팔파탄센’만년설 고봉이 도열하듯 서 있는 안나푸르나산군을 바라보며 제 인생 계획을 확정했습니다. 세 가지인데요. 첫째, 평생 사진가로 살다 죽겠다. 둘째, 유학은 가지 않는다. 작업은 자기 스스로 깨닫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셋째,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것이었어요. 첫 번째는 그 이후 줄곧 확고하게 지키고 있는데, 두 번째 유학 건은 참으로 갈등이 많았습니다. 여러 번 흔들렸죠. 척박했던 한국 사진계에 유학 다녀온 선후배들이 불러일으킨 새바람을 직접 경험하고 싶다는 욕망과 가깝게 지내던 선생님들의 권유는 수년 전의 결심을 끊임없이 흔들어댔습니다. 1997년 제 나이 만 35세, 주변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유학을 마친 후 그저 공부가 끝났다고 마냥 돌아오지 않겠다는 다짐을 수없이 하며 진짜 떠나려고 했었지요. 유학원을 운영하던 후배가 학비 싸고, 환경 좋은 미국 대학을 정말 열심히 찾아주었고, 졸업 후 플랜까지 만들어주었는데 막판에 눌러앉았습니다. 꼭 제가 한 결심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그게 크게 작용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착하게 사는 것은 네팔 여행 마치고 귀국해 김포공항에서 택시 타려고 할 때부터 상당히 많이 금이 갔고요.(웃음)

 첫 무작정 개인전, ‘아노미’ 
 2남 4녀 중 막내인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형제는 아홉 살 많은 둘째 누나였습니다. 그런데 그 누나가 그만 뇌종양을 앓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병원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고, 모든 가족이 다 둘째누나에게 매여 있었죠. 사실 이 병이 회복될 수 있는 병이 아니잖아요. 집안 분위기는 항상 무거웠고, 시간이 흐를수록 지쳐가는 가족들을 보며 저는, ‘누나! 누나도 힘들지… 빨리 가라~’라는 말을 혼자서 중얼거리기도 했습니다. 1991년 늦가을 어느 날, 누나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온 엄마에게서 “이제 몇 개월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저는 누나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졌지요. 몇 날 며칠 아무리 생각해봐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겁니다. 그러다 문득 대학을 두 곳이나 다녔지만 제대로 삶을 만들어가지 못하고 있던 저의 모습을 바라보며 건강했던 누나와 나누었던 여러 대화들을 떠올렸지요. 그 결과 내 갈 길을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누나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바로 ‘개인전’이었습니다. 작업해 놓은 게 별로 없었지만 미룰 수가 없었죠. 다행히 작업 노트는 계속 쓰고 있었고, 그때의 내 상황, 정신 상태를 가장 잘 반영하는 게 무엇일까를 고민한 끝에 전시회 제목을 ‘아노미’라고 지었습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저서《분업론》(1893)과《자살론》(1897)에서 제시한 이 용어는, 한 사회의 전통과 도덕규범이 무너지면서 생겨나는 혼돈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였죠. 무기력에 휩싸여 있던 시기에 변변한 단체전 경험 한 번 없이 무작정 개인전까지 준비했으니 불안감이 대단했었죠. 하지만 작품들 속에는 이것들을 넘어서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었습니다. 작가 노트에 “이 개인전은 내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는 작업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삶이 소중하고 고통마저도 아름답다. 그래서 지금 나는 행복하다. 단순히 아노미적 상황에 빠져 있지 않겠다.”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이때가 31세였습니다.

