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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걸은 여전히 배고프다!

2021년 2월호(136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1. 2. 26.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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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trospective & prospective 31]

 

알파걸은 여전히 배고프다! 
(Alpha Girl is Still Hungry!)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모 문화재단 인턴사원 선발의 최종 면접관으로 참석했던 자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총 25명 중 1명을 선발하는 자리였는데 24명을 심사하는 동안 눈에 띄는 지원자가 없어서 내심 실망 중이었습니다. 마지막 25번째 지원자가 입장했고 직업관과 전문지식 그리고 기타 질문들을 통해 저는 이 지원자가 이전 지원자들에 비해 월등한 실력과 자질을 겸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모든 심사를 마치고 점수표를 제출한 후 몇몇 남자 면접관들이 한마디씩 했습니다. “25번은 실력은 있을 것 같은데… 같이 일하면 부담스러울 것 같아요.”, “그렇죠? 뭔가 논리적이지 않은 일을 시키면 따박따박 안 되는 이유를 10가지 이상 댈 것 같지요?” 농담 반 진담 반이었지만 이 같은 대화를 듣고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선입관들이 그동안 숱하게 등장했던 우리 사회의 알파 걸 들을 알파 우먼으로 자리 잡지 못하게 하는 요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알파 걸이란 말은 미국 하버드대 교수인 댄 틴들런이 2006년에 출간한 저서《새로운 여자의 탄생-알파 걸(Alpha Girls: Understanding the New American Girl and How She is Changing the World)》에서 처음으로 사용했으며 저돌적인 도전 정신을 지닌 강한 여성을 의미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알파 걸이란 용어가 탄생한 지 15년이 지난 지금 그 수많은 알파 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빼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사회 곳곳에서 알파 우먼으로 성장하고 있을까요?

일류대를 나오고 유학까지 다녀온 후 취직해 15년간 직장 생활을 했던 후배 C. 지금은 개인사업을 하고 있지만 회사 시절을 생각하면 마음 한쪽이 시려온다고 합니다. “신입사원 시절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연차가 올라가면서 점점 사람들과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더라고요. 주변이 온통 남자들뿐인 부서에서 일했는데 제가 자기주장 강하고 고분고분하지 않다고 저를 알게 모르게 따돌리는 거예요. 나중에는 후배들까지 은근히 저를 무시하는데 정말 참을 수가 없었어요.” 
결국 자의 반 타의 반 직장을 그만두었고 그럭저럭 지금의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이 꿈꾸던 미래의 모습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현실이 심한 스트레스가 되어 본인을 괴롭히고 있다고 했습니다. 

역시 명문대를 나오고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입사 시험에 합격했던 제자 J도 요즘 심각하게 전직을 고려중입니다. 빠르고 정확하게 맡은 일은 완벽히 해낸다고 자부하고 회사를 다닌 지 언 10여년… 벌써 몇 번째 인사 불이익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윗분들은 항상 조직을 위해 인사를 하다보면 꼭 실력만으로 평가받는 것은 아니라고 했어요. 하지만 저보다 못한 남자 직원들이 승승장구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참기 힘들어져요. 시험 보는 거라면 뭐든 자신 있는데 사회생활은 그게 아니더라고요. 안 좋은 일을 자주 겪다보니 이제는 자신감도 없어지는 것 같아요.”라며 한숨을 쉽니다. 
노력해서 얻지 못할 것이 없다고 여겼던 알파 걸들이기에 현실에 무릎 꿇거나 스스로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그 좌절감은 더 클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알파 걸 대부분에게 능력이나 실적의 문제는 별로 없습니다. 자신이 맡은 일은 완벽하게 처리해내는 것이 알파 걸 대부분의 공통점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알파 걸에게는 ‘주변과 잘 어울리지 못 한다’거나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다’는 말들이 꼬리표처럼 따라붙기 일쑤입니다. 증명하기에도 반문하기에도 난감한 꼬리표입니다. 

한때 여성 합격자라는 것만으로도 뉴스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무슨 시험이든 수석은 물론이고 과반수 이상이 여성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10대, 20대에서 알파 걸들이 쏟아지고 있는 것과 달리 30대 후반, 40대가 되면 알파라는 호칭을 붙일 만한 여성의 숫자는 눈에 띄게 줄어듭니다. 특히 정권의 핵심 가치를 따라야 하는 공기업에서는 여성 고위직이 늘어난 것처럼 보이기 위해 개방형이나 계약직의 고위 공무원들을 여성으로 채우는 꼼수로 빈축을 사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알파 걸은 아직까지는 그야말로 알파 ‘걸’ 일뿐, 현실에서는 알파 ‘우먼’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회 도처에서 알파 걸들이 활약하기 시작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 우리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단순히 결론 내릴 수 있을까요? 알파 우먼이 되지 못하는 알파 걸은 한편으론 우리 사회가 한때 잘 나갔던, 더욱 발전할 수 있었던 여성들을 더 밀어주고 키우지 못한 채 평범한 여성으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뜻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알파 우먼이 되지 못하고 가정으로 돌아간 여성의 상당수가 내 딸만큼은 진정한 알파 걸로 키우겠다고 온갖 정성을 다하지만, 그 딸 역시 가부장적 관습과 육아 부담이 사회적으로 해소되지 않는 한 알파 우먼이 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초저출산국, 인구절벽, 여성들이 아이를 낳지 않아 국가 경쟁력이 저하 된다며 정부와 사회가 걱정 어린 소리만 내세우지만, 능력과 자질, 성취욕을 두루 갖춘 여성 인력을 적극 활용하지 못하고 사장시켜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엄청난 국가적 손실이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기업마다 연초엔 승진인사를 포함한 인사이동이 있습니다. 최근 승진인사에서 불이익을 당했다는 친구의 실망감과 괴로움이 수화기 너머까지 전해졌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나의 실적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누가 말이라도 해 준다면 납득이라도 하겠어. 그런데 어디서부터 나를 추스려야 할지 정말 막막하고 암담하다.” 
이번 주말엔 잠시 실의에 빠진 내 친구를 만나 다시 알파 우먼으로 비상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줘야겠습니다. 

 

예술의 전당 영상문화부장 손미정

mirha2000@naver.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36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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