 복사기로 자신의 몸을 찍다
 1992년부터 2003년까지 11년 동안 사무용 흑백 복사기에 직접 제 몸을 대고 복사해서 나온 이미지를 카메라로 다시 찍어 확대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혼자 복사기 앞에 서서 각종 기능을 눌러보며 작업을 했지요. 그 중에 어떤 작품은 복사한 것을 가지고 또 복사해서 32장 즉 그 당시 제 나이만큼 복사해서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카피 제너레이션’기법이라고 하는데 복사를 계속하다 보면 이미지가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최종적으로 원본 한 장 가지고 32장씩 네 대의 복사기를 이용하여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이미지는 구체성을 잃으며 변화하지만 그 또한 새로운 이미지로서 새로운 의미를 드러냅니다. 다시 말해 제 나이에 맞춰 복사하면서, ‘아~ 이게 내가 살아온 삶이구나’를 느꼈고, 더불어 내가 가고 싶었던 길인데 못 간 길, 가지 않은 길, 정말 가고 싶지 않지만 가야만 했던 길이 있었으며 또한 앞으로 가고 싶은 길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죠.(여러 작품집을 펼쳐 보이며“여기 있는 작품들은 다 제 몸을 찍은 겁니다”라며 설명하는 박진호 작가) 

 흑백 복사기에서 인생을 배우다
 제가 직접 제 몸을 흑백 복사기에 대고 복사하며 깨달은 점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복사기에 직접 얼굴을 대 보신 적 있으신가요? 얼굴을 대는 순간 유리판에서 바로 차가움이 느껴집니다. 제가 살아가는 삶의 현실을 그 차가움을 통해 깨닫게 되죠. 복사기 앞에서 이미지를 만들고자 하는 행위도 어찌 보면 복사기 기능에 적응하며 뭔가를 만들고 싶은 것이죠. 게다가 흑백 복사기는 심도가 굉장히 얕아요. (사진 찍을 때 렌즈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사실 어느 한 면에만 초점을 맞추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을 찍으려고 눈에 초점을 맞췄는데 코, 귀도 선명하게 찍힌 것은 심도를 깊게 렌즈 조리개를 조절한 것이죠.) 심도가 얕은 흑백 복사기는 유리면에 밀착된 부분만 복사됩니다. 굴곡이 있는 몸을 복사하기 위해서는 몸을 유리판에 밀착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특히 세게 눌린 부분을 복사기는 디테일 없이 아예 하얗게 표현해 버리죠. 유리판에 닿지 않은 부분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요. 그럴 때면 ‘아~ 내가 이렇게 안간힘을 쓰며 사는 건가?’하며 마치 미로 속에 갇혀 있는 듯했던 제가 표현된 것 같아 마음이 아리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작업할 때 복사기의 시작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강렬한 빛에 얼굴은 찡그려지고 강한 모터 작동 소리에 두려움까지 엄습합니다. 나중에는 눈을 뜨고도 작업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런 작업을 반복하며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와 소재 그리고 메커니즘이 잘 맞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노이로제 #42 120x180cm, 1995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다
 첫 개인전을 마친 후 3년 만인 1995년,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이제 내 삶을 제대로 만드는구나’하는 느낌을 작가노트에 썼습니다. 그때가 34세였죠. 그 개인전 타이틀은 ‘NEUROSE’입니다. 이 제목은 첫 개인전을 마치고 얼마 후 읽었던 참 오래된 심리학 책에서 접한 단어였습니다. 그 낡고 오래된 책은 대부분의 명사를 모두 한자로 써 놓아 정말 열심히 집중하며 읽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독일어인 이 단어가 대문자로 등장한 겁니다. 맥락상으로는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곧바로 ‘노이로제’라고는 못 읽겠더라고요. 
 한참 후 ‘아~ 노이로제구나!’라고 읽으며 앞으로 개인전을 열면 ‘노이로제’라고 지을 거라 생각했고 그것을 일기에 적어 놓았습니다. 그 두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저는 ‘NEUROSE’를 ‘뉴 로즈(New Rose)!’로 해석해서 이렇게 의미부여를 했었죠. ‘그래 난 새로운 장미를 꽃 피울 거야’,‘내 삶을 그렇게 만들 거야’라고 말입니다. 이듬해 그 작품들 가운데 몇 점이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새로운 시각>전에 초대 받아 전시한 후 소장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내가 저 달을 움직였다!
 복사기로 작업한 작품은 11년 동안 개인전을 여섯 번 했습니다. 복사기 작업을 마무리한 후, 다른 작품들로 몇 번의 개인전을 치르면서 동시에 달을 촬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달을 찍던 날이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2005년 어느 날, 잠시 동안 의정부의 한 아파트 19층을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던 때였어요. 친구들과 도봉산 산행을 마치고 뒤풀이가 늦어져 서울 집에 가지 않고 작업실로 왔죠. 들어와 환기하려고 창을 여는데, 달이 ‘휘이익’하고 올라오는 거예요. 이전엔 ‘멋지네!’정도로 끝났을 풍경인데, 이날은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하는 겁니다. 급하게 카메라를 찾아 손에 들고 삼각대 없이 달을 네 장 찍었어요.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감흥이 싹 사라지는 겁니다. 아무튼 그 중 한 장을 골라 ‘저 달을 내가 움직였다’라는 제목으로 단체전에 출품하고 이후 작업을 좀 더 해서 두 번 발표한 그 이후로 작업을 딱 멈추었죠. 
 이전 작품들은 개념을 잡고 작업을 시작했는데, 달 작업은 개념을 제대로 잡지 못한 상태에서, 달이 뜨면 그냥 홀린 듯이 찍었던 겁니다. 도무지 작업에 진척이 없었어요. 몇 년 동안 ‘이게 뭐지? 내가 왜 찍지?’ 이런 생각을 아무리 글로 써도 정리가 되지 않고, 촬영 결과물도 형편없었어요. 정말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7년이 지난 어느 날, 초등학교 동창과 북악스카이웨이 근처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달구경이나 하자고 와룡공원에 가서 남산 쪽에서 뜨는 달을 봤습니다. 친구와 “달 좋다”하며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데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며 막 찍고 싶은 겁니다. “나 빨리 작업실 가서 작업해야겠다!” 비로소 촬영이 제대로 되기 시작했어요. 수 초에서 수십 초의 느린 셔터속도가 아니라, 오히려 1초 정도의 짧은 속도로 셔터를 설정하고 카메라를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방법이었습니다. 또 개념도 확실하게 세워졌습니다. 그때부터 완성도 높이는 작업에 들어가 4년 후, 개인전 ‘내가 저 달을 움직였다!’를 열었습니다. 40대 중반에 시작한 작업이 50대 중반이 되어서야 마무리된 것이죠. 처음에는 달이 그저 소원을 비는 신과 같은 존재였는데, 나중에는 ‘아! 내가 저 신을 움직였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제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관습과 억압 혹은 어떤 운명 같은 것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스러운 삶, 주체적인 삶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이죠. 

아, 달에게 찔린다는 것, 강림이었다.
하, 달을 찍는다는 것, 그것은 주술이었다.
달은 신이었던 것이다.
아하, 그 신을 나는, 내 손으로,
내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 작업노트 중에서 -


 최근에 한 개인전, ‘세잔의 앵무새’
 올해 3월 중순부터 5월 말까지 두 달 반 동안 파주 헤이리 ‘움 갤러리’에서 개관 초대전을 열면서 제목을 ‘세잔의 앵무새’로 정했습니다. 1992년 첫 개인전을 열기 1~2년 전쯤, 작업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고 있을 때 어느 신문 칼럼에서 ‘세잔의 앵무새’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내용인즉, 세잔이 힘든 무명시절을 지낼 때 앵무새를 작업실에서 기르며 ‘어떤 말’을 훈련시켰다고 해요. 이 앵무새는 세잔이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세잔은 위대한 화가다!, 세잔은 천재다!”라고요. 일기장에 그 기사를 읽으며 받았던 강렬한 인상을 적어 놓았죠. 저의 초기작과 최근작만으로 개인전을 구상하면서, 28년 전 일기를 꺼내 읽으며 ‘아~ 이런 힘으로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라는 느낌이 들었고, 이번 전시회에 딱 맞는 제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한테 ‘세잔의 앵무새’만큼이나 감동을 주었던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폴 발레리가 했던 멋진 말이 기억났습니다.

 “신들은 은혜롭게도 아무런 대가 없이 
  우리에게 시의 첫 구절을 주었다. 
둘째 구절을 완성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렸다.”
 
 누구에게나 어떤 예술적 재능은 주어지는데 그것을 과연 어떻게 구현해내고, 어떻게 실천하느냐는 자기에게 달려있다는 거겠죠. 폴 세잔과 폴 발레리, 이 두 ‘폴’이 작가 생활을 해오는 30년 동안 저의 능력과 재능의 부족함을 느낄 때마다 큰 격려가 되었고, 삶을 지탱하게 해주었습니다. 

 《박진호의 사진공부 1, 인종차별》미국의 역사와 인종차별의 관점에서 펴내다
 이 책을 쓰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즐거운 사진 감상 방법, 사진을 좀 더 폭넓게, 깊게 바라볼 수 있는 공부 방법을 제시해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불안전한 감각과 감성에 의존한 글이 아니라, 또 그저 감상에 젖은 또는 알맹이 없는 감상 글이 아니라, 객관적인 근거를 가지고 분석한 감상 결과를 내보이자는 것이었죠. 그리고 남의 것을 되뇌는 게 아닌, 내 눈으로 본 해석, 내 마음으로 느낀 감동, 내 머리로 이해한 것으로 구성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그 목적과 목표를 위해 사진 역사나 사진 이론보다는 미국 사회와 미국 역사를 더 많이 찾아보았습니다. 시대를 대상으로 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감상과 해석에서 역사의 중요성을 부각하고 싶었던 거죠. 특히 현대사진의 시초, 현대사진의 아버지라고 하는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집 <미국인들>은 얼핏 인종차별과 깊은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그는 1950년대의 미국의 구체적 사회현상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미국 역사를 통해 프랭크의 사진이 미국의 인종차별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1950년대는 미국에서 흑인 민권운동이 격화되었던 시기였는데, 당시 미국 48개주를 2년 동안 돌아다니며 작업한 그가 인종차별 현상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죠. 

 

 현재 애완견 ‘도로’와 함께 포천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박진호 사진가를 만나며 그가 참으로 고뇌하는 작가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정해진 속도에 맞추는 인생이 아니라, 항상 한 발짝 뒤진 것 같은 인생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작업을 해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작업을 하면서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치유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앞으로 더 승화된 작품들로 독자들을 만나기를 바라면서 긴 여운을 가진 채, 사람을 그리워하는 ‘도로’의 아쉬운 눈빛을 뒤로하고 다시 산본으로 향했습니다.

 

 

1985년 한양대학교 졸업
1989년 서울예술대학 사진과 졸업
1997년 홍익대학교 산미대학원 졸업 (사진디자인 전공)
 
주요 개인전
2020년 세잔의 앵무새 (갤러리 움, 파주 헤이리)
2017년 내가 저 달을 움직였다!!! (아트스페이스 플라스크, 서울)
2016년 내가 저 달을 움직였다! (갤러리 나우, 서울)
2010년 영가(靈家)의 초상(肖像) (이룸 갤러리, 초대, 서울)
2008년 어쩌다 느낀 작은 슬픔이 있을 때 (갤러리 나우, 기획, 서울)
2005년 나를 보다-길을 잃다 (김진혜 갤러리, 서울)
1995년 노이로제 (삼성포토갤러리, 서울)
1992년 아노미 (소나무 갤러리, 서울) 
작품 소장 : 국립현대미술관(과천, 1996), 시립대구미술관(2016)
출간 :《박진호의 사진 공부 1-인종차별》(2016)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30호>에 실려 있습니다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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